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중부ㅡ누추하지만 따스했던 그리움 속으로 시간여행
▲200여 년 전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베트남 중부의 작은 도시 호이안. 도자기 무역으로 중국, 일본은 물론 포르투갈과 아랍의 상인들까지 몰려들어 흥청거렸던 호이안은 이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축물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여행 목적지로 베트남은, 적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각별합니다. 서양 여행자들에게 베트남이란 긴 해변과 새로 들어선 최신식 리조트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호기심,
여기다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 오토바이로 가득한 혼돈이나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가녀린 처자들 따위로 버무려진 이국적인 여행지인 듯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좀 다릅니다.
한국 여행자들이 베트남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만나는 것은, 놀랄 만큼 닮아 있는 우리의 20∼30년 전쯤의 시간입니다. 특히 개발의 열풍에 올라탄 하노이나 호찌민 같은 베트남의 대도시보다, 개발의 삽날이 아직 닿지 않은 베트남 중부지역을 여행할 때가 더 그렇습니다.
누추하지만 억척스럽고, 거친 듯하지만 한편으로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압축성장의 시대를 건너오며 잃어버린 것들을 봅니다.
거기에는 시장에서 푸성귀를 주워다 팔거나, 과일 몇 개 펼쳐놓은 자그마한 좌판을 하루 종일 지키는 아낙네가 있고, 집 앞에 내놓은 평상에 엎드려 볼펜깍지에 끼운 몽당연필에 연방 침을 묻혀가면서 숙제를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나온 시간과 너무도 닮아 있는 곳, 그래서 반갑다가 금세 마음 한 켠이 짠해지는 곳…. 남북으로 긴 베트남 지도에서 딱 중간쯤에 있는 도시, 다낭과 호이안, 후에를 찾아갑니다.
# 관광지 강변 레스토랑의 생맥주 한 잔이 200원
“‘0’이 참 많지요.”
미화 100달러짜리 지폐를 베트남 돈으로 환전해주던 베트남 호텔 프런트 직원이 한 뭉치의 지폐 다발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100달러를 건네주고 받은 돈의 단위는 ‘200만’이 훨씬 넘었다.
베트남의 화폐단위는 동. 우리 돈 100원이 대략 ‘2000동’이다. 지폐의 단위가 워낙 높으니 그 값어치가 얼른 어림잡아지지 않는다.
베트남의 최고 고액권 지폐는 10만 동짜리. 0이 6개나 찍힌 돈의 가치는 우리 돈으로 치면 5000원 남짓에 불과하다. 이러니 정확히 셈해보지 않고 ‘0’이 주르륵 붙은 가격표만 보면 비싸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마련이다.
가령 슈퍼마켓의 캔 음료수가 6000동이라면 비싼 듯 여겨지지만 그래봐야 300원짜리다. 물건 값에서 먼저 0을 하나 지운 뒤 절반을 뚝 자르는 게 베트남 돈을 한국 돈의 가치로 셈하는 요령이다.
베트남 중부지역의 관문 도시는 다낭. 베트남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여기서 남쪽으로 40분쯤 거리에 관광도시 호이안이 있다. 호이안의 한복판을 흘러가는 강변에는 내·외국인 할 것 없이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붉은 등불을 켜 둔 제법 근사한 강변의 노천 바에서는 시원한 생맥주 한 잔에 4000동을 받았다.
4000동이라…. 한국 돈을 셈하는 요령대로 0을 하나 지우고 절반을 뚝 잘라보니 200원이다. 혹 잘못 계산한 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을 다시 셈해 봐도 200원이 맞다.
10잔을 마신다 해도 2000원이다. 붉은 테이블보가 깔린 야외 탁자 위에 200원짜리 생맥주 한 잔을 놓고 붉은 등불이 일렁이는 호이안의 강을 바라보며 앉았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번성했다는 무역항 호이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는 나중에….
음식 가격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의 식당들은 위생에 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대략 국수 한 그릇에 1만5000동 정도였다. 우리돈 700원쯤. 비싼 메뉴도 2만 동(1000원) 남짓이었고, 3만 동(1500원)을 넘는 메뉴는 거의 없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경제도시 호찌민은 개방의 물결에다 관광객들까지 밀려들면서 물가가 크게 올랐다지만, 중부지역은 아직도 돈을 내는 손이 미안해지는 물가였다.
싼 물가는 대체로 그곳에 사는 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말해준다. 그래서 때에 전 기념품 몇 개 들고 관광객들을 향해 악다구니처럼 달려드는 맨발의 아이들이나 남루한 현지인들의 사는 모습들은 때로 여행자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얼굴은 더없이 밝다. 삼각뿔 모양의 모자 ‘농’을 쓰고 지게처럼 생긴 ‘가잉’을 메고 다니는 과일행상의 얼굴에도, 리어카에 양철로 된 상자를 싣고 ‘아이스케키’를 파는 이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가득하다.
