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와 독서가 공존?…매혹적인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시 거리풍경
여행은 영화와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지만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많이 경험할수록 삶을 이해하는 스펙트럼이 넓어지며,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삶에 큰 영감이나 힘을 주기도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여행은 나만의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행담을 제가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한 편의 영화로 놓고 봤을 때, 이 영화에는 로맨틱 코미디가 있고 위험천만한 스릴러도 있으며 가슴이 묵직해지는 휴먼다큐의 장르들이 저만의 방식으로 담겨있어요.
정열의 탱고, 피아졸라, 가르델, 에바페론, 축구.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들은 대중적이라기보다 마니아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마니아라는 것은 무언가에 광적으로 열중한다는 것이고, 광적인 것에는 반드시 운명적인 요소가 필요합니다.아르헨티나는 우리에게 낯설고 먼 나라임에 틀림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 그곳으로 떠나는 이유는 뭘까요?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를로스 가르델 극장에서 댄서들이 탱고 공연을 하고 있다.
탱고는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겨났다. ⓒ이승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매혹적인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도시다. 탱고의 정열적인 춤과 리듬이 온 도시를 감싸고있는 듯 활기가 넘쳐 흐르면서도, 서점이 500개가 넘을 정도로 차분하고 정적인 독서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실상부한 ‘책의 도시’다.
‘아사도’라는 아르헨티나식 바비큐가 워낙 대중화되어 있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이지만, 이 도시 사람들은 육식에 어울리는 공격성보다는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유유자적한 분위기를 한껏 뿜어낸다.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자 최초의 남반구 국가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배출한 기념비적인 도시이기도 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는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청년기를 보낸 꿈과 열정의 도시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데 모여서 오히려 더욱 아름답고 매혹적인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곳, 그곳이 내게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싱그러운 첫인상이었다.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스스로의 국민성을 풍자하는 농담 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 지구상 다양한 나라의 대표들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하느님을 찾아갔다.
그들은 신에게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신은 아르헨티나에만 너무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게 아니냐고. 아르헨티나엔 석유도 펑펑 나고, 땅도 기름져서 곡식과 가축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국토도 넓고 공기도 좋은데, 왜 다른 나라엔 자원도 부족하고, 땅도 황폐하며, 농작물도 잘 자라지 않느냐고 말이다.
인간들의 불평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하느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대신 나는 그 풍요로운 땅에 게으른 아르헨티노를 주지 않았느냐?” 완벽한 자연환경을 갖춘 아르헨티나에 게으르고 낙천적인 아르헨티노를 살게 했으니, 척박한 환경엔 부지런한 백성을 주고 축복받은 환경엔 유유자적한 백성을 준 하느님의 선택이 어쩌면 꽤 공평한 것이 아닐까. 아르헨티나 사람들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의 대책 없는 느긋함과 여유만만함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주는 이야기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한 시간만 어슬렁어슬렁 걸어 보면 이 농담의 의미를 대번에 이해할 수 있다. 남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GDP도 상파울루 다음으로 높은 활기 넘치는 도시지만, 누구도 서둘지 않고 누구도 뛰지 않는다.
세상이 흘러가는 속도에 굳이 나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려 안간힘을 쓰지 않는 이들이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다. 이렇게 여유만만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딱 한 번 집단적으로 부지런을 떤 적이 있다.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이 된,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조성할 때였다.
아르헨티나 독립선언을 기념하여 만든 ‘7월9일 거리’는 폭이 무려 144m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길로도 알려졌는데, 바로 이 길의 중심에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출범 400주년을 기념하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거대하고 부담스러운 이 건축물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 이토록‘슬로 라이프’를 생활화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겨우 31일 만에 그야말로 뚝딱 만들어 낸 건축물이 바로 이 오벨리스크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하면 탱고, 탱고 하면 부에노스아이레스. 이 도시에서 탱고 공연이 가장 많이 열리는 곳은 산 텔모(San Telmo) 지구와 라 보카(La Voca) 지구입니다.
탱고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약 100년 전이라 하니 한 장르로서는 짧은 역사지만,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광산업 분야에서 탱고를 빼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탱고는 그들의 삶에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럽 극빈층의 노동자들은 아르헨틴드림(Argentine dream)을 꿈꾸며 대서양을 건너 보카항으로 흘러 들어왔어요.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여전히 거칠고 고된 노동과 고향에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만 커져갔죠.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 춤이 탱고의 시초입니다. 그래서 초창기의 탱고는 남자들끼리 추었다고 해요.
그래서였을까요. 남미여행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즈음이 큰 슬럼프를 겪고 있을 때여서 탱고를 추며 서로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달랬을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됐고,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물론 그 이면엔 각종 범죄와 비위생적인 환경에 따른 질병, 환락가 조성 같은 어두운 면이 존재하지만 초반에 언급했듯이 이 여행담은 1인 영화제작이란 관점에서 제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으니 과감히 편집하기로 해요.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 1997>를 보면 주인공은 세상을 등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흘러들어와 호객꾼이 되고, 밤마다 손님을유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산 텔모 지역이에요.
