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ㅡ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의 길
▲성벽에 올라가 내려다본 생쟁피드포르 마을, 순례의 길 출발점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가는 길 출처 / 월간 산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사도 야고보의 묘가 있는 성당) 순례의 길 지도
▲지도출처 / dongA.com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영광의 문’ 중앙 기둥에 있는 사도 성야고보 상
◆산티아고(성 야고보)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
사도 성야고보의 묘가 있는 산티아고(성 야고보)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향한 순례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피레네 산맥 근처의 두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웃 나라에서 피레네 산맥으로 오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서면 하나로 모이는 이 순례길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며,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지금도 해마다 수만 명의 순례자가 다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은, 8세기 동안 전세계 그리스도교도가 싸우지 않고 서로 깊이 이해하도록 만드는데 지대한 구실을 했으며, 중세에는 에스파냐 북서부에 번영과 부를 안겨 주었다.
중세의 순례길- 지나는 길은 다르더라도 순례자들은 푸엔테라레이나(론세스바예스와 솜포르트 고개에서 시작되는 순례길 2곳이 만나는 지점)에서 로그로뇨, 산토도밍고 데 라카르사다, 부르고스, 카리온 데 로스콘데스, 레온, 아스토르가, 폰페라다로 통하는 코스를 좋아했다.
군주들은 이 길 연변에 순례자를 위한 무료 병원이나 숙박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중세 무렵에는 순례자가 순례길에 오를 경우, 출발하기 전에 고향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순례자의 소지품을 주었다.
순례자는 거친 모직물을 몸에 두르고 짧은 망토, 넓은 차양 모자, 표주박, 식량 주머니, 거기에 순례자의 신분 표시라고 할 수 있는 가리비 껍데기를 몸에 달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빛’인 성야고보(에스파냐명 산티아고)의 무덤을 찾아서 길고 험한 순례길에 올랐다.
순례자의 한결같은 소망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었다. 순례자 가운데에는 국왕과 대주교도 있었다. 순례 여행을 완수하고 속죄를 하고 일련의 경건한 계율을 지키면, 순례를 수행한 증거로 ‘콤포스텔라’라는 증서를 받는다.
문화가 교류되는 길- 1150년 무렵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위한 최초의 안내서가 만들어졌다. [교황 칼릭스스 2세의 고문서] 제5집에 들어 있는 ‘성야고보의 글’이 그것으로, 프랑스인 수도사 에메릭 비코가 집필했다.
이 안내서를 쓴 목적은 순례자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지켜야 할 성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베리아 반도와 다른 유럽 여러 나라를 이어 주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8세기 동안 이 길은 문화, 종교 정보를 교환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 밖에 있는 기술자나 상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순례길에 있는 여러 도시에 인정된 특권은 커다란 매력이었다.
그 결과 외부에서 온 그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중산층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순례길이 한창 번성했던 시기는 11~15세기였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16세기 이후에 이 순례길은 급속히 쇠퇴했다.
로마네스크 예술과 순례길- 순례길은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의 탄생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클뤼니 수도회를 비롯한 많은 수도회 또한 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모든 수도원에 도입함으로써 로마네스크 양식을 전파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으로는 하카의 산페드로 대성당, 프로미스타의 산마르틴 대성당, 레온의 산이시도로 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있다.
하카에 있는 산페드로 대성당은 순례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로마네스크 건축으로서 11세기 중엽에 짓기 시작했다. 삼랑식이며 신랑의 지주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고, 화려하게 꾸민 아름다운 기둥머리가 달린 둥근 기둥이 지주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익랑 윗부분에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그마한 팔각형 궁륭이 보인다.
순례자가 나른 석재- 산티아고 순례길이 문화 차이를 넘어 전체 그리스도교도의 연대 의식을 높이는데 얼마나 공헌을 하였는지는 순례길에 있는 산마르틴 성당 건설과 관련된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성당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은 나바라 왕국의 왕 산초 엘 마요르의 왕비였다. 왕비의 기도가 순례자들한테 닿았던지, 유럽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날라온 석재로 이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산마르틴 성당은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1066년에 지었다. 이 성당은 십자 모양의 기둥으로 칸을 나눈 삼랑식으로, 익랑과 슈베(교회의 한쪽 귀퉁이에 나와 있는방)에 반원형 후진이 있다. 익랑과 신랑의 교차부 대들보 사이에 있는 둥근 천장을 떠받치는 북통처럼 생긴 곳에는 창이 나 있다.