전쟁의 비극을 딛고 억척스럽게 살면서도 잇몸까지 드러내는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마울 따름이다.
▲구름으로 휩싸인 안남산맥이 바라보이는 다낭만의 전경.
# 기네스기록의 케이블카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오르는 맛
베트남 중부지방을 여행한다면 다낭이 관문이 된다. 베트남 땅은 길다. 북부의 수도 하노이에서 남부 도시 호찌민까지만 해도 1600㎞에 달한다. 버스로 움직이자면 자그마치 36시간이 걸리는 길이다. 다낭은 하노이와 호찌민의 딱 중간쯤에 있다.
그러니 베트남 전역을 일주하는 여행자들이라면 모를까, 중부지역만을 여행하려는 관광객들은 육로보다 항공편을 이용해 다낭공항에 당도한다. 다낭이 베트남 중부지역 여행의 관문이자 중심이 되는 셈이다.
다낭은 베트남 전쟁의 상흔이 깊게 새겨진 땅이다. 이념으로 대립하던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대치하던 북위 17도선의 비무장지역(DMZ)이 다낭 바로 북쪽이니 왜 안 그랬을까. 전쟁 당시 다낭에는 최대 규모의 미군 주둔기지와 고엽제 저장고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청룡부대도 이곳에 주둔했다. 다낭을 사수하려는 미군과 이곳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월맹군의 치열한 교전은 전쟁 내내 반복됐다.
그러나 다낭에서 지금은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베트남 정부가 모델로 삼아 개방정책을 실험하고 있는 도시답게 도심에는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고, 해안가에는 다국적 체인의 고급 호화 리조트들이 즐비하다. 다낭 한복판을 가로지는 강변을 따라서 대형 상업 간판들도 즐비하다.
도심에는 제법 규모가 큰 슈퍼마켓도 있고, 올 하반기쯤 문을 연다는 롯데마트의 막바지 공사도 한창이었다. 전쟁의 비극은 이쪽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을 테지만, 이제 외지인들의 눈에 다낭은 그저 평화로운 도시일 따름이다.
다낭을 찾았다면 꼭 들러볼 곳이 다낭 시내에서 차로 1시간쯤 거리에 있는 바나산이다. 해발 1487m의 바나산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사람들의 별장지였던 곳.
여기다 프랑스 자본이 기네스북으로부터 인증 받은 세계 최장, 세계 최고 높이의 케이블카를 설치해 정상에 유럽스타일의 고성을 짓고 있다. 2014년 완공이 목표라는데, 4개의 호텔이 이미 문을 열었고 놀이공원과 기념품 판매점, 레스토랑 등이 영업을 하고 있다.
바나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맛이 그만이다. 가슴이 털컥 내려앉을 정도로 가파른 철제로프를 오르는 케이블카는 폭포와 열대우림의 거대한 숲의 상공을 지나서 구름층까지 뚫고 오른다. 바나산의 정상은 비교하자면 지리산 노고단의 높이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지만, 체감 높이는 그 두 배쯤이다.
공기는 서늘하고 청량하며 시야는 거칠 것이 없다. 열대의 뭉게구름이 산자락을 타고 흩어지면서 주위가 운무로 가득 차기도 하고, 급작스레 장대비를 쏟아내기도 한다, 바나산 케이블카 이용요금은 우리 돈으로 왕복 2만 원쯤. 베트남의 물가 수준으로 보면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가격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본전 생각은 나지 않는다.
▲전통수공예품을 파는 호이안의 노점.
# 고풍스러운 도시에 몽환이 겹쳐지다
중부지역에서 가장 이름난 관광지를 꼽자면 이 두 곳이다. 다낭 남쪽의 도시 호이안, 그리고 다낭 북쪽의 왕도 후에. 거기에 이론은 있을 리 없다. 두 곳 모두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먼저 다낭에서 더 가까운 호이안부터 시작하자. 다낭에서 30㎞ 정도 떨어진 작은 해안도시 호이안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만 해도 세계 각국의 무역선들이 들고났던 국제무역항이었다.
지금은 자그마한 도시지만 중국 땅의 마카오와 말레이시아의 멜라카와 함께 이른바 ‘해상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으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 중 하나로 꼽혔다.
중국, 일본, 인도, 포르투갈은 물론이고 아랍의 상인들까지 이곳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무역선들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도자기를 자국으로 실어 날랐고, 중국과 일본 무역상들은 아예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도시를 가로지르는 투본강 이쪽과 저쪽에 마을을 형성하고 눌러살았다.
호이안이 매력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도시 전체가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수백 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전란의 포화로 상처 입지 않은, 온전한 유적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럼에도 호이안이 전란의 포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전쟁 당시 그곳이 ‘쇠락한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배의 크기가 커지면서 무역선들은 비좁은 호이안항을 떠나 북쪽의 다낭항 쪽으로 옮겨갔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쇄국정책으로 일본인들이 떠나가면서 호이안은 급속하게 쇠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호이안은 옛 무역항의 영화를 관광지로 되살리고 있다. 1999년 호이안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외국인 무역상이 떠난 자리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밀물처럼 몰려들고 있다.
