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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북 대구****기행

대구 북구ㅡ산격동(山格洞)ㅡ'조선의 고갱' 이인성을 기억하는 벽화거리

by 삼수갑산 2022. 3. 13.

북구 산격동

사과나무 아래 진짜 사과나무…‘조선의 고갱’을 기억하는 벽화거리

▲이인성 화가의 자화상으로 1950년 작 모자 쓴 자화상

 

가난과 집안의 반대에도 이인성은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년이던 그가 붓을 들고 촌락의 풍경을 즐겨 그리던

대구 산격동에 지금은 화가를 기념하는 벽화거리가 생겼다.

 

16세 때 그린 수채화 ‘촌락의 풍경’으로주목받은 이인성
당시 최고 권위 조선미술전람회 일본제국전람회에 입선하며 화가의 길로

 

지금은 ‘보수의 성지’로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대구는 한때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진보적인 도시였다. 새로운 사상에 열려 있었고 문화예술의 저변도 탄탄해 문학과 음악, 미술 등 다방면에 걸쳐 유명한 작가들을 길러낸 도시다.

 

특히 ‘조선의 고갱’으로 불린 이인성은 동향인 이쾌대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손꼽히는 서양화가다. 이인성은 약관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가기 전까지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대구엔 그를 기리기 위해 고향 사람들이 발벗고 나서 만든 장소가 여럿이다. 이인성의 작품을 감상하며그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대구 여행지도를 그릴 수 있다.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을 감상하며 호젓한 산책을 즐기는 것은 덤이다.

 

이인성은 가난한 집 아들이었다. 지금의 초등학교인 수창공립보통학교를 마친 게 학력의 전부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고 화가를 꿈꿨지만 집에선 반대했다. 대구미술사를 운영하던 수채화가 서동진이 그를 거둬 가르쳤다. 16세이던 1928년 어느 여름날 이인성은아버지 몰래 대구 북구 산격동을 찾아 수채화 한 점을 그렸다.

 

제목은 ‘촌락의 풍경’. 그 그림이 그해 소파 방정환이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으로 당선됐다. 그렇게 이인성은 화가의 길에 들어섰고, 당대 최고 권위의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잇따라 입선하며 ‘천재 화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대구 산격동 이인성 사과나무거리에서 한 관광객이 그의 대표작 ‘사과나무’를 그린 벽화를 감상하고 있다.

 

◇현재 산격동엔
대표작 ‘사과나무’ 등 12점이4m 거대벽화로 재현
이천동엔 10여점이 타일벽화로1930년대 그린 ‘계산성당’ 속
감나무는 이제 고목이 되어‘이인성의 나무’로 명성
향촌동 대구문학관엔판화작품도

 

이인성이 ‘촌락의 풍경’을 그린 산격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지금은 ‘이인성 사과나무거리’가 조성돼 있다. 지은 지 3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 담벼락에 그의 작품 ‘경주 산곡에서’ ‘가을 어느 날’ ‘노란 옷을 입은 여인’ ‘카이유’ ‘해바라기’ ‘소녀’ ‘자화상’ 등 12점의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좁은 골목길을 단아한 정물화와 황토빛이 도드라지는 풍경화 등이 차례로 덮은 모습이 생뚱맞으면서도 재밌다. 압권은 그의 대표작 ‘사과나무’다. 가지에는 탐스러운 열매가 곧 떨어질 것처럼 풍성하게 매달렸다. 높이 4m에 이르는 그림 곁에는 누군가 진짜 사과나무도 한 그루 가져다 놨다.

 

채정균 이인성아트센터 대구지부장은 “산격동은 대구가 낳은 작가 이인성의 예술세계가 시작된 곳”이라며“당시 사과밭과 양계장이 근처에 많았던 걸 감안하면 사과나무 그림 역시 산격동에서 그렸을 가능성이높다”고 설명했다. 사과나무 그림의 진품은 현재 대구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벽화가 시작되는 입구 공터엔 가난과 집안 반대에 쫓기면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화가를 상징하는 조각 작품이 설치돼 있다. 사과나무거리는 화가의 기념사업을 하는 ‘이인성아트센터’와 지역 주민들이 힘을 합쳐 2015년부터 조성했다.