기둥머리에는 기하학적 소재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나 성서 장면을 나타내는 인물상을 새겼다.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옛 왕국의 도읍지였던 레온에 있는 산이시도로 성당은 페르난도 1세 시대의 건물을 기초로 지었다. 오래된 건물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왕실 묘지가 된 현관랑뿐이다.
이 현관랑은 12세기 후반의 로마네스크 양식 프레스코화로 꾸며져 있는데, ‘로마네스크 그림의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문과 기둥머리에 있는 조각, 부속 시설에 보관된 금은세공, 알안다루스(안달루시아) 시기의 직물, 세밀화가 그려진 고문서 등이 있는 이 성당 전체가 귀중한 문화재이다.
또한 고딕 양식의 산타마리아 데 레글라 대성당은 ‘기품 있는 암사자’라고도 부르며, 순례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빛의 굴절을 이용해 독특한 금빛을 내며 시시각각 변하는 매혹적인 빛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마중하는 성야고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예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건물이다.이 대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디에고 파라에스가 주교로 있던 1078년이었지만,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척된 것은 1100년 무렵부터였다.
순례자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을 지나 ‘영광의 문’이라고 부르는 대성당 현관에 가까스로 다다른다. 장인 마테오가 만든 이 문은 유럽 로마네스크 조각의 걸작이자, 초기 고딕 양식으로 바뀌어 가는 시기의 특징도 보여 준다. 순례자는 윗부분이 반원형 아치로 된 현관의 중앙 기둥에서, 순례 지팡이를 들고 상냥한 표정으로 순례자를 맞이하는 성야고보를 만날 수 있다.
순례의 어제와 오늘- 중세의 순례자는 인생 최대의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우선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어 가족과 친구들한테 이별을 알렸다. 날이 밝으면, ‘그리스도교 세계의 빛’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사도 성야고보의 무덤을 향해 길고 위험한 순례 여행길에 올랐다.
‘하코비토스’라고 부르는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출발 전에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재산 분배에 관해 적은 문서에는 ‘프로 레메디오 아니마에 마에(내 영혼의 구제를 위해)’라고 적었다. 그렇지만 그가 과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는 신의 뜻에 달려 있었다.
10세기 무렵에는 갈리시아 지방을 지나는 순례자들을 노린 약탈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무리를 지어 여행했다. 오랫동안 고달픈 여행을 한 뒤 속죄를 하고 일련의 계율을 지키면, 순례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서인 ‘콤포스텔라’를 받았다.
순례 여행이 절정에 이르렀던 11세기에 성당 기사단이나 예루살렘의 성요한 기사단, 또는 성야고보 기사단 등이 순례길을 따라 차츰 시설을 정비했고,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돌봐 주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뒤에는 순례 여행에 대한 열기가 식어, 18세기에는 순례 행렬이 가장 적었다. 가까스로 상황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부터였다.
프랑스의 에코르드샤르트르란 단체의 지식인들이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성야고보의 무덤으로 가는 길을 답사하려고 계획했고, 조르주 브로딜이 자전소설 [인간은 모두 순례자]를 출판했다. 이리하여 산티아고 순례가 재발견되었다. 근래에는 순례의 목적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성야고보를 모시는 대성당에 있는 사도의 묘지가 목적이 아니라 그 곳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된 것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사도 야고보의 묘가 있는 성당) 순례의 길 지도
▲산티아고 순례의 출발점인 생쟁피드포르 마을의 모습
생쟁피드포르역, 850km 순례가 시작됐다. 파리의 몽파르나스역에서 출발한 초고속철도 TGV는 바욘(Bayonne)역에 섰다. 이곳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생쟁피드포르(St. Jean-Pied-De-Port)역에서 순례는 시작된다.한 달간 순례할 길의 이름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프랑스 국경에서 시작해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 국경 근처까지 이어지는 850km의 길이다.
