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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ㅡ베네치아(Venezia)ㅡ메디치家 청부살인…470년뒤 밝혀진 주범은 놀랍게도 황제였다

by 삼수갑산 2022. 10. 9.

베네치아(Venezia)

메디치家 청부살인…470년뒤 밝혀진 주범은 놀랍게도 황제였다

 

#1548년 로렌치노 암살… 뒤바뀐 진실과 배후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로렌치노는 1537년 사촌 알렉산드로 공작을 자기 집으로 유인해 살해했다. 11년 후 그는

베네치아에서 괴한들 습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 로렌치노 암살 사건은 알렉산드로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코시모 1세가 복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 470년이

지난 후에야 새로운 증거들을 통해 암살 주범이 알렉산드로의 장인 카를 5세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림은 로렌치노 암살 사건을 묘사한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베추올리(Giuseppe Bezzuoli)의 작품이다. 

 

1548년 2월 26일 아침, 베네치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피렌체 귀족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 일명 로렌치노(Lorenzino)가 삼촌과 함께 산 폴로(San Polo) 교회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이 무심히 길을 가던 중 갑자기 괴한 둘이 습격해 왔다. 삼촌은 재빨리 도주하여 겨우 화를 면했으나, 단도로 머리를 가격당한 로렌치노는 쓰러져 결국 목숨을 잃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4세에 과부가 된 딸이 복수 요청

 

로렌치노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 자신이 과거 피렌체에서 있었던 암살 사건의 범인이었다. 11년 전인 1537년, 같은 메디치 가문 내 사촌 형제이며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알레산드로(Alessandro) 공작을 자기 집으로 유인한 후 하인과 함께 칼로 공격하여 살해한 것이다.

 

두 사촌 형제는 매우 친한 사이인 척했으나 사실 재산 상속 문제로 다투던 중이어서 이것이 살해 원인이 아닐까 추론한다. 그렇지만 로렌치노는 자신이 암살 사건을 일으킨 것은 독재자로부터 피렌체를 구하려는 의도였다고 주장했다.

 

중세 피렌체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가운데 르네상스 문화를 활짝 꽃피운 공화국이었으나 16세기에 들어와서 메디치가의 세습 체제가 확립되어 공화정은 종말을 맞았다.

 

로렌치노는 마치 로마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독재자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라도 된 양 정의로운 척했으나 실제 의도가 그렇게 고상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암살 후 그는 피렌체 출신 망명객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베네치아로 도피했다.

 

알레산드로의 죽음으로 메디치 가문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사람은 가문의 방계로서 당시 17세였던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였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도주한 암살범 로렌치노를 붙잡아 처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렇다면 1548년에 베네치아에서 벌어졌던 로렌치노 암살 사건은 10년 이상 기다린 끝에 코시모가 복수를 행한 것일까? 여러 증거로 보건대 그렇게 추론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게 아니었다. 우선 코시모는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두 킬러들을 직접 면담했고, 사건 완수 후에 다시 그들을 만나 거액의 보수를 주었다.

 

게다가 그 시기에 코시모의 측근 인사들이 베네치아에 가 있었는데, 이들이 모종의 암살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는 정황이 뚜렷하다. 이 이상 어떤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역사책들과 이 사건을 다룬 예술 작품들은 모두 로렌치노 암살은 코시모의 복수였다고 판단해 왔다.

 

그런데 약 470년 세월이 흐른 후 새로운 증거들이 나오면서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우선 메디치 궁에서 오간 암호화된 편지들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피렌체 문서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이 서한들을 분석해 보면 코시모는 암살 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그가 직접 암살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다.

 

베네치아에 가 있던 그의 수하 로티니라는 인물은 여태 역사가들이 믿던 바와는 달리 로렌치노 암살을 준비하던 게 아니라 다른 정적을 노리고 있었다. 실제 로렌치노를 목표로 하던 조직이 있었으나 복잡한 사유로 인해 전혀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코시모는 로렌치노 암살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다.

 

▲카를 5세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 초상화. 그의 사위인 알렉산드로 공작은 로렌치노에 의해 살해당했다.

/네덜란드 미술사 연구소

 

그렇다면 암살을 지시한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놀랍게도 황제 카를 5세임이 밝혀졌다(황제는 명목상 유럽의 최고 지배자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독일과 동부 유럽 지역, 에스파냐를 통치하고 있었다).

 

살해 동기는 쉽게 추론 가능하다. 1537년에 암살당한 알레산드로가 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사생아 딸 파르마의 마가레트는 그 전 해에 알레산드로와 결혼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14세의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녀는 편지를 쓸 때마다 ‘슬픈 마가레트’라고 서명했고, 남편을 죽인 살인범 로렌치노에 대한 복수를 갈구하여 그의 머리에 상금을 걸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인 황제에게도 복수를 요청했다.

 

황제는 사위의 죽음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복수를 원했으나 그렇다고 이탈리아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황제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치열하게 패권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다른 한편 가톨릭 군주로서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들불같이 번져나가던 개신교의 확산을 막는 문제에 완전히 붙들려 있었다.