중국풍의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고 화교들의 회합공간이나 절집들이 즐비한 호이안은 어쩌면 베트남 땅에서 가장 베트남답지 않은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거기에는 물결처럼 밀려가는 오토바이의 행렬 대신 도보 여행자들로 가득하다. 강이 내다보이는 건물에는 오래된 물건이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부터 전통음식을 내는 레스토랑과 진한 베트남 커피를 내는 카페들이 즐비하다.
호이안의 진면목은 밤에 만날 수 있다. 강을 건너가는 다리마다, 물건을 내놓은 가게마다 내건 형형색색의 등불이 강물에 어른거리는 풍경은 자못 몽환적이다.
고풍스러운 옛 도시에 홍등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함께 겹쳐지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호이안의 야경을 즐기는 관광객들은 촛불을 켠 등을 소원과 함께 강물에 띄우기도 하고, 자전거를 빌려 강변을 달리기도 하고, 밤바람을 맞으며 강변의 노천카페에서 200원짜리 생맥주 한 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연못과 정자를 거느리고 있는 뜨득 황제의 황릉.
# 봉건시대 권력이 지은 황릉의 화려함
베트남 중부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후에. 다낭 북쪽의 안남산맥을 넘는 험준한 하이번고개(1172m)를 넘어 당도하는 역사도시 후에는 베트남 국토를 통합한 최초의 왕조이자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응우옌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140여 년 전만 해도 베트남 왕조의 기세는 등등했다. 남부지역을 점령해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이루고는 중국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임을 자부했을 정도였다.
후에의 관광지는 황궁과 황릉 등 황제의 공간이다. 황궁은 황제의 거처답게 규모도 규모지만 곳곳의 장식도 화려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돼 아직 일으켜 세우지 못한 건물들이 더 많긴 했지만, 중국의 자금성을 모방해 만들었다는 건축물들의 위용이 자못 당당하다.
황제가 앉았다는 금박으로 장식된 옥좌는 화려하게 번쩍였고, 기둥과 지붕을 타고 올라간 용 문양은 현란했다. 베트남 황실이 가졌던 무게는 용케 폭격을 피했거나 이제 겨우 복원한 유적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어쩌면 외국인 관광객들만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작 베트남 사람들이 황궁을 보는 시선은 그리 간단치 않다. 왕조가 몰락하고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이후 국민들이 식민지배를 묵인했던 봉건왕조를 어찌 취급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황궁 뒷마당 폐허 속에 무성한 잡초들이 그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은 백성들을 동원해 재위 중 자신이 묻힐 무덤을 치장하는 데 몰두했다. 103명의 후궁을 뒀다는 뜨득 황제는 4년 동안 3000명의 군사를 동원해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다. 자신의 공적을 새길 20t짜리 비석돌을 50㎞ 떨어진 지역에서 운반하는 데만 꼬박 4년이 걸렸다니 말 다했다.
그러나 정작 황제의 시신은 어디쯤 묻혔는지 알 수 없다. 심복을 시켜 200명을 동원해 황릉의 한쪽에 비밀리에 자신의 묘를 만들도록 한 뒤에 이들을 모두 몰살했다고 전한다. 백성들의 궁핍한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카이딘 황제는 한술 더 떠서 11년 동안 무덤을 만들면서 국고를 탕진했다.
그가 죽은 뒤 세워진 공덕비 뒷면에는, 지금은 지워졌지만 한때 황제를 비난하는 낙서와 욕설로 가득했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후에의 봉건왕조의 유적은 이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주요 관광수입원이 되고 있다.
후에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어하는 공간은 어쩌면 황릉보다는 티엔무 사원일지도 모르겠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응오딘지엠 정부의 부패와 불교탄압에 맞서 스스로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이는 소신공양을 했던 틱광둑 스님이 생전에 수도했던 곳이다.
스님의 소신공양 장면은 특파원 말콤 브라운의 사진 한 장으로 베트남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소신공양 후 남은 법체는 4000도의 열로 6시간을 태웠으나 심장은 녹지 않고 원형을 유지한 채 까만 숯이 됐다. 2시간을 더 태워도 심장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베트남 스님들은 이 심장을 금속용기에 담아 구리줄로 봉인하고 사이공 시내의 스웨덴은행에 맡겼다. 베트남 전쟁 후 스님의 심장은 하노이국립은행으로 옮겨져 보관 중이다. 태워도 녹지 않는 심장. 폭압적인 식민지배에 끈질기게 저항해 온 베트남의 심장. 그 저항을 이끈 수도자의 정신이 티엔무 사원, 거기에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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