이곳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산티아고협회를 찾아가 증서를 받는 일이다. 서류를 접수하고, 첫 도장을 받고,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로 이동했다. 알베르게(Alberge)는 증서를 가진 순례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숙소로 방과 부엌, 샤워시설을 갖춘 저렴한 숙소이다. 숙소에서 증명서에 도장 받고 출발한다.
▲론세발레스 수도원과 마을 전경. 맨 왼쪽 건물이 순례자들의 숙소로 이용되는 알베르게
▲순례자들이 빨아 널은 빨래가 햇살과 바람에 보송보송 말라가고 있다
순례길은 전신주 혹은 아스팔트 바닥에 흰색과 빨강색으로 그려진 표지를 따라간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의 곳곳에는
이렇게 순례자들을 위한 수도가 있다.
피레네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 길의 가장 높은 지점인 ‘콜 데 레포델(Col de Lepoeder 1410m)’에 도착. 여기서 다음
목적지인 론세발레스까지는 3.6킬로미터가 남았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4시에 문을 연다.
이곳의 침대 수는 자그마치 105개. 마치 군대 막사 같다. 배정받은 침대에 짐 풀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성당으로
갔다.이곳 성당에서는 매일 저녁 8시면 순례자들을 위한 축복 미사를 거행한다.
▲페르돈 고개 정상에 서면 순례자들의 행렬을 형상화한 조각과 만난다
▲오바노스,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며 행진하는 사이 마을 관청에서는
아이들에게 모자와 사탕등을 던져준다
▲푼레 타 레이나의 다리. 11세기에 지어진 다리가 아직도 튼튼하게 서 있다
▲시라쿠이 마을로 들어서는 순례자
▲에스테야, 순례자들이 다리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라체, 순례자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꼭지.
왼쪽은 와인, 오른쪽은 물이 나온다(왼쪽). 붉은 와인이 줄줄 흐르는 수도꼭지를 보며 즐거워하는 순례자
이라체(Irache) 수도원의 전설적인 수도꼭지가 나온다. 왼쪽을 틀면 붉은 와인이 나오고, 오른쪽을 틀면 물이 나오는 걸로 유명하다. 순례자들이 다들 신기해하며 왼쪽 꼭지에 입을 댄다. 이 길에는 걷는 사람뿐 아니라 자전거를 이용해 순례를 하는 사람도 많다
▲순례자들의 길 이정표가 되는 조개껍질 문양
순례 길 거리 곳곳에는 산티아고 길을 알리는 노란 조개껍질 문양만 가득하다.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는 작은 식당 하나, 슈퍼 하나 정도가 겨우 있을 뿐이다.그나마 이 정도도 없는 마을이 수두룩한데 그런 마을에는 '보부상 트럭' 기사가
주문을 받아 빵과 생필품을 배달해준다.
2시를 넘긴 오후의 해는 살인적인 열기를 내뿜고 있다. 왜 이 시간에 가게와 식당들이 문을 닫고 '시에스타(낮잠)'를 잔다.
팜플로냐에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하다는 카페 이루나가 있다. 배낭 무게로 인한 부상자가 속출하는 이 길에서는 택시 회사들이 배낭을 옆 마을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스페인의 마을들은 낮에는 죽은 듯 잠들었다가 저녁 8시가 넘어야 깨어난다. 건물의 모든 창문들은 덧문까지 꼭 닫혀 있다. 빛이 들어오는 걸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다. 낮 동안 그렇게 침묵 속에 닫혀 있던 마을이 밤이 올 무렵 깨어나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는다. 스페인의 마을이 잠에서 깨어날 무렵 순례자들은 잠자리에 들고-보통 9시면 다들 잠자리에 든다
스페인의 마을이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새벽 5시에 순례자들은 깨어 다시 길을 나선다.
▲알베르게에서 파는 티셔츠에 쓰인 그림. “고통 없이 영광 없다
▲중세 시대에 건설된 로그로뇨의 다리 사이로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로그로뇨의 어여쁜 성당 이글레시아 산 바르톨로메의 입구 천장 장식
로그로뇨는 처음 만나는 큰 도시이다. 아름다운 교회가 많이 남은 역사 깊은 곳이다. 이글레시아 산 바르톨로메(Iglesia San Bartolome)성당은 독특한 입구와 단순하면서 기품 있는 실내 장식, 적당한 규모의 어여쁜 교회이다.