산 텔모 지역은 매주 일요일마다 탱고 공연은 물론 특이한 것들로 가득한 벼룩시장, 악사들의 연주회가 열리는 활기찬 곳이에요.
저는 이 영화를 세 번 봤어요. 처음 볼 때는 끝까지 보지 못했고, 두번째 볼 때는 충격을 받았고, 세번째 볼 때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영화라는 생각을 했어요. 동성애 코드여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제멋대로 식의 사랑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주성치의 풋풋했던 시절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고, 왕자웨이 감독의 천재성을 볼 수 있다는 평론기사들이 대부분인 걸 보면, 대단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아요.
특히 두 사람이 주방에서 탱고를 추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 될 명장면이에요. 영화의 애틋하고 쓸쓸한 감성이나 아르헨티나의 옛 향수를 느끼고 싶은 분들은 평일에 가는 걸 추천합니다.
▲윌리엄 헨뢰츠(Willem haenraets) 의 탱고 그림
▲윌리엄 헨뢰츠(Willem haenraets) 의 그림
▲윌리엄 헨뢰츠(Willem haenraets) 의 그림
▲윌리엄 헨뢰츠(Willem haenraets) 의 그림
▲윌리엄 헨뢰츠(Willem haenraets) 의 그림
▲윌리엄 헨뢰츠(Willem haenraets) 의 그림
▲ 라 보카 지구의 거리
산 텔모 만큼이나 탱고로 유명한 라 보카 지구. 이곳에서 탱고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아까 언급했던 아르헨틴드림을 꿈꾸던 유럽 이민자들이 보카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죠.
자연스럽게 이곳에 터를 잡았고, 탱고가 시작되었고, 지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소개됩니다.저 역시 이 지역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하루 일정을 몽땅 라 보카 지구로만 채웠답니다.
라 보카 지구는 사실 카미니토 거리가 유명한 건데, 카미니토 거리는 노동자들이 남은 페인트를 가져와 자신의집을 칠하면서 생긴 전통으로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탱고로 가득 채워진 벽화가 상징인 곳이에요.거리는 200m 남짓으로 길지 않습니다.
카미니토거리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여행할 필요가 있어요. 부담스러운호객행위에 불쾌해지는 대신 골목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곳곳에서 흘러나오는음악을 감상하는 그런 것들요. 요컨대 라 보카 속에 녹아드는 거죠.
탱고 음악에 대하 언급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음악가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가르델과 피아졸라입니다. 까를로스
가르델은 "스텝이 엉키면 그게 탱고다"라는 주옥같은 대사를 남긴 영화 <여인의 향기, 1993>의 OST, 의 작곡가에요.
이 노래를 배경으로 알 파치노와 가브리엘 앤워가 탱고를 추는 장면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차용될 정도로 멋진 장면입니다.
그리고 천재적인 탱고 음악가 아스트로 피아졸라. 가르델의 제자였던 피아졸라는 반도네온 연주가로 가르델과는 달리 아르헨티나에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를 떠나 클래식과 재즈에 전념하며 떠돌았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피아졸라는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를 접목시킨 새로운 탱고(Nuevo Tango)라는 장르를 개척합니다. 피아졸라로 인해 탱고는 더 이상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 아닌 감상을 위한 음악이 된 것이죠. 가르델이 탱고를 대중화시킨 인물이라면 피아졸라는 탱고의 '격'을 높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페라극장을 개조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 아테네오 서점.
이 서점은 책이라는 오페라를 공연하는 완벽한 무대처럼 보인다. ⓒ이승원
많은 사람들은 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이 도시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 내 마음속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이 된 곳은 엘 아테네오 서점이다.
오페라극장을 개조한 이 아름다운 서점은 과연 ‘책이라는 오페라’를 매일 공연하는 완벽한 무대처럼 다가왔다. 과연 엘 아테네오 서점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얼마 전 다행히 서점은 무사히 계약을 갱신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전자책이나 오디오북보다는 아직도 종이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라고 한다. 이렇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는 스페인어도 모르고 아르헨티나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포근한 동질감을 느꼈다.거리의 서점들 하나하나에 따스한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문득 노숙인 한 명이 보였다. 그런데 그는 구걸을 하고 있지도 않고 거적을 덮고 있지도 않았다.
