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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아시아*****국가들/⊙시리아*****기행

시리아ㅡ다드몰(Tadmur)ㅡ사막속에 오아시스. 2000 년 된 고대도시 팔미라

by 삼수갑산 2021. 7. 24.

팔미라(palmyra)ㅡ사막속에 오아시스ㅡ2000 년 된 고대도시 팔미라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교역도시로 번영을 누렸던 팔미라는, 서쪽의 로마 제국과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서 태어난 완충국가였다. 현재는 폐허로 남아 있는 팔미라는 시리아 사막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북동쪽으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으로 200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는 지하수가 솟아나는 오아시스가 있어서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B.C. 2000년경에는 이미 도시가 건설되어 바빌로니아의 고문헌에는 타드모르라는 지명으로 등장한다. 이후 타드모르는 대추야자를 뜻하는 '타말'로 변했고,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는 '팜(대추야자)의 마을' 즉, 팔미라가 되었다.

 

B.C. 1세기경, 팔미라는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지만, 그들의 부를 탐낸 로마 제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통치 자체는 그다지 강압적이지 않았다. 129년에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법적 자격을 얻었으며, 212년에는 식민 도시의 자격을 부여받아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했다.106년, 교역 도시 페트라가 로마에 흡수됨으로써 교역의 기능을 상실하자 팔미라는 중동 지역 유일의 교역거점이 되어 더욱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팔미라 유적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도시 남동부에 있는 벨 신전이다.이곳에서는 바빌로니아인들이 섬겼던 벨(=마르두크)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신전 경내에는 동서 210미터, 남북 205미터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 있으며, 그 서쪽에 있는 폭 35미터의 계단을 통해 안쪽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계단 앞에는 여덟 개의 석주가 떠받치고 있는 문이 있으며,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다. 신전의 본전은 중앙 정원의 한가운데 있는데, 포도나무 문양으로 장식된 현관문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었다. 본전에서는 벨 신 외에도 태양신 야르히볼, 달의 신 아글리볼 등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팔미라는 교역 도시였기 때문에 아랍 계열의 신과 시리아의 토착신, 페니키아의 신 등 여러 지역에서 들어온 신들을 숭배했다. 당시 팔미라의 종교관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다종교 사회였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팔미라가 독립국가로서 존속한 것은 260년부터 272년까지 고작 13년에 불과했다. 그 13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서 팔미라는 멸망해버린 것일까?260년, 팔미라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오다이나투스는 로마 군과 힘을 합해 페르시아

사산 왕조를 격퇴했다. 당시 로마는 최대의 적인 페르시아와 몇 차례 전투를 벌여 패배한 경험이 있었다. 그 페르시아 군을 물리친 공적으로 팔미라는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오다이나투스는 북시리아 일대를 지배하며 팔미라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86년에 오다이나투스 왕과 그의 가족이 누군가에게 암살되는 일이 발생했다.

 

오다이나투스가 죽은 후에 팔미라를 통치한 것은 왕의 후처였던 제노비아였다. 제노비아는 어린 아들 와발라트를 왕위에 즉위시켰지만 사실상의 실권은 자신이 장악했다.그녀는 스스로를 '팔미라의 여왕'이라고 불렀으며, 와발라트로 하여금 아버지의 칭호인'왕 중의 왕'과 '온 동방의 통치자'를 사용토록 했다. 그후 제노비아는 팔미라에 번영을 불러왔지만, 결국에는 멸망으로 이끈 비운의 여왕이 되고 말았다.

 

제노비아는 유목민의 우두머리였던 자파이와 미모의 그리스 출신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제노비아는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낙타도 잘 몰았다고 한다. 또 남자 못지않은 대범한 성격으로 무슨 일이든 거리끼지 않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당시 팔미라는 독립국가로 승인받고 있었지만 언제나 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로마 제국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게르만 민족의 침입과 페르시아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겪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군대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자주 황제가 바뀌는 상황이었다

 

로마와 아시아의 교역로를 독점하고 있는데다, 로마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해서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던 제노비아 여왕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일을 벌였다. 270년, 알렉산드리아에 원정군을 보내는 군사적 모험을 감행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로마는 이집트의 곡창지대와 인도등을 연결되는 해로를 잃게 되었다.

272년, 로마의 군인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쳐들어갔다. 이에 군인으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제노비아 여왕은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워지만 잘 정비된 로마 군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집트를 탈환하고, 시리아 각지에서 팔미라 군대를 격파한 다음 팔미라를 로마의 식민지로 병합시켜버렸다. 이렇게 해서 독립국가였던 팔미라는 불과 13년 만에 소멸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싸움에서 패한 제노비아 여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팔미라가 함락될 때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되었다는 설에서부터 팔미라 함락을 슬퍼하며 단식하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후 팔미라는 페르시아에 맞서기 위한 로마의 위성도시로 존속되었지만, 634년 이슬람 군에 점령되었다. 이때 이슬람 군대는 팔미라의 건축물들을 해체해서 성을 쌓는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이후 팔미라는 몇 차례 지진의 습격을 받아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