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에티오피아 커피
에티오피아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먼저 이탈리아 식민지 이야기.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자존심이 세다. 그들은 스스로가 시바여왕(맞다. 솔로몬왕과 시바여왕 할 때 그 시바여왕이다)의 아들이 에티오피아의 시조라고 믿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문자를 만들어 낼 정도로 발전한나라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식민지를 한 차례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만약 에티오피아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가 에티오피아는 과거에 이탈리아 식민지였냐고 말한다면 그는 한 시간 동안 1896년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의 전쟁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이 전쟁은 근대 역사에서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리카 국가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최초의 사례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영국군이 이산들와나 전투(Battle of Isandlwana)에서 줄루군에게 대패한 적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영국군은 끝내 줄루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디스아바바 국립박물관에는 이탈리아군과의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는데 데쓰는 그 그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전쟁에서 졌다.”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짐마 지역은 세계에서 커피를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이다. 길 곳곳에 노천카페가 있다.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한 잔에 약 120원 정도다
두 번째는 커피. 에티오피아를 두 번째 찾았을 때 일행 중 한 명이 “커피는 케냐AA가 맛있지”라고 했다가 데쓰의 싸늘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세상에는 두 가지 커피가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커피와 나머지 커피죠.” 에티오피아를 여행하면서 그 말을 인정하게 됐다. 그만큼 에티오피아 커피는 맛있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한 시간을 가면 짐마(Djimmah)다. 이곳이 바로 카파, 그러니까 카파는 짐마의 옛 명칭이다. 짐마 공항에 내리자마자 커피를 그려 놓은 커다란 광고판이 여행자를 반겼다. 공항 한쪽에는 에티오피아 식 커피를 파는 조그만 커피 좌판이 자리잡고 있었다. 공항을 나오며 데쓰가 말했다.
“여긴 지난번에 갔던 진카 공항이랑 완전 다르죠.커피 때문에 돈이 좀 도는 편이에요. 주민들도 잘 사는 편이구요.” 그런 것 같았다. 공항에는 컨베이어 벨트도 있었다.
십여 분을 달려 시내로 들어서자 에티오피아의 여느 도시와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졌다.삼륜 오토바이 택시와 말이 끄는 마차, 자동차가 뒤엉킨 도로는 복잡했다. 이 복잡한 도로 위를 양과 염소가 느린 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에티오피아의 커피 세리머니. 커피를 직접 볶고 끓여서 ‘시니’라는 잔에 따라 준다
숙소에 들어서자 커피 세리머니가 펼쳐졌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 환영의 인사로 커피 세리머니를 한다. 에티오피아 말인 암하릭어로는 ‘분나 마프라트(Bunna Maffrate)’라 부른다. ‘분나’는 ‘커피’를, ‘마프라트’는 ‘요리’를 뜻한다.
커피잔이 가득 올려진 자그마한 탁자 위에는 네렐라(Nerela)라는 에티오피아식 하얀색 옷을 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주위 바닥에는 행운을 불러온다는 풀이 깔려 있었다. 탁자 앞에 자리한 화로에는 숯불이 연기를 피워 올렸고 그 위에는 목이 긴 토기 주전자‘제베나(Jebena)’가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향로가 있었는데, 노란색 송진덩어리를 올려놓으니 흰 연기와 함께 진한 향내가 퍼져 실내를 가득 채웠다.
“세리머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요.” 데스가 귓속말로 나지막이 말했다.“주변의 냄새를 없애 커피향이 더 도드라지도록 하는 거죠. 손님에게 예의를 표하는 방법이기도 하구요.”여인은 곧 후라이팬에 하얗게 건조된 커피콩을 볶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가 진한 갈색으로 변하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손님들은 연기를 함께 마시며 향기를 음미한다. 커피가 적당하게 볶아지자 곧 절구에 넣고 빻기 시작한다. 그 사이 제베나에 담긴 물이 끓기 시작하고 커피 가루를 넣고 다시 얼마간을 끓인다.
에티오피아는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2,000m 이상인데, 높은 고도 때문에 섭씨 95도씨 정도면 물이 끓는다. 하지만 목이 긴 제베나는 기압 차이를 줄여 줘 진한 커피를 우려낼 수 있다. 또한 커피 아로마의 손실도 최대한 막아 주는 역할도 한다.
이제 커피를 마실 차례다. 제베나에서 나온 커피가 손잡이가 없는 작은 찻잔 ‘시니(Cini)’에 넘치도록 담긴다. 기분 탓인지 훨씬 더 검고 진하게 보인다. 여기에 설탕을 두 스푼이나 넣는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셔 본다. 진하고 신선한 맛이 입 안에 가득 찬다. 초콜릿 향인지 캐러맬 향인지 뭔가 달콤한 맛과 쌉싸름한 맛이 어우러져 있다. 박하 향이 스며 있고 에티오피아 커피 특유의 신 맛도 깃들어 있다.
“세 잔은 마시는 게 예의입니다. 첫 잔은 ‘우애’, 둘째 잔은 ‘평화’, 셋째 잔은 ‘축복’을 담아 마시죠. 커피의 생산지 중 고유의 커피를 마시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에티오피아가 유일합니다.” 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깻짓이었다.