이 교회들의 많은 부분이(특히 15세기 이후의 교회들) 남아메리카에서 약탈해온 금과 은에 기댄 바가 컸다고한다. 라우렐 골목(Calle Laurel)은 북부 스페인 지방의 대표적인 간식거리라고 할 수 있는 타파(tapas)를 파는 작은 바로 유명한 골목이다
▲나헤라의 알베르게 벽에 그려진 순례자 그림
▲나헤라 마을의 중심부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정유회사 쉘이 후원한다.
따라서 작은 마을마다 코카콜라 자판기가 있다
▲살아있는 닭 두 마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유명한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의 성당
산토 도밍고 성당의 유명한 닭 두 마리를 보러 간다. 암탉과 수탉을 보러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당에 온다.성당의 동쪽 벽에는 고딕 양식의 닭장이 있고, 그 안에 하얀 닭 두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다. 이 닭에는 멋진 전설이 전해져온다.
때는 14세기. 한 독일인 청년이 부모 및 하녀와 함께 산티아고로 성지순례를 가는 길이었다. 젊고 잘 생긴 청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하녀가 열렬하게 고백을 하며 유혹을 해왔지만, 우리의 청년, 냉담하게 모욕을 주며 응하지 않았단다. 분노와 모욕으로 제 정신을 잃은 하녀는 그의 가방에 금술잔을 넣었고 청년은 절도죄로 붙잡혀서 교수형을 당한다.
절망하고 좌절한 청년의 부모는 그러나, 신앙심 깊은 이들이라 그런 불행한 사고 중에도 순례를 계속 이어간다. 순례를 마치고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는 길, 그들의 아들이 교수대에 달린 모습그대로 살아 있는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
부모는 마을의 읍장에게 달려가 기적을 이야기하고, 아들을 교수대에서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읍장의 반응 경멸적인 말투로 "만약 당신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이 식탁의 구운 닭 두 마리도 살아있겠구려." 그가 구운 닭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바로 그 순간, 이 닭 두 마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식탁에서 뛰어내리며 요란하게 울어댄다.
결국 청년은 석방되어 부모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 신을 섬기며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후 이 마을의 성당은 매달 닭 두 마리를 새로운 닭으로 교체하며 성당 안에 감금하는 의식을 대대로 몇 백 년 동안 이어왔다. 이 닭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례자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 내내 행운이 함께 한다기에 아무리 귀를 기울이며 기다려도 닭들은 울지 않는다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 내부의 조각
스페인의 모든 마을마다 교회의 위치는 중심에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성당을 들어가는 데 3유로의 입장료를 내야하는데(순례자들은 1유로) 주일은 무료이다. 13세기에 지어진 성당은 아름다웠다.
뜨겁던 햇살이 저물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이 되니 거리에 시장이 서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광장에서 악단이 쿠바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자연스레 무대 앞으로 나와 춤을 춘다
▲순례자들에게 마리아 목걸이를 나눠주고 계시던 수녀님. 온타나스 가는 길
▲온타나스 마을의 교회와 알베르게
▲이른 아침 첫햇살을 받고 있는 카스트로해리즈
카스트로헤리즈(Castrojeriz)는 산티아고 성인이 사과나무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았다는 마을이다. 이태로 델 카스티요(Itero Del Castillo)에는 11세기의 성당을 복원해 개조한 알베르게가 서 있다. 지금까지 본 알베르게 중 가장 어여쁘다.
이태리의 성인을 모신 곳이라 이 성당의 복원도 이태리에서 맡아서 하고, 자원봉사자들도 계속 이태리 사람들이 맡았다.성당의 제단 근처에는 이 성당의 복원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죽은 후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던 이태리인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고, 그의 사진이 있다
▲수영장이 딸린 보아딜야의 환상적인 알베르게
▲끝없는 밀밭 사이로 나타난 해바라기 꽃밭이 눈을 즐겁게 한다. 카리온에서 레디고스 가는 길
▲오래된 교회와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 사하군 가는 길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 레온 대성당
▲레온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레온 대성당에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을 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한 대신 제단에는 그림만 걸려있을 뿐 장식이 없다.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이가 혼자 부르는 노래,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가사가 귀에 들린다
▲레온을 지나 빌라데자자레프로 가는 길.