 

그래서 외교 경로를 통해 코시모 공작에게 로렌치노를 붙잡아 처형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닿자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렇지만 심증만으로는 안 되고 황제가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스모킹 건(smoking gun·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에스파냐의 시망카스(Simancas) 문서보관소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역사가들이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메디치 가문 내 살인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겠다며 이탈리아 문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사건은 훨씬 더 큰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증거 자료도 국제적으로 살펴보았어야 한다.

 

▲시망카스 문서보관소 - 카를 5세가 로렌치노 암살을 지시했다는 증거가 발견된 스페인 시망카스(Simancas) 문서보관소. 앞서 메디치 가문 살인 사건의 내막을 찾던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문서에 집중하느라 이곳의 문서를 간과했다.

/위키피디아

 

시망카스에는 카를 5세 궁정에서 주고받은 암호화된 문서들이 있다. 이 문서들을 보면 실제 암살 사건의 집행인은 놀랍게도 밀라노 공작 페란테 곤자가(Ferrante Gonzaga)였다. 황제의 충직한 수하 인물인 그는 피렌체 공작 코시모 측과 접촉하여 로렌치노의 머리에 걸린 상금을 실제 지불할 수 있는지 물어 확약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진범이라고 생각했던 코시모 공작은 이전에 약속했던 돈을 지불한 정도로만 사건에 간여했다. 이제 밀라노 공작 곤자가는 킬러 두 명을 고용하여 암살을 지시했고, 이런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킬러들은 피렌체를 거쳐 베네치아로 가서 작업을 준비했다.

 

베네치아에서는 황제 대사인 멘도사라는 인물이 이들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줄곧 로렌치노의 행적을 추적해 오고 있었다. 황제는 멘도사에게 로렌치노를 비밀리에 살해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멘도사는 에스파냐인 암살범을 고용하면 쉽게 눈에 띄므로 이탈리아인들을 써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최종적으로 1548년 1월 11일, 황제는 로렌치노 살해를 지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제 킬러들이 행동에 돌입하여 2월 26일 암살에 성공했다. 그 후 베네치아 주재 제국 대사관에서 킬러들을 비밀리에 보호했고, 그 후 안전하게 피렌체 인근의 피사까지 데리고 와서 약속한 보수를 받도록 조치했다.

 

◈에스파냐 문서보관소의 새 증거들

 

황제는 왜 10년 이상 지난 이 시기에 암살을 거행했을까? 암살 계획을 본격화한 1547년 시점을 주목해 보자. 이 해에 황제의 평생 라이벌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사망했고, 황제군이 독일 내 개신교 영주들을 군사적으로 눌렀다. 지금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판단한 황제는 이탈리아 문제로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1547~1548년 동안 피에르루자 파르네세, 프란체스코 부를라마키, 줄리오 치보 말라스피나 등 황제의 정적들이 살해당하거나 처형당했다. 로렌치노의 암살 또한 이 같은 정치 공작의 큰 틀 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로렌치노 암살은 메디치 가문 내에서 벌어진 복수 사건으로만 생각했고, 당연히 이탈리아 내부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실제로는 훨씬 더 큰 국제적 맥락에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실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진실을 감추려 해도 끝내 숨길 수는 없는 법. 깊은 어둠에 묻힌 사건도 심지어 500년 세월이 흐른 후에 밝혀지기도 한다.

 

[1582년 메디치家 또다른 죽음]

연회뒤 쓰러진 공작 부부… 동생에 의한 독살인가, 말라리아 감염사인가

 

1582년 10월, 메디치 공작 프란체스코 1세와 동생 페르디난도는 형제 간 다툼을 멈추고 화해하는 뜻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연회를 마치고 나오는 중에 프란체스코와 부인이 갑자기 쓰러졌다. 부부는 열흘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같은 날 사망했다.

 

동생 페르디난도가 부검을 지시하고 서둘러 발표를 했는데, 마치 미리 짜 맞춘 결론을 내리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부부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공식 발표 내용에 의심을 가졌다. 아무래도 동생이 형을 독살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갔으나 그 점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장례 관습대로 사체의 장기를 4개의 단지에 넣어 산타마리아 성당 지하에 두었다. 이 사체 조각들을 분석하여 미스터리를 풀겠다는 시도가 여러 차례 행해졌다. 2004년 도나텔라 리피라는 의학사 연구팀은 사체에 대한 과학적 조사 끝에 비소를 검출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형을 질투한 동생이 독살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런데 이 결과는 다시 뒤집어졌다. 2010년 다시 조사했을 때에는 말라리아를 감염시키는 기생충(Plasmodium falciparum)을 발견했다.

 

결국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원래의 공식 발표가 맞을 수도 있게 되었다. 독살인가, 병사인가. 어느 편이 진실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우아하면서도 잔혹한 메디치 가문에 관해서는 아직 밝혀야 할 미스터리가 많이 남아 있다.

 

글.사진출처 / chosun.com / (주경철의 히스토리 노바).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