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니우스ㅡ빌니우스 대성당, 세개의 십자가언덕
▲리투아니아 빌니우스
리투아니아는 발트해 3국 중 가장 큰 나라이다. 북쪽으로 라트비아, 남동쪽으로 벨라푸스, 서쪽으로 발틱해와 폴란드를 접하고 남서쪽으로는 러시아에 인접하여 있다. 리투아니아는 평지가 주를 이루는 국가로, 가장 높은 지역이 불과 294m에 불과하다. 국토의 1/4 이상이 숲으로 덮여 2800개가 넘는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니우스는 리투아니아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시의 중심부는 강의 서부지역이며, 대성당 광장이 그 중심이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구시가는 대성당 광장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있다. 이 밖에 Vilnius대학, 대통령 궁, "세 개의 십자가 언덕", 전망대 및 유대인들의 옛 마을과 거주지역이 볼만하다.
신도시는 구도시에서 서쪽으로 2km떨어진 곳에 있으며, 거의 모든 건물이 19세기에 건설되었고 시청이 여기에 있으며 그 뒤쪽으로 Gestapo와 KGB건물이 들어서 있다. 강의 남쪽에는 미국의 록음악의 전설인 Frank Zappa의 상반신 기념 동상이 있다.
◆빌리우스의 역사지구
북유럽의 고도, 빌리우스의 구시가지만큼 유럽의 다양한 건축 양식을 두루 볼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줄지어 늘어선 바로크 건물 사이사이에 고딕, 르네상스, 네오클래식 양식 등의 건물이 서 있다. 지난날 빌노라고 불렸던 이 도시를 수도로 한 리투아니아는 강대한 주변국에게 시달려 왔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리투아니아 국민은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빌뉴스 시가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착실하게 복원해 238채를 헤아리는 역사 건축물이 늘어서 중심가의 경관을 되살렸다. 빌리우스 시의 역사는 1323년경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게디미나스 대공이 이 지역에 성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게디미나스 대공은 독일에서 상인, 직인, 농부, 성직자를 불러들여 경제와 문화의 유럽화를 꾀했다.
그 때 그리스도교의 포교 활동도 허가했지만, 대공 자신은 그리스도교에 귀의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가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 것은 그의 손자 요가일라 대공의 치세인 1387년이었다. 폴란드 왕을 겸했던 요가일라 대공은 세례를 받고, 리투아니아의 그리스도교화와 폴란드화의 기초를 다졌다. 드넓은 언덕 아래 세워진 성 안에 대성당을 세우고 주교좌를 마련한 사람도 요가일라였다.
그러나 17세기에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성과 대성당은 파괴되었으며, 그 후로 대성당은 재건되지 않았다. 1419년의 대화재 이후에 비타우타스 대공은 신랑 3개와 탑 2기를 가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건설했다. 그것이 바로 성스타니스와프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시대에 따라 건축 양식이 크게 바뀌었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된 뒤, 1610년의 화재로 다시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그리고 1783년에는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개축되어 도리아식 원주를 가진 현재의 외관을 갖게 되었다. 이 밖에도 역사 깊은 성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세 빌뉴스의 성당 건축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성스타니스와프 대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성당 이외의 건물은 언덕 위쪽의 성 지역 안에 건설되었다. 게디미나스 대공이 14세기에 새운 탑은 빌뉴스의 상징이다. 언덕 위의 성은 독일 기사단의 공격을 받았을 때, 제후가 끝까지 싸워 지켰다.
1419년 비타우타스 대공은 전란과 화재로 손상된 목조 성채를 철거하고 고딕 양식으로 벽돌 성을 건설했다. 이 때 망루 2개가 추가로 건설되었다.
