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女王과 女帝들
아들 폐위시키고, 쿠데타 일으켜 집권했어요
지난 8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96세의 나이로 서거했어요. 70년 동안 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나라를 다스렸어요.
그동안 미국 대통령은 13번이나 바뀌었어요. 엘리자베스 2세는 실제 정치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권위가 매우 높았고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엘리자베스 2세처럼 한 나라의 군주로서 당당히 삶을 살아갔던 세계의 여왕과 여제에 대해 알아볼게요.
①러시아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쿠데타로 즉위했어요. 사진은 1760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옐리자베타의 초상화. ②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였던 측천무후의 초상화. ③사후인 17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스스로 황제 자리 오르고 왕조 세워
측천무후(則天武后·재위 690~705)는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였어요. 간혹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여성도 있었지만, 대부분 황제를 앉혀 두고 뒤에서 대신 정치를 주도하는 섭정(수렴정정)을 했어요. 유일하게 자신의 왕조를 만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앉은 여성이 바로 측천무후예요.
측천무후는 14세에 당 태종의 후궁이 됐다가 태종이 죽은 후 황실 전통에 따라 비구니(여자 승려)가 되어 절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당 태종에 이어 황제가 된 고종이 황자(皇子) 시절부터 좋아했던 그녀를 다시 궁에 불러들였어요. 궁에 들어온 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경쟁 상대였던 후궁들과 황후까지 몰아내고, 결국 655년 32세의 나이에 황후가 됐어요.
고종은 몸이 약하고 우유부단했다고 하는데, 측천무후는 아픈 황제 대신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해 664년부터는 수렴청정 형식으로 중국을 통치한 것으로 보여요.
이후 황실 안팎의 반대파를 제거한 측천무후는 690년 당시 황제였던 자신의 아들 예종을 폐위시키고 직접 황제가 돼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하고 수도도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어요. 역사가들은 측천무후가 세운 주나라를 고대의 주나라와 구분해 ‘무주(武周)’라고 불러요.
측천무후는 과거제도를 활용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과거 명문 귀족 가문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어요. 측천무후는 고위 관료였던 재상의 80%를 사형시키거나 귀양 보냈어요.
자신에게 반대하는 귀족들을 매우 엄격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했죠. 정권에 협조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보상을 내리는 절차도 체계적으로 갖추도록 했고요.
측천무후가 다스리던 시기는 백성들이 살기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중국 양쯔강 이남 지역에서 세금으로 낸 쌀을 모아두었던 낙양의 함가창 유적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가장 많은 곡식을 모아 저장했던 시기가 바로 측천무후와 현종이 황제였을 때였다고 해요. 측천무후가 통치하던 50년간 대규모 농민반란도 일어나지 않았고요. 백성들이 마음 편히 농사지으며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측천무후는 사후에 고종과 함께 당의 황후로 건릉에 묻혔습니다. 측천무후 묘비에 아무 내용이 없는데 본인의 유언이라는 말도 있지만,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나라를 세운 황제였다가 다시 당의 황후로 돌아간 내용을 기록하기가 불편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교육과 예술 발전에 관심 많았던 여제
러시아에는 군사 쿠데타로 황제에 즉위한 여제가 있어요. 바로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재위 1741~1761)예요. 1740년 10월 러시아를 다스리던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가 서거하고, 생후 2개월이 갓 지난 이반 6세가 즉위했어요.
이반 6세의 생모인 안나 레오폴도브나는 섭정을 하며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고자 했죠. 표트르 1세의 딸인 그녀가 미칠 영향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에요.
옐리자베타는 이에 맞서 쿠데타 계획을 세우게 됐어요.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25일 표트르 1세가 창설한 황실 근위대에 찾아가 자신의 계획을 말해요. 그리고 그들과 함께 어린 황제가 있는 겨울궁전으로 향했어요.
쿠데타는 성공했고, 옐리자베타는 이튿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관료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불러 모아요. 그리고 자신을 러시아 황제로 선포하게 합니다. 그렇게 32세의 옐리자베타는 러시아를 다스리는 황제가 됐어요.
옐리자베타는 자신에게 충성심이 강한 신하들만 권력을 갖도록 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했어요. 한편으로는 안나 여제가 집권했던 시절 시베리아로 유배 갔던 귀족을 풀어주며 자애로움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그는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관세를 없애고, 소금과 와인에 대한 세금은 올려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려 했어요.
옐리자베타는 교육과 예술의 발전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러시아 최초의 대학인 모스크바대를 설립하고, 예술아카데미를 만들기도 했죠. 대외적으로는 스웨덴의 침공을 막아내고, 7년 전쟁(1756~1763)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과 싸우기도 했지요.
옐리자베타는 표트르 대제의 정통 후계자로서 혼란스러운 러시아 왕실을 안정시키고 러시아의 힘을 안팎으로 키웠다는 평을 받는 강한 여제였답니다.
◆”국가와 결혼했다” 명언 남긴 여왕
영국은 ‘여왕의 나라’로 불려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포함해 6명의 여왕이 있었거든요. 이 가운데 영국을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도약시켰다고 평가받는 여왕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랍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9년 영국 국교회를 부활시켰어요. 하지만 여왕은 종교 문제로 국가에 분열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가톨릭 신도를 크게 차별하지 않았어요. 영국 국교회 예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벌금만 내면 됐죠.
하지만 1570년 이후 교황이 여왕을 파문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돼요. 교황이 군주를 파문한다는 것은 가톨릭을 믿는 백성이 더 이상 왕에게 충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되거든요.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가톨릭에 강한 대응을 하기 위해 수백 명의 가톨릭 교도를 죽여요.
이런 종교적 대립은 대외 전쟁과 연결됐어요. 여왕이 영국 내 가톨릭 세력을 이끌고 있었던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하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국가를 자처하며 무적함대를 이끌고 1588년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영국은 아르마다 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를 이기고 전쟁에서 승리하는데요. 그러면서 여왕의 권위도 높아졌어요. 그동안 엘리자베스 1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가톨릭을 버리고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기도 했죠.
엘리자베스 1세가 집권했을 당시 영국에는 걸인이 많았어요. 사람들은 공유지나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한 사유지 등에 울타리를 치고 양이나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이를 인클로저 운동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러면서 살던 땅에서 쫓겨나 유랑민이 된 사람이 늘어난 거예요.
엘리자베스 1세는 이들을 구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하는 구빈법(1601)을 만들었어요. 신체가 건강한 걸인들은 구걸하기 위해 나라에서 허가증을 받아야 했어요.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았죠. 특히 구빈법은 1834년 개정될 때까지 오랫동안 국가 사회 정책의 기본이 됐어요.
엘리자베스 1세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는데, 사망하기 2년 전 의회 연설에서 “한 남자가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과 결혼했다”고 이야기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요.
기사출처 / chosun.com / 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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