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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국가들/⊙우크라이나*기행

우크라이나ㅡ키예프(Kiev)ㅡ성 소피아 대성당, /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

by 삼수갑산 2021. 12. 13.

키예프(Kiev)ㅡ성 소피아 대성당 /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

▲성 소피아 대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은 1990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콘스탄티노플(현 터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키에프 소피아 성당은 키에프 공국(公國)의 기독교 중심지로서 11세기에 건립되어 기독교 복음 전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키에프-페체르스카야 라브라의 영적, 정신적 영향은 17∼19세기경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 및 사상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다.

 

11세기에 건립된 성소피아 대성당은 1685~1707년에 개조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성당 동쪽에는창건 당시의 돌과 벽돌로 만들었던 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 도시의 성당은 너무나 훌륭해 주변 나라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는다. 북방의 어떤 곳을 둘러봐도 이렇게 훌륭한 성당은 없다.” 훗날 키예프의 부주교가 된 수사 이라리온은 성소피아 대성당을 이렇게 찬양했다.

 

러시아인 최초의 통일 국가인 키예프 루시(키예프 공국)의 대성당은 찬란하게 빛났고, 그 후 러시아 각지에 세워진 성당의 모델이 되었다.이렇게 호화찬란하게 빛나는 성당은 그 전까지는 콘스탄티노플 외에서는 볼 수 없다.

 

988년 블라디미르 1세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고 최초의 대성당을 건설했지만, 훗날 몽고의 침입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중세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이었던 성소피아 대성당은 그의 아들 야로슬라프 현명공이 1037년에 초석을 놓았다. 키예프 루시의 영토는 끝없이 뻗어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까지 펼쳐져 있다.

 

야로슬라프 현명공은 키예프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전진 기지로서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곳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성당을 건립한 것이다.

 

중앙에 돔을 얹은 성당은 그리스 십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설계되었으며, 이것이야말로 독자적인 러시아 건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이 건축 양식은 키예프에서 비롯되어 그 후 중세 러시아 제2의 도시 노브고로트에서 더욱 발전했다.

 

창건 당시 성소피아 대성당은 돔이 13개가 있었고, 그 내부는 넓이가 640㎡에 이르는 오랑식 대건축물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았지만, 이 건물의 피라미드적 구조에는 중세 러시아의 전통적인 목조 건축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돔 13개 중에는 금박을 입힌 것도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원주나 네모진 기둥에도 아름다운 장식이 풍부했으며, 회랑 난간의 판석까지 예술적으로 설계했다.

 

건축 및 예술상의 둘도 없는 보물 성소피아 대성당은 키예프의 중심에 있으며, 러사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돌아볼 때 종교, 정치, 문화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교회 회의를 개최하고, 역대 대공이 대관식을 올리고, 중요한 조약을 체결하고, 외국 사신을 맞았던 곳이 바로 성소피아 대성당이다.

 

또 성소피아 대성당에는 중세 러시아 최초의 도서관이 창설되어 그리스, 불가리아, 러시아의 희귀본이 소장되어 있었다. 란스의 복음서]도 그 중의 하나로, 프랑스 왕 앙리 1세와 결혼한 안나 야로슬라프가 지참물로 가져간 것이다.

 

안나 야로슬라프의 아버지인 야로슬라프 현명공은 성소피아 대성당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최초의 법전인 ‘러시아의 정의(Russkaya Pravda)'를 편찬해 국정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기도 하다.

 

야로슬라프 현명공은 황후와 함께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에 안치되어 성소피아 대성당에 잠들어 있다. 키예프를 요새화한 표트르 대제- 후대로 내려가면, 대성당 안뜰 등지에서 시민들의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베체, 즉 시민 총회가 키예프를 뒤흔들고 나라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민중 폭동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 소피아 대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성소피아 대성당 내부

 

지금의 대성당은 후대에 개조 복원한 것이지만, 창건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내부에는 당시의 것으로 여겨지는 프레스코화나 모자이크가 있다.‘불멸의 벽의 마리아’- 신자가 바치고 간 촛불이 흔들리며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화를 어렴풋이 비춘다.그리고 비잔틴과 러시아의 예술가가 만든 모자이크화인 [성찬]이 있다.

 

1240년,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몽고의 유럽 원정군이 교역의 도시 키예프를 침략했을 때에도이 성모상만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 모자이크 성모상은 ‘불멸의 벽의 마리아’라고 불렀다. 시대를 초월한 이 성모의 아름다운 각 시대의 혼란이나 무질서를 뛰어넘은 것이다. 260㎡가 넘는 벽면에 그리스의 예술가와 이 지방 예술가가 협력해 모자이크화를 완성했다.

