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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국가들/⊙리비아*****기행

리비아ㅡ트리폴리(Tripoli)ㅡ로마가 남기고 간 유적ㅡ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by 삼수갑산 2021. 9. 28.

트리폴리(Tripoli)ㅡ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로마유적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트리폴리는 리비아의 1900여㎞에 달하는 지중해 해변의 서쪽에 위치하며, 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관문으로 흥망을 거듭한 고대 문명의 궤적을 오늘날까지 간직하고 있다. 지중해안에 걸쳐 있는 트리폴리니아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1년 내내 온난해 지내기가 쾌적하다.

 

그러나 해안지역과 산악지역을 제외하고 리비아 대부분은 전형적인 사막 기후이다. 연중 1월이 가장 춥고, 8월이 가장 덥다. 트리폴리의 강우량은 16인치로 주로 겨울에 내리나, 내륙 사막지대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리비아 전체 인구 약 450만 명 가운데 200만 정도가 트리폴리에 거주하고 있다. 오늘날 트리폴리에는 내국인 외에도 차드, 세네갈 등 인근 아프리카 국가나, 이집트, 튀니지 등 인근 아랍 국가에서 온 노동자들이 1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트리폴리를 비롯한 리비아 전역의 고유 인종은 아랍인이 대부분이다.

 

여러 문명과 인종이 트리폴리 지역을 스쳐 갔으나, 이 지역에 이슬람의 확산과 더불어 아랍어가 전파되면서 리비아인들은 오늘날까지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북아프리카 인종인 베르베르족도 존재하나 그 비율은 7% 정도에 불과하며 주로 산악지대에서 집단 생활을 하고 있다. 트리폴리는 그리스어로 ‘세-(tri)’, ‘도시(polis)’를 의미한다.

 

이 세 도시는 현재 트리폴리 동쪽으로 125㎞ 떨어져 있는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현재 수도의 구 시가지에 위치했던 ‘오야(Oea)’, 트리폴리 서쪽으로 70㎞ 떨어진 ‘사브라타(Sabrata)’를 지칭한다.

 

오늘날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지칭했던 옛 이름 ‘오야’는 페니키아 시대에서 시작되어 643년 아랍인이 이 지역을 정복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세 도시 가운데 ‘렙티스 마그나’가 가장 큰 도시였으나 후에 역사의 중심은 ‘오야’로 옮겨갔고, ‘오야’만이 오늘날 트리폴리라는 이름을 간직하게 되었다. 트리폴리의 세 도시 사브라타, 오야, 렙티스 마그나는 페니키아 카르타고인들에 의해 무역기지로 건설되었다.

 

기원전 264년 카르타고인들은 북아프리카의 메시나를 정복하고 로마인들과의 경쟁에 들어갔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제1, 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며 각축을 벌었으나, 결국 로마인들은 기원전 204년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그곳의 마시닛(Massinissa)라 불리는 원주민 추장의 도움으로 카르타고인들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사브라타와 오야, 그리고 렙티스 마그나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 후에 비잔틴 제국이 로마 제국을 대신하게 되자, 북아프리카에서 로마 제국의 권위도 점차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페잔에 거주하는 리비아 원주민 부족들이 세 도시를 위협하자, 사브라타와 오야는 스페인에서 온 반달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비잔틴 제국이 북아프리카의 몰락을 막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643년 동쪽에서 진격해온 아랍 무슬림 군대가 이 지역을 공격하면서, 트리폴리는 아랍 무슬림 군대의 요새가 되었다.

 

그 후 1551년부터 1911년까지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18세기에는 해적의 기지로사용되어 지방 통치자들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1911년 트리폴리는 이탈리아에 의해 점령당했다. 1951년 유엔의 결정에 의해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독립하면서 트리폴리와 벵가지는 새로운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969년 무암마르 알 가다피 대령의 혁명으로 이드리스 1세 국왕이 축출되고, 트리폴리는 리비아의 유일한 수도가 되었다.

 

▲리비아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로마유적지

 

수도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133km 지점에 있는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는 북아프리카 최대의 로마 유적지다. 해안도로는 아직 완벽한 프리웨이는 아니지만 풍부한 석유자원에 힘입어 간접자본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지역에 산재한 로마 유적은 보존이 잘 돼 있으며 그 규모도 대단했다.

 

셉티미스 셀레비스의 승리의 개선문을 시발점으로 마지막 로마극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공간이 연이어 펼쳐진다. 길은 모두 돌로 포장돼 있는데 사암과 석회암이다. 기원전에 축조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호화스러움과 사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박물관의 중앙공간에서는 4층 높이의 카다피 초상화가 관객을 맞이한다.

 

이곳 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정리돼 있었다. 랩티스 마그나에는 우물물을 개발하거나 하천을 막아 그 물을 끌어들여 지하의 대형 저수지에 보관, 도시전체에 공급하는 완벽한 수도시설을 바탕으로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추어져 있고 뒤뜰에 마련된 목욕탕의 모습도 남아있다.

 

▲렙티스 마그나 

 

▲렙티스 마그나

 

▲렙티스 마그나

 

▲렙티스 마그나 로마유적

 

▲렙티스 마그나 로마유적

 

▲렙티스 마그나 로마유적

 

▲렙티스 마그나 로마유적

 

▲렙티스 마그나 로마유적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개선문

 

렙티스 마그나 출신의 로마황제인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고향방문을 기념하여

이 지역 사람들에의해 203년에 세워졌다.

아취는 카르도(남북대로) 와 디카메노스(동서대로) 교차로에 세워져있다.

 

▲셉티미스 셀레비스의 개선문 

 

 

▲셉티미스 셀레비스의 개선문 

 

▲셉티미스 셀레비스의 개선문

 

▲셉티미스 셀레비스의 개선문

 

▲셉티미스 셀레비스의 개선문

 

▲렙티스 마그나 니케 여신 

 

▲셉티미스 셀레비스의 개선문 상단 부조 (황제를 영접하는 광경)

 

▲셉티무스 세베루스

 

로마의 속주 리비아출신으로 군대에 들어가 출세하여 로마의 황제가되었다.

오늘날의 세계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여러곳에 등장하고

로마에 있는 "포로로마노" 광장에 서 있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을 비롯하여

로마제국의 옛 영토에서는 그의 기념물이 자주 발견된다.

 

▲렙티스 마그나 원형극장 

 

▲렙티스 마그나 원형극장

 

▲렙티스 마그나 원형극장

 

▲렙티스 마그나 원형극장

 

▲렙티스 마그나 원형극장

 

▲티베리우스 황제 문, 카르도 남북대로 

 

▲렙티스 마그나 메두사 

 

▲렙티스 마그나 메두사 

 

▲렙티스 마그나  로마대로 

 

▲렙티스 마그나  마차경기장 출발 문

 

▲렙티스 마그나  마차경기 트랙  

 

▲렙티스 마그나  트라얀 황제의 문

 

▲렙티스 마그나  헤라클레스 부조 

 

▲렙티스 마그나  포럼 

 

▲렙티스 마그나  하드리안 목욕탕 

 

▲렙티스 마그나 하드리안 목욕탕

 

▲렙티스 마그나  하드리안 목욕탕 

 

▲렙티스 마그나 사우나 

 

▲렙티스 마그나  하드리안 운동장 

 

▲렙티스 마그나 하드리안 운동장

 

▲렙티스 마그나  바실리카 

 

▲렙티스 마그나  세베루스 바실리카 

 

▲렙티스 마그나 세베루스 바실리카

 

▲렙티스 마그나  선박계류 부두 

 

▲렙티스 마그나 메두사 러브하우스 가는 길 안내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