도시에 완전한 자치를 부여하는 독일의 도시법 ‘마그데부르크법’으로 빌리우스는 1387년에 자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연합군이 독일 기사단을 격파한 뒤부터 빌리우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빌뉴스는 한자 동맹의 여러 도시와 러시아의 중간에 위치해,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타타르인(몽골인)의 습격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길이 3km의 성벽에는 성문이 10개나 설치되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새벽의 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길드가 조직되어 제지공, 유리공, 인쇄공이 여기에 가담했다. 그 때 이미 독자적인 화폐까지 발행하고 있던 빌뉴스는 근대적인 경제 사회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1579년에는 예수회 학교(현 빌뉴스 대학)가 개설되고, 문화 생활도 크게 변화했다. 프라하나 크라쿠프를 16세기의 근대 도시로 꼽는다면, 빌뉴스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리보니아 전쟁 중이던 1569년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루블린 동맹을 맺었다. 형식적으로는 두 나라 간의 대등한 동맹이었지만, 사실은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의 속령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부터 리투아니아의 정치력은 쇠퇴되어 갔다.
그리고 빌뉴스가 누리던 중앙 유럽 경제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크라쿠프, 이어서 바르샤바가 차지했다. 대항 종교 개혁 동의 승리는 리투아니아의 쇠퇴에 박차를 가하고, 기근과 페스트의 유행은 리투아니아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더욱이 18세기 초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등이 스웨덴을 상대로 21년에 걸쳐 치렀던 북방 전쟁 중에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 점령되어 국토 대부분이 러시아에게 합병되고 말았다.
1920년에 주권을 회복하기까지 오랫동안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리투아니아는 독립 후에도 폴란드와의 영토 문제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과 소련군에게 잇달아 국토를 유린당해 결국 1940년에는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완전히 합병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을 요구하는 반소비에트 무력 활동이 리투아니아의 숲을 거점으로 8년 남짓 펼쳐졌다. 그러나 규모와 기간 면으로 볼 때 서우크라이나에 버금가는 격렬한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강대한 힘 앞에 무너졌다. 소련 시대에는 빌뉴스의 수많은 성당이 창고나 문화 시설로 바뀌었다.
성스타니스와프 대성당은 1956년부터는 미술관으로, 그리고 1963년부터는 콘서트 홀로 이용되었다. 1990년 리투아니아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전 세계에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은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1991년 9월 6일에 정식으로 독립을 인정했다.
같은 달 17일, 리투아니아는 유엔에 가입했다. 17~18세기에, 국제 무대에서 리투아니아의 힘이 저하될수록 빌뉴스에 는 흥미로운 현상이 생겼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이나 귀족 저택이 경쟁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적인 책임이 없어져 버린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가나 문학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거나 화려한 성당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빌뉴스 대학은 특징적인 안뜰이 12개나 있는 거대한 건물로서, 르네상스 양식과 후기 고딕 양식의 특징을 두루 갖춘 빌뉴스의 대표적인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빌뉴스에는 다른 양식의 건축물에 비해 고딕 양식의 건축물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성아나 성당, 성베르나르도 성당, 지난날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원 등 고딕 지구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고딕 양식의 뛰어난 작품이다. 빌뉴스의 고딕 건축물 대부분은 1748년과 1749년에 잇달아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그 때 함께 소실되었던 옛 시청사는 고딕 건축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던 건물이었다. 그 후 1785~1799년에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재건된 새 시청사의 외관은 마치 성당을 연상시킨다.
다양한 문화의 접점이었던 빌뉴스에는 가톨릭 성당 28개와 그리스 정교회 성당 7개, 프로테스탄트 교회 2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모스크와 시나고그도 각각 하나씩 있다. 이처럼 유럽 건축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건설한 문화재가 무수히 남아 있는 발트 3국을 ‘유럽의 변경’이라도 부르는 것은 근거 없는 편견이다
▲빌니우스의 상징인 "여명의 문" 앞면
▲빌니우스의 상징인 "여명의 문" 뒷면
과거 빌니우스 시가지의 동쪽 문이었으나 市가 확장되면서 현재는 중심에 자리하게 되었다.
빌니우스의 상징인 "여명의 문" 교회는 성문위에 세워져 있으며 여러지역으로부터
순례자들이 찾는 유명한 곳이다.
