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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ㅡ시칠리아섬ㅡ카타니아(Catania) 대성당

by 삼수갑산 2022. 1. 5.

시칠리아섬. 카타니아(Catania)ㅡ카타니아 대성당

에트나 산 남쪽, 이오니아 해에 면한 넓은 카타니아 평야에 있다. BC 729년 북쪽으로 80㎞ 떨어져 있는낙소스에서 온 칼키스인들(그리스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에서 온 정착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BC 5세기에 시라쿠사의 참주인 히에론 1세와 그의 아들 데이노메네스가 이 섬을 정복하고 이름을화산에서 따온 아이트나로 바꾸었는데, 이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섬은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

 

주민들이 데이노메네스의 추종자들을 몰아낸 뒤 다시 옛 이름을 회복했다. 시칠리아 도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로마에 함락되었으며(BC 263), 옥타비아누스(뒤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다.

 

데시우스 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하던 시기에 이곳에서도 이 시의 수호성인인 성 아가타를 비롯한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은 뒤 카타니아는 비잔틴·아랍인·노르만인에게 차례로 함락되었다. 슈바벤의 황제들을 적대하여 하인리히 6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아라곤 군주들이 이곳에서 종종 머물기도 했다.

 

16~17세기에 내란, 해적의 침략, 전염병, 기아 및 에트나 화산폭발(1669), 지진(1693)을 비롯한 자연재해 등을 겪었다. 그후 카타니아는 나폴리의 부르봉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고, 1837년 콜레라의 만연 속에서 일어난 시민 소요사태가 강제적으로 진압당했으며 1848년 다른 도시들과 연합하여 시칠리아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다 또 한번 무력으로 진압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3년 폭격과 치열한 전투로 크게 파괴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여러 번 분출된 용암으로 이루어졌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경사가 완만히 낮아진다.

 

건축에 주로 화산 응회암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옛 시가지는 전반적으로 짙은 회색을 띠고 있다. 1693년의 지진 이후 거의 새로이 건설되었으므로 도심부는 18세기 양식의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고대 유적으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극장 유적지들과 로마 시대의 원형투기장·바실리카·목욕탕·송수로 등이 있다.

 

프리드리히 2세를 기념하여 지은 4개의 뾰족한 탑이 있는 카스텔로 우르시노(1239~50)는 오랫동안 대표적인 군사건축물로 알려졌으며, 지금은 일부가 상당량의 미술작품과 고대 유물들이 소장된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민들의 생활 중심지인 두오모 광장은 18세기의 궁전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넓은 거리들과 이어져 있다. 1091년에 노르만의 백작 루제로 1세가 세웠던 대성당 가운데 검은 용암으로 만든 3개의 앱스(後陣)와 트랜셉트(翼廊)의 일부가 남아 있다.

 

1693년의 지진 이후 건축가 프라 피올라모 팔라초토와 조반니 바티스타 바카리니(1702~68)가 새로 세웠던 이 대성당에는 성 아가타의 유물과 이곳 태생의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무덤이 있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산니콜로 교회(1693~1735)는 같은 이름의 옛 베네딕투스회 수도원(14~17세기)과 연결되어 있다.

 

1434년에 아라곤의 알폰소가 세운 대학교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교이며 도서관(1755)에는중세의 귀중한 필사본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주요유적으로는 바로크 양식의 산타아가타 교회, 바카리니가 세운 시청사, 두오모 광장에 있는 코끼리 분수대(1736), 콜레자타(왕실 예배당), 천문대,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된 벨리니의생가 등이 있다.

 

시칠리아에서 2번째로 큰 이 시는 공업·교통 중심지이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교역이 활발한 항구를 보유하고 있다. 팔레르모·메시나·시라쿠사와 철도로 연결된다.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유명한 겨울 휴양지이기도 하다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카타니아 대성당

 

카타니아 대성당은 1693년 대지진으로 소실된 후 1736년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건축 하였다. 1091년에 노르만의 백작 루제로 1세가 세웠던 대성당 가운데 검은 용암으로 만든 3개의 앱스(後陣)와 트랜셉트(翼廊)의 일부가 남아 있다.

 

1693년의 지진 이후 건축가 프라 피올라모 팔라초토와 조반니 바티스타 바카리니(1702~68)가 새로 세웠던 이 대성당에는 성 아가타의 유물과 이곳 태생의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무덤이 있다.

 

▲카타니아 대성당

 

▲카타니아 대성당

 

▲카타니아 대성당

 

▲카타니아 대성당

 

▲카타니아 대성당

 

▲카타니아 대성당

 

▲카타니아 대성당

 

▲카타니아 대성당

 

▲성 아가타(St Agatha) 상

 

▲성 아가타(St Agatha) 상

 

카타니아와 시실리의 수호성인 겸 종 만드는 장인들의 수호성인. 상징: 커다란 족집게, 칼, 양초 횃불, 그리고 자기의 두 유방을 쟁반에 담아 들고 있음.아가타는 3세기경 시실리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는 로마 집정관인 퀸티안(Quintian)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이를 뿌리치고 처녀로서 그리스도에게 일생을 맡기기로 서약하였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집정관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로마제국의 칙령을 공포했으며 꽃 같이 아름다운 아가타를 마을의 창녀 집에 넘겨 아가타의 몸을 망가트리도록 했다.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기로 결정한 아가타는 창녀 집 주인의 무지막지한 행동에 항거하였다. 이에 격분한 창녀 집 주인은 아가타에게 참지 못할 고문을 했으며 나중에는 아가타의 두 유방을 잘라내는 끔찍한 고통을 주었다.

 

고통 중에 아가타는 성 베드로의 환상을 보았다. 성 베드로는 아가타의 가슴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다음날 아가타는 활활 타오르는 석탄 위에 올려져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은 아가타에게 지진이나 화재를 방지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래서 간혹 아가타의 상징은 타오르는 불길일 경우가 있다.

 

아가타가 사용했던 베일은 그녀의 고향인 카타니아에서 에트나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 내려 올때 이를 막는 역할을 했다. 아가타는 유방 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여성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았으며 또한 종 만드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했다. 칼로 잘라내어 쟁반에 얹어 놓은 아가타의 유방이 마치 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빵장수들의 수호성인이 되기도 했다. 유방이 마치 종모양의 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가타의 축제일에는 사람들이종모양의 빵을 교회에 가져와 축복을 받았다.

 

▲성 아가타의 순교.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그림

 

▲고문당하고 있는 성 아가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Francisco de Zurbaran / 1598-1664)의 성아가타(1630-33)

 

▲프란체스코 구아리노의 성 아가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