지겹도록 단조롭던 메세타를 벗어나는 길이라 드문드문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아스토르가 성당의 입구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지은 건축물 팔라시오 에피스코팔
▲그레고리안 성가로만 진행되는 미사. 라바날
라바날 수도원은 9세기에 창립된 베네딕트 수도회로 라틴어 그레고리안 챈트로 예배드리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성당은 작고 보잘것없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허물어져가는 벽이 그대로 드러난 제단에는 오직 십자가가 걸려 있을 뿐. 파이프오르간도, 마이크도 없이,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예배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십자가 무덤을 바라보는 순례자들. 크루즈 데 히에로
크루즈 데 히에로(Cruz de Hierro)에는 거대한 돌 무덤 위에 십자가가 서 있다. 예부터 켈트인들은 언덕위에 돌무덤을 만들어서 산의 신에게 안전한 여행을 간구하고는 했다고 한다. 이 돌무덤 위에 돌 하나를 올려놓는 행위는 이제 순례자들의 의식이 되었다.
어떤 순례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부터 돌을 가져와 이곳에 올려놓기도 한다. 나무 십자가 주변에는 순례자들이 매달아놓고 간 물건들로 가득하다. 가족이나 연인의 사진과 사연들, 손수건, 신발, 모자, 조개, 목걸이 등이다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
만자린(Manjarin)은 중세 시대의 순례자 숙소가 어땠을지를 상상해볼 수 있는 알베르게로 유명하다.전혀 보장되지 않는 사생활, 청결과는 거리가 먼 환경, 턱없이 부족한 침대수, 양들과 함께 거주해야하는 협소한 공간. 하지만 이런 부족함이 오히려 이 알베르게만의 독특함으로 작용해일부러 이곳을 찾아와 머무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 알베르게의 주인 토마스는 늘 가슴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순례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아픈 곳을 치료해주고, 카미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재미있게 들려주기로 소문이 났다. 매일 아침 토마스는 순례자들이이곳을 떠날 때마다야곱 성인이 듣고 순례자를 지켜주라는 뜻에서 문 앞의 커다란 종을 힘껏 울려대고는 한다
▲카미노의 길 안내표지인 조개껍질 문양(왼쪽)과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를 표시하는 문양
▲오 세브레이로의 마을, 초가로 이엉을 얹은 이 멋진 건물은 소시지나 햄을 말리는 훈제 창고이다
오 세브레이로의 마을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5분이면 되는 작은 마을이 전부 돌로 지어져 아름답다. 마을 여기저기에 이엉을 올린 초가집(소시지, 햄을 훈제시키는 창고)이 어여쁘게 서 있다.1년 내내 안개가 껴 전망을 보기가 힘든 곳이다
▲성야곱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스페인 순례자들. 해발고도 1270m의 알토 데 산 로께
1270m의 알토 데 산 로께(Alto de San Roque)에 오르니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가려고
고군분투하는 성 야곱의 조각이 서 있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가리키는 표지석
▲'최고의 알베르게' 라고 말할 수 있는 리바디소 도 바이소 마을의 알베르게
리바디소 도 바이소(Ribadiso do Baixo) 마을의 알베르게는 정말 예쁘다. 강가 바로 옆에 자리한 돌집에는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딸렸다.이 알베르게를 '최고의 알베르게' 목록에 올려놓는다
▲산티아고를 걷다가 사망한 순례자의 무덤.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남겨놓고 간 메모와 사진, 꽃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산티아고 방문을 기념해 세운 조형물
▲순례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기우는 저녁해를 받으며 서있는 대성당
1985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스페인 북서부의 유명한 순례 유적지로 이슬람교에 대한 스페인 그리스도교의 항전의 상징이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건물이 혼재해 있는 건축물의 寶庫이기도 하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대성당의 파사드가 건설된 뒤부터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예찬의 대상이 되었다.순례 열기가 식었다고는 하지만 중세에 사람들이 감탄했던, ‘그리스도교 세계의 빛’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그 매력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길고 험난한 순례길을 걸어서 일주하려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러나 옛날에는 단지 죄의 사면 하나만 바라고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가 한결같이 목표로 한 최종 목적지는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시가 전체가 1985년에 인류의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장엄하고 화려한 대성당에는 에스파냐 수호성인 성야고보의 무덤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성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발견된 뒤, 아스투리아스 왕 알폰소 2세는 이 곳에 예배당을 지으라고 명령했다.