한국 천주교 聖地ㅡ천호 성지(완주 비봉면)
성인, 순교자들의 묘와 한국 천주교의 큰 핵으로 자리잡고 있는 성지
▲천호 성지 입구
▲찾아가는 길
천호성지는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교우촌 천호(天呼) 공소의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있다. 천호공소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하느님을 부르며 사는 신앙 공동체로서 존재하고 있고, 천호산 역시 이름 그대로 순교자의 피를 담은 병(甁)의 구실을 하고 있다.
천호 사적지는 호남 지역이 자랑하는 대표적 사적지로 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불어 닥치던 1866년 병인년(고종 3년, 병인박해)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성 이명서(베드로), 성 손선지(베드로),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요셉)와 같은 해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분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다.
그 밖에도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감춘 채 묻혀 있다. 천호 성지 지역에는 박해시대에 다리실 공소를 포함한 총 7개의 공소가 있었다. 이 공소가 구성된 각 지역은 '택리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이라 말할 정도로 첩첩산중에 묻혀있었다.
이런곳으로 숨어 들어와 밭을 일구고 기도생활을 하던 교우들의 피와 땀이 지금의 한국 천주교를 일구었다. 천호성지는 성인들의 묘와 순교자들의 묘 뿐만이 아닌 한국 천주교의 큰 핵으로 자리잡고 있는 성지이다. 천호성지와 그 주변의 산은 본래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로서 조선조 때 나라에서 고흥 유씨 문중에 하사한 사패지지(賜牌之地)였다.
이러한 남의 땅에서 사는 신도들은 산 자들의 집이건 죽은 자들의 무덤이건 언젠가는 쫓겨나야 할 처지였다. 그러던 중 1909년 뜻하지 않게 이 땅을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되재 본당 목세영 신부를 중심으로 12명의 신도들이 어렵사리 돈을 마련하여 150 정보의 임야를 매입했다.
이렇게 해서 공소 신도들은 생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미 모셔진 순교자들의 묘소들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1941년경 150 정보 중에서 순교자들의 묘와 종적은 알 수 없지만, 순교자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 되는 땅 75 정보를 교회에 봉헌했다.
이 땅을 봉헌한 사람들은 목세영(베르몽)신부, 김여선(金汝先), 이만보(李萬甫), 장정운(張正云), 김현구(金顯九), 박준호(朴準鎬), 민감룡(閔甘龍), 송예용(宋禮用) 등 8명이며, 이로써 오늘의 성지를 보존하게 된 것이다.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년 5월, 천호산에 묻힌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을 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그동안 실전(失傳)되어 왔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치명한 후 합동으로 묻혀 있던 여덟 분의 유해와 천호산 기슭에서 두 분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러나 천호산에는 지금도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어 발굴하지 못하는 많은 순교자들이 계셔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천호 마을
▲천호 마을
▲천호 공소(다리실·용추네)
천호공소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는 다른 지명을 갖고 있는데, 박해시대에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고 불렀다. 다리실은 월곡(月谷)이라고도 썼으며, 용추네는 본래 용이 등천한 내(川)가 있다 해서 용천내라고 했는데 용추네는 용천내가 변한 이름이다. 천호(天呼)라는 행정명(行政名)은 후대에 교우마을이 형성되면서 용천내가 천호로 바뀐 듯하다.
천호마을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였는데 주로 충청도 신도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 신도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성인들의 묘지 맞은편 골짜기인 무능골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 골짜기 밑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가 다시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와 현재의 마을터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68년(고종 5년, 무진년)에는 다리실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혔다.
그래서 6월 9일 문회장, 이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장윤경(야고버) 회장 등 천호 신도들이 여산으로 끌려 갔는데, 그 중 장윤경 회장은 1868년 10월 1일(양력 11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때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가 사망했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 다리실 신도들이 체포되던 날이었다.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는 병으로 앓아 누운지 스무날이나 되어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포교 일행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마태오를 욱지르며 신도 들이 도망간 곳을 대라고 하다가는 체포한 신도들의 압수한 재산을 가지고 여산 관아로 갔다. 그날 밤 마태오의 큰형 요한은 환자가 걱정이 되어 집에 왔다가 환자로부터 포졸들이 남기고 간 말을 듣고는 환자인 마태오를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런데 마침 장마철이어서 찬비를 맞으며 3, 4일을 지내고 나니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포졸들이 찾아 올 것이 두려워 자기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 갔다. 그러나 마태오는 불안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요한은 환자가 무엇이든 먹어야 살 것 같아 음식을 주었지만 먹지를 못하더니 마침내 풍증(風症)으로 1868년 6월 12일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입전으로는 이런 말이 전해 져 오고 있다. 환자가 몹시 앓고 있는데 포졸들이 다시 마을에 와서 집을 뒤지고 다니다가 환자와 요한이 숨어 있는 집 울안에까지 왔다.