▲봉가 길거리 카페에서 맛본 커피 한 잔. 신선하면서 진한 맛이다
●봉가(Bonga)
세상에서 가장 먼저 커피가 발견된 곳
짐마에서 차를 타고 1시간을 가면 봉가(Bonga)라는 조그마한 도시가 나온다. 이곳이 ‘칼디’가 가장 먼저 커피를 발견한 곳이다. 봉가에는 야생 커피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숲이 있다.지금의 카파는 10개의 작은 행정구역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 인구는 100만명 정도다. 봉가는 카파의 행정수도. 인구는 약 3만명 가량이다.
에티오피아의 모든 커피는 우리나라 농림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ECX(Ethiopia Commodity Exchange)’를 통해 거래된다.
수확 후 가공을 마친 커피는 ECX의 커피 보관소로 모인다. 커피 보관소는 에티오피아 8개 주요 지역에 있는데 봉가도 그중 한 곳이다.
▲봉가에서 만난 에티오피아 소녀. 순수 가득한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이다
봉가 시내를 지나 비포장도로를 30여 분 가자 짙은 황토색의 강이 나타났다. 드라이버는 이곳부터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봉가의 가이드를 맡은 베레케트(Bereket)는 물 한 병을 던져 주며 여기서부터 40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늘 하나 없는 황톳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진하면서도 향긋한 에티오피아 커피 한 잔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걸어가자 이곳이 커피를 가장 먼저 재배한 곳이라는 입간판이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발견한 곳이라는 명성에 비해서는 다소 초라한 간판이었다.베레케트는 팔을 이끌며 숲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 숲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여행자를 바라보는 봉가의 소년
“에티오피아에 오는 여행자들은 사실 봉가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그들은 랄리벨라의 암굴교회나 진카의 원시부족 마을을 방문하길 원하죠. 하지만 봉가는 아라비카 커피의 최초 발생지이기도 한 만큼 더 알려질 필요가 있는 곳이에요.” 베레케트가 말했다.
“커피나무가 어디 있죠?” 내가 묻자 베레케트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 숲의 모든 나무가 커피나무입니다.”정말 놀라웠다. 아열대 기후 속에 자리한 이 울창한 레인 포레스트가 모두 커피나무라니! 나는 어느새 커피 숲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나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커피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어떤 커피나무는 키가 5m는 더 되어 보였다.
▲시장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선 모녀
“봉가의 산림 보존 지역은 넓이가 500km2에 이르는데, 이와 비슷한 크기의 아열대숲은 에티오피아에 몇 군데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베레케트는 숲의 나무들이 만드는 짙은 그늘이 열매를 느린 속도로 자라게 하는데,이 때문에 풍미 가득한 커피 열매가 열린다고 설명했다.
“이걸 바로 따서 먹을 수도 있나요?” “물론이죠. 단 수확기가 되어야 하죠. 10월부터 빨갛게 익은 커피를 따기 시작해요.” 지금이 10월이 아닌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봉가의 노천 커피숍 내부. 천막을 치고 차렸다
●하라르(Harar)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
에티오피아 커피 여행은 하라르(Harar)로 이어졌다. 하라르는 ‘성곽도시’로 불린다. 16세기 오로목 부족 등 외부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도시 주변에 쌓은 3.6m 높이의 성곽이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 있다. 길이 3,334m에 달하는 이 성곽을 현지인들은 ‘주골(Jugol)’이라고 부른다.
▲하라르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화려한 색감을 가진 골목이다
하라르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화폐 등을 갖춘 독립적인 이슬람 도시국가였지만1887년 메넬리크 2세 황제에 의해 에티오피아 영토로 통합되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의 중계무역지로 번성했지만 1902년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를 연결하는 철도가 인근도시인 디레다와를 지나가게 되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지만 하라르는 인구의 90퍼센트가 무슬림이다.
▲디레 다와의 택시 운전사
하라르 사람들의 커피에 대한 자부심은 에티오피아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힌다. 특유의 신맛과 모카향 때문에 ‘에티오피아의 축복’으로도 불리는 커피. 하라르 인근 숲에는 이 ‘검은 황금’을 키우는 커피 농장들이 늘어서 있다.
“하라르에서는 커피를 재배할 때 화학비료나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과 햇빛, 가축의 거름으로만 재배하기 때문에 유기농 커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베레케트가 설명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커피를 에티오피아 커피와 그 외의 커피로 나누죠.하지만 하라르 사람들은 커피를 하라르 커피와 그 외의 커피로 나눈답니다.”하라르 사람들이 커피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화려한 패턴이 매력적인 전통 옷을 입고 과일을 판매하는 여인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하라르의 올드타운. 화려한 색으로 칠해진 이 도시의 골목 귀퉁이 카페에 앉아 하라르를 마시며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를 생각했다.
유럽을 떠돌다 커피 무역과 인연을 맺고 아프리카까지 온 그의 여정은 하라르까지 이어졌는데, 커피를 사랑했던 그는 늘 하라르의 커피를 즐겼고 자신의 커피 가든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하라르 시장에서는 에티오피아의 커피와 다양한 향신료를 볼 수 있다
랭보도 이 골목에서 석양에 물들어 가는 화려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골목, 그 골목 사이를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처럼 가뿐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을까.
아마도 당시의 풍경 역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향이 짙어지는 만큼 하라르의 저녁도 깊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 가고 있었다. 나는 에티오피아식 커피를 마시며 이 땅이 내내 그리워질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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