돌과 진흙으로 지은 예배당이 사도 성야고보에게 봉헌되었다. 이 허술한 건물은 872년에 알폰소 3세가 개축했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1078년에 착공해 1128년 무렵에 완성했는데, 외부는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둥근 지붕은 15세기에 만든 것이며, 16세기에는 회랑이 완성되었다. 대성당이 세워진 뒤 그 둘레에는차츰 집과 궁전이 들어서게 되었다. 갈리시아 지방은 가랑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습한 땅’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갈리시아 지방의 문화와 종교 중심지였으며 거리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여인숙과 환전상이 늘어서 있었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있는 산헤로니모 수도원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파사드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중세에는 가난한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건물이다.
한편, 부유한 학생들이 기숙사로 이용하던 곳은 폰세카 궁으로, 지금은 약대 건물로 쓰고 있다. 그 밖에도 대학 관계 기숙사로 수도원을 이용하기도 했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서 그 다음으로 순례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크 양식의 왕립 병원이다. 이 왕립 병원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와 왕비인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가 기증한 것이다.옛날에는 이 곳에서 순례자한테 뜨거운 스프를 대접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 건물 일부를 호화로운 파라도르(국영호텔)로 쓰고 있는데, 지금도 순례자란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을 지난 순례자는 대성당 앞에 다다른다. 대성당에서 가장 장엄하고 화려한 부분은 기념비적인 추리게라 양식의 파사드이다.
이 파사드는 페르난도 데 카사스 이 노보아가 1750년에 완성한 것으로, 그 양옆을 똑같이 생긴 바로크 양식의 탑 2기가 받치고 있다. 대체로 이 파사드가 갈리시아 지방의 모든 건축과 종교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지방 특유의 가랑비가 이따금 멈추면, 이 파사드는 갑자기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선명한 색으로 빛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성야고보(산티아고)의 거리는 작은 도시이며, 규모가 중간쯤 되는데, 결코 크지는 않다.” 이것은 작센의 설교사 요한 테첼이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까지 기나긴 순례길을 지나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과 그 거리를 보게 되었을 때 쓴 글이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빛’이라 불리던 이 도시를, ‘모든 죄사함의 해’인 1993년에, 루터와 사이가 좋지 않던테첼이 다시 찾았다면 너무나 변한 모습에 틀림없이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사도 야고보의 무덤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지칠대로 지친 순례자들 앞에 가혹하게도 몬테데라알레그리아 산(희열의 산)이 버티고 있다. 오늘날에는 많은 순례자를 위해 이 마지막 난관에도 임시 오두막집에 근대적인 설비를 갖추어 놓았고, 순례길 모습도 완전히 바뀌었다.
1993년에는 ‘성야고보의 날’인 7월 25일이 일요일인데다 로마 교황에게 특권도 인정받았다. 그 덕택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또다시 ‘모든 죄사함의 해’를 축하하면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행사들을 기획해 ‘성야고보의 말’을 축하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의 공연은 클래식 음악팬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밥 딜런이나 에릭 크랩튼 같은 지난날의 록스타들이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게다가 정부 고위 관료들도 ‘성야고보의 날’에 순례길을 따라 산티아고를 참배했으며,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에스파냐 수호성인에게 비호해달라고 간청했다. 왜냐하면 ‘모든 죄사함의 해’에는 특별 면죄까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순례 계율에는 교통 수단에 관한 엄격한 규정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방문객 대부분이 쾌적한 관광버스로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11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가 해질녁의 저녁놀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산티아고 대성당에 있는 사도의 무덤 앞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도보 순례는 이미 지난날의 유산이 되고 말았다.