▲검은 얼굴 성모상
교회안에 '자비의 어머니' 성모상이 검은 얼굴로 그려진 상본이 모셔져 있는데 빌니우스의 수호성인인 성모의
이 그림은 치유의 기적을 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리투아니아, 폴란드, 벨라루스, 러시아 의 정교회와
가톨릭 신도들 공히 경배하고 있다.
▲순례자의 길
여명의 문에서 죽 벋어있는 이 길의 양쪽에는 교회와 수도원이 있고 과거에는 이길을 무릎으로 걸어가는 고행을 하기도 했다.
▲빌리우스 대성당 (성스타니스와프 대성당)
네오클래식 양식의 빌리우스 성스타니스와프 대성당은 도리아식 원주로 떠받쳐져 겉모습이 마치
그리스 신전 같은 느낌을 준다.
내부에는 고딕 양식이 남아 있다. 이 성당에 부속된 몇몇 작은 성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빌리우스 대성당과 종탑
▲빌리우스 대성당
▲빌리우스 대성당
▲빌리우스 대성당
▲빌리우스 대성당 내 성 카시미어 소성당
▲성 안나교회 (앞쪽)
▲성 안나 교회(St. Anne's church)
1501년에 세워진"붉은 벽돌의 환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건물 전체가 붉은 벽돌로만 이루어진 고딕양식의 교회이다.
33가지의 모양이 다른 벽돌을 구어 쌓았으며 벽면은 부드러운 곡선도 표현 되어있는 진귀한 건축물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이 교회를 수중에 넣고 싶다고 말했으나 그의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심사를 헤아리지 못하고 러시아에서 패퇴하면서 안타깝게도 교회안의 나무제대를 불태워 버렸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막을 연료가 없었다.
▲성 안나 교회(St. Anne's church)
▲성 안나교회(앞) 뒤에 보이는 건물은 16세기에 고딕 양식의 성 베르나딘(St. Bernadine) 교회이다.
▲성 안나 교회(Sv.Onos Baznycia)
▲성 안나 교회 내부
▲성 안나 교회 부조
▲성 안나교회 뒤 16세기에 고딕 양식의 성 베르나딘(St. Bernadine) 교회
▲성 요한 교회( St. Johne's church) (좌)
▲성 요한 교회( St. Johne's church)
▲성 요한 교회( St. Johne's church)
리투아니아에 기독교가 전파된 직후인 1387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737년 화재 이후 복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2차대전 후 소련 점령 당시부터 1991년까지 가구 창고로 사용되었으나 그해 10월부터 교회로 사용되고있다.
▲성 카시미어 교회(St. Casimir's church)
17세기에 건축된 성 카시미어 교회는 빌니우스에서 초기 바로크 건물의 본보기이다.
이 건물은 최초이며 가장 유명한 로마의 바로크식 교회를 모방하여 설계한 것이다.
▲성 카시미어 교회 돔 (St. Casimir's church)
돔(dome)이 리투아니아 귀족의 관(noble's Jogailaiciai crown)으로 장식 되어있다.
▲성카시미어 성당 전면
1604년에 예수회 수도자가 창건한 성카시미어 성당의 전면은 창건 당시에는 바로크 양식이었지만,
19세기에 네오클래식 양식의 요소를 첨가해 다시 고쳤다.
1961~1988년에는 종교와 무신론 박물관이었다
▲성 카시미어 교회 내부
▲러시아 정교회
▲성 니콜라스 러시아 정교회 (Othodox of St. Nicolas)
1340년 최초 목조교회가 세워졌으나 1514년 벽돌로 개축되었고, 18세기에 바로크로 개축되었으나 1865년 러시아화
정책으로 러시아 비잔틴 양식으로 개축하였다. 그러나 외벽과 내부장식의 세부적인 면은 고딕양식이 남아있다.
▲성 니콜라스 러시아 정교회
▲성 니콜라스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세개의 십자가 언덕
게디미나스 성채에서 맞은편에 바라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순교한 세명의 승려'를 기리는 십자가이다.
▲세개의 십자가 언덕
▲세개의 십자가 언덕
▲세개의 십자가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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