노숙인은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등에 짊어진 채 너무도 평화로운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가련하게 보이지도 않고 나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직 삶을 바꿀 힘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곤궁함 속에서도 책이라는 이름의 작은 빛을 등대 삼아 고단한 오늘이라는 늪의 시간을 무사히 건너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에 잠기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마음속에서 책을 읽는다는 일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삶’과 동의어였음을 깨달았다. 아직 책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남아 있다면 삶이 결코 그를 짓누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삶은 결코 당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환한 희망의 햇살이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안에서 누군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당신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아직 괜찮은 것입니다. 당신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에겐 삶을 바꿀 기회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집처럼 정성스레 꾸민 공동묘지 레콜레타는 무려 13명의 역대 대통령,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인 5명의 노벨상 수상자, 그리고 에바 페론, 애칭 ‘에비타’가 묻혀 있는 곳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에비타의 얼굴을 외벽에 형상화한 커다란 건물이 있을 정도로 이 도시 사람들의 에비타에 대한 그리움은 짙다. 전 대통령 부인을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감수성에는 뭔가 유별난 집착이 깃들어 있다.
에비타는 유례없는 포퓰리즘의 주인공이라는 점과 아르헨티나의 고질적 재정 악화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빈민가 출신으로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끝에 대통령 부인이 되고 부통령 후보에까지 출마했던 에비타는 단지 개천의 용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처음으로 완전히 이해해 주는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에비타는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아르헨티나 민중을 사랑했다. 그것은 경제나 정치 문제를 넘어선 정서와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노동자의 성녀로 불리는 에비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커다란 도시의 모든 마을 곳곳을 다 걸어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내 나라 내 땅 안에서 뛰고 있는 모든 심장의 모든 생각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 엄청난 자신감과 뜨거운 애정이 듬뿍 담긴 이 말은 에비타의 아르헨티나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 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노동자와 빈민들을 위한 주택을 조성했고, 도로를 냈으며, 갈 곳을 잃은 청소년들을 위해 체육관을
짓기도 했다.
빈민촌을 방문하여 그곳의 실상을 알고 난 뒤,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즉시 이런 연설을 했다. “지금 이 마을 사람들은
즉시 짐을 꾸리세요. 꼭 필요한 짐만 챙겨서 당장 이 마을을 떠납시다.” 그녀는 그 즉시 주민들을 살 만한 곳으로 이동시켰고, 마을이 텅 비자마자 그 빈민촌을 불태웠다고 한다.
마치 다시는 이런 빈민촌이 지상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엄청난 결단력이 느껴지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에비타의 이런 과단성과 민중에 대한 사랑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이민자에게도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의 혜택을 부여하는 복지국가로 발돋움한 것에는 에비타의 공헌이 컸다.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
일정이 여유롭다면 하루쯤은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엔 꼭 가보길 추천합니다. 엘 아테네오는 1919년에 지어진 오페라하우스를 개조해 서점으로 재탄생한 곳이에요.
과거 가르델과 피아졸라 역시 이 무대에 올라 연주했다고 해요. 엘 아테네오는 세계에서 가장 예쁜 서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웅장하고 아름다워요.
게다가 피아졸라가 연주했던 무대에서 커피를 마시고 로얄석에 앉아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저는 여행을 가면 그 도시에서 가장 오래됐거나 유명한 서점을 꼭 찾아갑니다. 엘 아테네오는 가 볼 가치가 충분한 곳입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낙천적이고 느긋하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남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이지만 누구도 뛰지 않을 정도로 여유만만하다.
ⓒ이승원
나는 저녁에 탱고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우선 대낮에 걸으면 더욱 흥성흥성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형적인 저잣거리, 산텔모에 가 보고 싶었다. “산텔모가 어디지요?” 대여섯 번은 물어보고 헤매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만났다.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이 여행의 진정한 묘미다.
현지인들과 짧게나마 대화를 해 보면서 그 도시의 그 분위기, 그 도시인들의 심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잘 모르더라도 뭐든 하나라도 자신이 아는 것을 더 알려 주려 했다. 산텔모의 커피타운에서 세계바리스타대회에서 1위를 했다는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길을 잃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생각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들을 조사하다가 <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라는 멋진 책을 펴낸 작가 루이사 발렌수엘라를 알게 되었다. 군부독재의 폭력적인 검열과 협박으로부터 도망쳐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 작가는 <침대에서 본 국가현실>이란
소설에 이런 문장을 썼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남들이 산양자리나 사자자리를 타고나는 것처럼 나는 질문자리를 타고났다.’ 이 문장을 읽으며 그야말로 까르륵 웃었다. 찔렸다. 나도 그런 사람이기에, 유쾌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멈출 줄 모르는 질문자리를 타고났고, 역마살과 ‘길치 유전자’가 한 몸 안에 들어 있는 기이한 불협화음을 견디고 있다.
그 불협화음을 견디게 해 주는 내면의 힘은 글쓰기를 통해 내 삶이 매번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어휴, 내가 이래서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일탈과 모험을 두려워하는 내가 유일하게 ‘올인’할 수 있는 공인된 도전이 바로 여행이니까.
스케줄이 없는 날만 되면 ‘이불 밖은 위험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종일 누워만 있고 싶은 날도 있지만,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타인의 삶, 세상의 눈부심, 인생의 아름다움을 가장 강렬한 오감의 체험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니까.
출처 / kyunghyang.com /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기행]=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라틴 아메리카****국가들 > ⊙아르헨티나***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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