대성당에는 둥근 지붕에 쇠사슬로 달아맨 거대한 향로인 ‘보타후메이로’가 있다. 지금은 중요한 의식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데, 여러 명의 사내가 이 향로를 끌고 익랑을 지나다닌다. 옛날에는 순례자들 상당수가 일단 대성당에 자리를 잡으면 대성당에서 그대로 숙박했던 데에서 이런 습관이 생겼다.
대성당에는 언제나 향을 피워 놓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향로를 움직여 환기를 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순례자가 목표로 하는 사도 성야고보의 유해는 주제단 아래에 있는 지하 제실에 안치되어 있다. 주제단에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야고보 상이 있고, 그 양옆에는 사도와 행동을 같이한 성아타나시우스와 성테오도시우스 상이 있다. 중세 후기에 이상하게도 사도 성야고보의 유해가 흩어져 없어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1879년 무렵에 수수께끼처럼 재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프랑스 툴루즈에 있는 생세르냉 대성당에도 성야고보의 유해가 있다고 알려졌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있는 것은 과연 진짜 사도 성야고보의 유해일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후에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그 진위를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자는 순식간에 ‘미친 개처럼’ 이상해질 것이라고, 1498년에 라인란트 출신의 기사 아놀드 폰 하프에게 은으로 된 성유물 상자를 지키는 사람이 경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영광의 문
장인 마테오가 20년 이상 걸려 1188년에 완성한 ‘영광의 문’은 현관 복도에 있는 3짝의 문으로, 한가운데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창에 찔린 상처를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위대한 예술가는 시대의 양식을 초월하는데, 마테오 또한 당시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초월했다. ‘영광의 문’은 위엄 있는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영광을 얻는 장면을 그렸으며, 구 둘레를 12사도, 천사,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장식했다.
성야고보는 순례 지팡이를 들고 정문 입구 중앙 기둥에 앉아 있다. 완벽한 도상학에 따라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와 수많은 상징 인물들을 배치해 이 경이로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영광의 문
▲“조개표지를 붙이고 배낭을 맨체 지팡이”를 든 맨발의 순례자
▲조개표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경내
▲성당 내부
▲유리화
▲라스플라테리아스 문
대성당 남쪽에 있는 ‘시계탑’ 근처에는 ‘라스플라테리아스 문(은세공인의 문)’이 있는데, 조각이나 돋을새김
장식이 풍부하게 새겨져 있다. 옛날에 문 둘레에 은세공인의 공방이 있었던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대성당 광장 분수
▲성야고보 상
▲십자고상
드디어 산티아고에 들어섰을 때, 광장에 우뚝 솟은 성당을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성당은 지금까지 본 어떤 성당보다 아름다웠다. 800km를 걸어왔기 때문일까. 2005년 7월 31일 일요일 , 아침에 순례자 협회 사무실로 가 증서를 받았다.
"Camino de Santiago"를 걸었다는 증서. 사무실을 나와 성당으로 갔다.
천 년 전부터 이곳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성당으로 가 제단 뒤의 산티아고 상을 끌어안는 게 전통이라고 했다. 지난 천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끌어안았을 산티아고 상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를 올렸다.
이제 "Camino de Santiago"는 끝이 났다. 하지만 새로운 삶의 길이 여전히 내 앞에 기다리고 있다. 지구 위의 순례자. 이 삶의 순례의 길에서 내 영혼이 목말라하고 갈구하는 것. 그것을 찾아 나는 여기까지 왔다. 산티아고에 도착했으니 순례는 끝이 난 셈인데 이렇게 다시 걷는 이유는 '세상의 끝'에 가기 위해서이다
▲폰테 마세이라 마을
▲세상의 끝에서 해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순례자들
대부분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서 순례의 끝을 맺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일부는 다시 90km를 걸어 피네스테레(Finesterre)로 향한다. 피네스테레는 그 옛날 로마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곳이다. 순례자들은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동안 신고 온 신발을 태운다고 했다.