환자는 고열의 고통을 못이겨 신음하고 있던 터였다. 형 요한은 발각되는 날에는 숨을 곳이 들통나 떼죽음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환자의 신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 씌워 누르고 있다가 포졸들이 떠난 후에 이불을 걷어 보니 질식해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해시대에 천호산 기슭에는 다리실(용추네=천호),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 개의 공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실, 성채골, 그리고 후대에 터를 옮겨 새로이 시작한 산수골 공소 만이 남아 있는데 이들 공소 중 다리실 공소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공소다.
1877년 한국천주교회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밖에 없었는데, 블랑 신부는 1877년 으럼골을 사목활동의 거점지로 하여 정착한 후, 리우빌 신부와 라푸르카드 신부 등 3명의 선교사가 10여년 동안 이곳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들 선교 사들이 주로 머문 곳은 천호공소였다. 오늘의 천호공소는 150여년의 전통을 지닌 교우촌 답게 주민 전체가 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호공소 종탑
▲천호공소 종
▲성지입구 추모석
▲추모석 뒷면
▲안내도
▲성 모자 상
▲성모 상
▲구 성당 내부
▲구 성당 내부
▲구 성당 내부
▲피정의 집
전주교구는 1984년부터 천호성지를 개발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성지를 축성하였고, 50주년 기념의 해인 1987년에는 전주 교구민들이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신앙의 수련장으로 피정의 집을 세웠다.
이곳은 천호산 기슭에 형성되었던 박해시대 교우촌의 옛 터와 주변 환경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 되어 있어서 그 시대 교우촌의 입지적 특성을 보여 주는 교육장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 성지 봉안 경당(부활 성당 아래층)
▲천호성지 봉안경당 성가정상
▲천호성지 봉안경당 피에타 상
▲성 요셉 상
▲경당내부
▲경당내부
▲경당내부
▲경당내부
▲경당내부
▲천호 성지 봉안 경당(부활 성당 아래층) 내부의 성인 유해실
▲천호 성지 봉안 경당내부의 성인 유해실
▲천호 성지 봉안 경당내부의 성인 유해실
▲성 손선지(베드로) 실
▲성 이명서(베드로) 실
▲성 한재권(요셉) 실
▲성 정문호(바르돌로메오) 실
▲순교자 묘역
▲순교자 묘역 설명
▲순교자 묘역
▲순교자 묘역
▲순교자 묘역
▲성 이명서 베드로(1821-1866)
일명 '재덕'으로도 불리는 성 이명서 베드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지방으로 퍼지고 전라도 지방에서도 전라 감사의 지시로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할 때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전주 감영에서는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으나 이명서는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나의 하느님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부지런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 조화서 베드로, 성 정원지 베드로, 성 조윤호 요셉과 함께 체포되었다.
▲성 손선지 베드로(1820-1866)
일명 '승운'으로도 불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선지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전라 감사의 체포령으로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신문 중 회장의 신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대라는 관장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손선지는 회장답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며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드디어 12월 13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47세로 순교했다.
▲성 정문호 발도로메오(1801-1866)
일명 '계식'으로도 불리는 성 정문호 발도로메오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임천에서 천주교를 알아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박해로 인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고 있었다. 한때 고을의 원을 지내기도 하여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해서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까지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원 5일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한재권 등과 체포되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로 순교했다. 순교하기 전 그는 옥중에서 항상 기도로써 순교를 준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고 하며 진심으로 자신의 순교를 기뻐했다. 성 정문호 발도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함께 체포되었다.
▲성 한재권 요셉(1836-1866)
성 한재권 요셉은 태중 교우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나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진잠 지방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박해로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무 직책없이 교회 일에 충실했다. 1866년 12월 5일 한재권은 전라 감사의 명으로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친구를 통해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에까지 찾아와 배교 할 것을 간청했으나 한재권은 "아버님,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하고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31세로 순교했다.
▲순교자 김영오 묘
▲무명 순교자 묘
▲순교자 묘역 주변의 순교비
▲순교자 묘 입구
▲게세마니동산
▲게세마니동산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 처
▲십자가의 길 2 처
▲십자가의 길 3 처
▲십자가의 길 4 처
▲십자가의 길 5 처
▲십자가의 길 6 처
▲십자가의 길 7 처
▲십자가의 길 8 처
▲십자가의 길 9 처
▲십자가의 길 10 처
▲십자가의 길 11 처
▲십자가의 길 12 처
▲십자가의 길 13 처
▲십자가의 길 14 처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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