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유럽********국가들/⊙이탈리아***기행

이태리ㅡ아씨시(Assisi)ㅡ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대성당. 무덤. 생가.

by 삼수갑산 2021. 11. 21.

아씨시(Assisi)ㅡ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대성당. 무덤. 생가.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치스꼬( San Francesco ; St. Francisco) 수도원

 

아씨시는 이탈리아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도시다. 그것은 바로 여기서 프란치스꼬 성인이 태어났고 또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꼬는 1182년 아씨시에서 프랑스에까지 지점을 둘 정도의 큰 상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젊은 시절의 프란치시꼬는 아씨시 청년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재산을 낭비하며 방종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프란치스꼬가 아씨시와 페루지아간에 벌어진 싸움터에서 포로로 잡히고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니, 단테의 말을 빌리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점진적으로 좀더 뚜렷한 양상을 띄어 마침내 그의 동료들은 프란치스꼬가딴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자문하던 중 뜻밖에 한 나병환자를 만나 강한 충동으로 나환자의 손에 자기 입술을 갖다대면서 나환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시작한다.

 

두 번째의 체험은 어느 날 반쯤 허물어진 성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주께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에 걸려 있는 십자고상으로부터 "프란치스꼬야, 가서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워라"는 말이 들려와, 그는 돌을 수집하여 몰탈을 만들어 소성당을 재건했다.

 

한번은 옛 동료들로부터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서 "나는 가난과 결혼하려고 해"하면서 결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그는 마침내 자신의 자유의사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할 수 없는 내적 부를 얻었다.

 

가난한 자와 똑같이 된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말했다. "거지를 욕하는 자는 누구건간에, 모든 가난한 이들이 그분의 고귀한 표를 지니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209년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참례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하신 말씀을 듣고,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행할 일이다."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뼉을 쳤다. 이런 철저한 청빈생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게 수도원 인가를 청원하여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1224년 성 프란치스꼬가 '알베나'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 친히

양 손, 양 발, 그리고 늑방에다 오상(五傷)을 박아 주셨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오상은 주의 상처와 같이 심한 고통을 주는 어려운

시련이기도 하였다. 1226년 10월 3일 죽을 때까지 이런 시련을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쳤다.

 

44세의 짧은 일생 동안 빛나는 성덕과 생전에 행한 여러 불가사의한 일과 사후에 계속 일어나는

기적 때문에 임종한 지 3년 후인 1229년에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프란치스꼬 수도원과 성당은 엘리아 수사가 설계하여 건축했는데 2층에 성당이 있고,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정신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28개의 벽화에 프란치스꼬 성인의 생애를 담은 그림이 그려져있다. 성당 앞의 푸른 풀 밭에는

말을 타고 있는 성프란체스코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에 대한 설명이 담긴 현판에는 이러한 글이 담겨 있다.

"Lord, what do you want me to do?" "Go back to your city and you will be told what you must do"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벽화, 치마부에의 제자 지오토의 작품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치마부에는 1280년경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미술감독으로 임명되어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빈 벽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가장 중요한 위치인 1층 제대 주변의 벽화를 그리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의 작품은 손상이 심해서 그 규모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지하층에 그린 ‘성모자와 함께 있는 성 프란체스코’는 다행히 보존 상태가 좋아서 생생하게

표현된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 프란체스코의 형상이 바로 이 작품에서 나왔다. 치마부에가 일을 시작한 지

한 10년 쯤 지나서 어린 제자 조토가 벽화 작업에 투입되었다.

 

그가 그린 첫 작품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1층 위쪽이었는데 작품이 완성되자 선생을

비롯하여 그곳에서 작업하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벽 속의 인물들이 살아서 걸어나올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적인 그림에 익숙해져 있는

오늘날의 관람객 입장에서 본다면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데뷔작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조토는 이 성당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1층 성당의 벽 전체를 장식할

기회를 얻는다. 그는 벽을 28개의 사각 구획으로 나눈 뒤 각각의 장면에 성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프레스코 벽화로 생생하게 담아냈다.

 

프레스코란 영어의 ‘프레시(fresh)’에 해당하는 말로 벽에 회칠을 하여 젖은 상태에서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성인이 세속의 옷을 벗는 장면에서부터 교황으로부터 프란체스코 교단을 승인받는 장면, 그리고 장례식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가히 그림으로 읽는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라 할 수 있다.

 

조토의 이 작품들을 기점으로 서양에서는 작가 중심의 미술사가 시작된다. 조토 이전의 미술사는

보통 시대나 양식으로 분류한다. 고대, 중세, 고딕, 로마네스크와 같은 분류가 그것이다.

 

하지만 조토 이후에는 작가 개인의 생애와 작품이 미술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작가 한 사람의 위력이 역사의 연구 방법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아시시에서 명성을 떨치자 조토에게는 전국에서 작품 주문이 쇄도했다. 그의 고향인 피렌체 사람들은

고향이 배출한 이 화가를 자랑으로 여겼고, 그의 행적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젯거리가 되었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이 누릴 법한 인기를 당시에는 화가 조토가 누린 것이다.

 

▲구 미네르바신전 성당

 

오른쪽 이오니아식 기둥의 건물은 기원전 100전 지어진 미네르바신전 인데 지금은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며, 이 광장은 아시시 시청 광장으로 오른꼭에 분수대가 보인다

 

▲성당 내부

 

기원전 100년전에 미네르바 신전이었던 곳인데 수비시오산 분도형제회에서 접수하여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성당 중앙 제대에 12개의 별을 쓰고 계신 성모상이 있다.(현재 TOR 울수3회에서 관리)

 

▲San Rufino 성당

 

▲산타 키아라 성당, 성 글라라(영어식) 대성당[Basilica di Santa Chiara]

 

▲산타 키아라 (성 글라라)성당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Gregirius) 9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16년 가톨릭 액션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이 성당에는 글라라 성녀의 유해와 다미아노 십자가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수녀 성녀 글라라 사후 4년인 1257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 3년 후에 글라라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프란치스꼬 성인에게 말씀하신 독특한 모습의 십자고상, 프란치스꼬와 글라라 두분

성인이 입던 옷, 그리고 글라라 성녀의 시신이라 할 것이다.

 

대리석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성녀 글라라의 무덤이 있는데, 창살 사이로 보이는 글라라 성녀의

얼굴은 새까맣게 화석이 되어 있다. 700여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성프란체스코 생가

 

▲끼에사누오바(새성당)

 

끼에사누오바(새성당) 성프란치스코의 출생지로 여겨지는 세곳중 하나로 

왼편에 성인의 부모상이 서있다

 

▲성프란치스코의 출생지로 여겨지는 세곳중의 한군데(문옆의 벽에 출생지를 알리는 부조판)

 

▲성프란치스코의 출생지로 여겨지는 세곳중의 한군데 (옷감장사터)

 

▲아씨시의 거리 및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