 

벽의 바탕색은 선명한 황금빛인데, 그 위에 잿빛을 띤 연보라색, 짙은 청색, 밝은 청색, 황금색, 초록색 등의 돌로 모자이크화가 만들어졌다. 둥근 천장에 제작한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주 예수)]나 비잔틴 교회의 전통을 바탕으로 만든 [종을 든 푸른 성모] 등의 모자이크화는 제작 후 한 번도 손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까지의 연구로 밝혀졌다.

 

한편 대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11~12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총면적이 3000㎡에 이르는데, 모자이크화만큼 보존 상태가 좋지는 않다. 원래는 [올리가 왕비의 비잔틴 궁정 방문]이나 중세의 사냥이나 제례 장면이 그려져 있지만, 19세기에그 위에 다른 그림이 덧칠되었다. 최근에 그 그림의 물감이 벗겨졌다.

 

▲제단 위의 돔에 그려진 [기도하는 성모]

 

[기도하는 성모]는 177종이나 되는 여러 색깔의 색유리를 300만 개 이상 사용한 훌륭한 작품이다.

세로가 5.5m나 되는 성모상 아래쪽에는 “성모에게는 신이 깃들어 계신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은 날마다 성모를 돌보고 계신다.”라고 쓰여 있다.

 

▲내부 예수화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

 

1569년 이래로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던 폴란드의 압력이 점점 심해지자, 17세기 후반에 독립을 바라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폴란드와 합의하여 우크라이나를 분할하기로 결정하고, 드네프르 강 오른쪽은 폴란드령으로, 키예프를 포함한 왼쪽을 러시아령으로 정했다.

 

이렇게 해서 우크라이나는 쇠퇴하기 시작해, 우크라이나 문화의 독자성도 약해져 갔다. 18세기 초, 키예프 역사 지구의 방위를 강화하고 요새화한 표트르 1세는 성소피아 대성당을 유럽풍의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했다. 지금도 동쪽 끝에는 창건 당시의 돌과 벽돌을 번갈아 쌓아올린 아름다운 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당시에 만든방어벽이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2개의 언덕과 그 사이의 골짜기를 포함한 22ha의 땅에 대수도원 건물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에 성소피아 대성당과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 두 종교 건축물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둘 다 매우 중요하며, 키예프의 상징물로도 쌍벽을 이룬다.대수도원의 입구인 트로이츠카야 성당의 지붕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층과 층 사이에 채광창과 같은 것이 있다.

 

동쪽 벽면에 벽화가 그려진 것은 1900년경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당 건물의 정면은 대부분 회반죽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프세프스뱌츠카야 성당의 장식은 더없이 훌륭해, 18세기의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1세기 중엽, 아토스에서 온 수사 안톤의 지도로 드네프르 강 기슭 언덕의 동굴에서 수행을 시작한 수사들이 있었다. 이것이 페체르스카야(동굴) 라브라(대수도원)의 기원으로, 그 후 이곳은 중세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지식의 중심지가 되어, 잇달아 연대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라리온 부주교는 설교집 [율법과 은총에 관하여]에서 키예프 루시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우수하고, 정치적으로 중요한가를 설교했다.

 

또한 몇 십 년 후에 수사 네스토르가 편찬한 [옛날 이야기]는 중세 러시아 역사 서술의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석공, 모자이크공, 화가 등을 양성하던 공방 덕분에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의 이름이 키예프 루시 안팎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양한 시대에 씌여진 연대기를 종합해 보면, 17~19세기에 해마다 15만 명의 순례자가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을 방문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곳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정교회 수도원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4곳의 수도원 가운데 하나였다.

 

▲12세기 초에 건설된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의 입구인 트로이프카야 성당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의 입구인 트로이프카야 성당

 

▲트로이프카야 성당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의 지하는 미로처럼 여러 갈래의 통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에 있는 동굴의

작은 방에서 생활하는 수사들은 성화나 성상을 숭배했다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과 지하 묘지

 

수사들은 전생애를 통틀어 절반 이상을 지하 라브라의 동굴 독방에서 생활했다. 개중에는 자신의 의지로동굴 방에서의 면벽 생활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동굴의 방에는 구멍 하나가 뚫려 있어 이 곳을 통해 한줄기 빛이 새어들고 먹을 것이나 물도 공급되었다. 여기 살았던 사람 대부분은 그대로 그 동굴에 매장되었는데, 동굴 내에는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습도도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시체는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미라가 되었다.

 

지하 라브라 중에는 카타콤으로 사용된 곳도 있으며, 복잡하게 얽힌 지하 통로를 이용해 ‘성안톤의 가까운 동굴’로 갈 수 있었고, 마음이 내키면 ‘성페오도시의 먼 동굴’로도 갈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의 대표작- 몽고와 타타르인의 공격으로 거의 대부분이 파괴된 페체르스카야 대수도원은 표트르 대제의 치세 때 가까스로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