 

조각품이 놓인 공터는 아파트 정화조가 묻힌 자리로 원래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장소였다.지역을 빛낸 예술가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힘을 모으면서 동네 흉물이 멋진 공원으로 재탄생한 것이다.마침 동네 곳곳에는 19일 열리는 ‘이인성 사과나무거리 예술축제’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학생미술대전과 주민노래자랑, 가을 음악회 등으로 구성된 축제는 주민들 주도로 올해 처음 열리는 행사다. 대구 남구 이천동에도 이인성 벽화거리가 하나 더 있다. 지하철 3호선 건들바위역에서 나와 3분만 걸으면 주택가 담장을 따라 25m가량 이어진 벽화들이 눈에 띈다.

 

타일 형태로 벽에 옮겨진 화가의 작품 중엔 산격동에선 볼 수 없는 ‘해당화’ ‘정원’ 등 또 다른 대표작과 ‘건들바위’ 연작, ‘빨간 옷을 입은 소녀’ 등 10여점이 포함돼 있다. 그림마다 하단에 QR코드가 붙어 있어 즉석에서 스마트폰으로 작품 해설을 볼 수도 있다. 맞은편에는이인성 기념비도 서 있다.

 

하지만 벽화 크기가 그리 크지 않고 거리도 짧아 작정하고 찾은 이들은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런 이들은100m 떨어진 카페 ‘고아옥’에서 차를 한 잔 하며 보상받을 수 있다. 카페는 일제강점기 수도사업소 관사로 지은 100년 넘은 집을 개조했다. 서문시장에서 침구점을 하는 상인이 인수해 원형을 최대한 살려 복원했다.

 

마당엔 역시 수령이 100년이 훌쩍 넘은 향나무와 팽나무 등이 멋들어지게 서 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외관도 아름답지만 내부도 아기자기 잘 꾸며져 있어 차와 함께 구경거리가 쏠쏠하다

 

◇보수의 성지’ 이미지 굳어진 대구지만 100여년 전엔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리며 문학·음악·미술…
문예도시로 두각 나타내

 

이인성을 따라가는 여행의 다음 목적지는 계산동 성당(사적 290호)이다. 계산성당은 대구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붉은색과 검은색 벽돌을 섞어 올린 건물은 정갈하고 소담한 느낌을 준다. 안에 들어가면 녹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 신도가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성당 오른쪽 마당에는 ‘이인성 나무’로 불리는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인성은 1930년대에 계산성당을 그렸다. 수채화지만 이인성 특유의 진하고 선명한 색채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그 그림 가운데에 감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림 속 감나무는 한겨울인 듯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이파리 하나 없는 나목이다. 볼품없던 나무는 이제 가지를 넓게 뻗은 고목이 됐다. 잔뜩 열린 감 열매들은 잎과 부딪치며 가을바람에 서걱서걱 소리를 냈다. 나무 앞에는 이인성의 그림과 함께 ‘이인성 나무’라는 표지판도 마련돼 있다.

 

당초 화가가 그린 성당 그림은 가로·세로 길이가 50㎝도 채 안되는 작은 작품이었다. 예술가의 손길이 닿으면서 평범한 나무 한 그루는 수십년째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명소가 됐다.

 

▲계산성당의 ‘이인성 나무’(위)와 화실에서 작업하는 화가의 모습을 그린 대구 거리의 벽화.

 

향촌동에 자리 잡은 대구문학관에도 이인성의 작품이 하나 남아 있다. 대구 출신 아동문학가 윤복진이 지은 시에 역시 대구 출신 작곡가인 박태준이 음을 붙이고 이인성이 표지를 판화로 장식한 작품집 <물새발자욱>이 그것이다.

 

이주영 대구문학관 해설사는 “당시 문학과 음악, 미술을 가리지 않고 대구 예술가들이 교류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소장한 작품 중 가장 가격이 비싼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대구문학관 건물의 1~2층은 향촌문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2층은 한국전쟁 당시 전국에서 피란 온 화가와 문인 등 예술가들이 어울리던 향촌동의 다방과 술집 등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볼거리가 많다. 그중엔 이인성이 경영하며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아루스 다방’도 있다. 당시 시인들은 다방에서 종종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유럽의 문인들이 카페를 사교장소로 활용한 것과 같다. 조지훈과 구상 등 유명 시인들이 향촌동 다방에서 연 출판기념회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Kyunghyang.com / 대구=김형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