나는 지금 길의 끝으로 가고 있다. 피네스테레에 들어섰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 등대(El faros)에 왔다. 길의 끝이자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진정한 끝.한때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곳. 산티아고에 사흘을 머문 후 사흘간 90km를 걸어 이곳에 섰다.바닷가 절벽 위에 하얀 등대가 서 있는 곳.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긴 순례의 끝을 마감하며 신고 온 신발을 태우곤 했다
▲알베르게의 방명록에 한 순례자가 길 위에서 만난 다른 순례자들의 그림을 그려놓았다(왼쪽).
순례자들이 알베르게에 남겨 놓고 간 지팡이들(오른쪽)
◆순례 코스
프랑스 땅 생쟁피데포르(St.Jean Pied de Port)-론세발레스(Roncevalles) 27km- 오리슨 알베르게- 스페인 땅 피레네 산맥- 론세발레스(Roncesvalles) - 부르게떼(Burguete)- Zubiri(주비리) 22km- 라라소냐(Larrasona)- 아따라비아(Atarrabia)- 팜플로냐(Pamplona) 21km- 시주르 메노르(Cizur Menor)- 자리퀘이궤- 페르돈(Perdon) 고개- 우테르가(Uterga)- 무르자발(Muruzabal)- 오바노스(Obanos) 21km- 푼테 라 레이나(Puente Ra Leina) 3km- 시라쿠이- 로르카(Lorca)- 에스테야(Estella) 22km- 이라체(Irache) 수도원- 아께스따라-빌라 마요르(Villamayor)-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21km- 산돌(Sandon)- 비아나(Viana) 19km- 로그로뇨(Rogrono)- 나바레떼(Navarrete) 23km- 나헤라(Najera) 20km-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Sto. Domingo de la Calzada) 21.5km- 그라뇬(Granon)- 레디실라(Redisila)- 벨로라도(Belorado) 22.5km- 토산토스(Tosantos)- 에스피노사(Espinosa)- 빌라프랑카(Villafranca)- 오르테가(Ortega) 25km- 아게스(Ages), '산티아고까지 518km'-아테푸에아르카(Atepuearca)- 부르고스(Burgos) 21km- 메세타(Meseta)- 산 볼(San Bol)- 온타나스(Hontanas) 33km- 카스트로헤리즈(Castrojeriz)- 이태로 델 카스티요(Itero Del Castillo)- 보아딜야 델 카미노(Boadilla del Camino) 29km- 프로미스타(Fromista) - 레벤카(Revenca)- 까리온(Carrion) 27km- 칼자디야 데 라 쿠에자(Calzadilla de la Cueza)- 레디고스(Ledigos) 23.5km- 사하군(Sahagun) 16.5km- 칼자다 델 코토(Calzada del Coto)- '오리지널 루트' 'Camino Franceis'- 베르시아노스(Bercianos) - 부르고 라네로(Burugo Ranero)- 빌라마르코(Villamarco)-렐리오고스(Reliogos) - 만시야(Mansilla) 38km- 레온(Reon) 21km- 빌라 데 마자리페(Villar de Mazarife) 21km- 오스텔 데 오르테가(Hostel de Ortega)- 아스토르가(Astorga) 32km-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 21km- 크루즈 데 히에로(Cruz de Hierro)-만자린(Manjarin)- 폰페라다(Ponferrada) 33km- 엘 아세보(El Acebo)- 몰리나세카(Molinaseca)- 빌라 프랑카 델 비에르조(Villafranca del Bierzo) 24km- 프라바델로- 오 세브레이로 (O Cebreiro) 29km- 1270m의 알토 데 산 로께(Alto de San Roque)- 알토 데 포이오-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23km- 핀틴(Pintin)- 바르바델로(Barbadelo)- 페레이로스(Ferreiros)32km, 산티아고까지는 99km- 곤잘(Gonzal)-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33.5km- 멜리데(Melide)- 리바디소 도 바이소(Ribadiso do Baixo) 26.5km- 산티아고(Santiago) 40.5km- 폰테 마세이라(Ponte Maceira)- 네그레이라(Negreira) 20km- 올베이로아(Olveriroa) 34km- 피네스테레(Finesterre) 30km + 등대 왕복 6km = 3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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