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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ㅡ미스트라스ㅡ로마의 마지막 황제…여기서 암울한 대관식이 열렸다

by 삼수갑산 2022. 5. 2.

미스트라스(Mystras)

로마의 마지막 황제…여기서 암울한 대관식이 열렸다

▲메트로폴리스는 작지만 중세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요새 도시 미스트라스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였다. 지금도 소박하지만 성스러운 옛 모습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약식으로 대관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서경석 사진작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라 부르는 나라의 역사는 기구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로마 제국의 지배를 연이어 받았다.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후계자인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분이 됐다. 이곳에 프랑스 기사들이 나타난 건 '4차 십자군 전쟁' 직후였다(1204년).

 

4차 십자군은 기나긴 십자군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악명 높은 군대였다. 이들은 베네치아와 프랑스 기사들 중심으로 구성됐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약탈했다. 성지(聖地)를 탈환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한다던 십자군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더 나아가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나눠 가졌다.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해의 주요 섬과 해상 요충지는 베네치아가 차지했다. 나머지는 라틴제국이 됐다. 새로운 제국의 영토는 십자군에 참여했던 주요 프랑스 기사들에게 분배됐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는 '아카이아 공국(Principality of Achaea)'이 들어섰다.

 

미스트라스는 이 공국의 지배자였던 빌라르두앵의 기욤이 반도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지어졌다(1249년). 성채가 가장 먼저 지어졌고, 자연스럽게 그 밑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은 점차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뻔했다. 대혼란의 시기에 미스트라스는 완벽하게 안전을 제공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는 그리스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반도의 이름이다. 고대에는 그리스 세계의 최강자인 스파르타가 자리한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전부는 아니다. 올림픽 경기의 발생지인 '올림피아(Olympia)'는 이 반도의 서북부에, 사도 바울의 전도로 유명한 '코린토스(Korinthos)'는 반도 북쪽 초입에 있다.

 

신화와 역사에 걸쳐 있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이 다스렸던 '미케네(Mycenae)'는 반도의 동북쪽에서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반도 북동 해안의 '에피다우루스(Epidaurus)'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의료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다. 그만큼 풍요로운 역사와 다채로운 유적을 자랑하는 곳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매력적인 곳을 꼽으라면 '미스트라스(Mystras)'다. 이 고대 유적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펼쳐졌던 중세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스파르타에서 고작 8㎞밖에 떨어지지 않은 타이게토스 산맥 초입의 중턱에 위치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험준한 산맥을 푸른 도화지 삼아 오렌지색과 아이보리색 점들을 곳곳에 찍어놓은 듯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들은 선명하게 아름다운 비잔티움 양식의 건물들로 변한다. 사실 외관만 감상할라치면 거기까지가 적당하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도시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렸고, 몇 개 남지 않은 건물들은 가까스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몽환적이고 신비스럽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분위기에 흠뻑 취할 수도 있겠다. 나는 후자(後者)다.

프랑크족의 성채에서 시작되다

미스트라스에서의 시간 여행은 도시 꼭대기 성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 도시의 오리진이 성채인 탓이다. 돌을 켜켜이 쌓아올려 세운 성채는 거대하고 육중하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래의 뼈대를 유지하고 있다. 타이게토스 산맥 초입의 가파른 경사면 정상에 위치한 성채!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뒤로는 깎아지른 산맥이고, 앞으로는 드넓은 평원이다. 고대 스파르타는 물론이고 그 너머로 길게 늘어선 파르논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엄한 산자락과 풍요로운 대지를 직시하고 있는 천험의 요충지가 바로 미스트라스다.

 

이 말도 안 되는 곳에 성채를 쌓고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건 빌라르두앵의 기욤(Guillaume de Villehardouin)이다. 그는 프랑스인이다. 그리스 남부의 깊숙한 곳에 프랑스인이 성채를 쌓고 도시를 만들었다? 의아하고 낯설지만 사실이다.

 

▲미스트라스의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판타나사(Pantanassa) 수도원. 이곳에 존재했던 여러 수도원 중

아직까지 수사들이 살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송동훈

 

작지만 번영하는 국제도시가 되다

비록 프랑스 지배자들의 요새로 시작됐지만, 미스트라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로 번성했다. 4차 십자군이 세운 라틴 제국이 무너지고 비잔티움 제국이 다시 들어설 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미스트라스의 주인도 바뀌었다.

 

1348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Johannes Cantacuzene, 재위 1347~1354년)가 이 땅에 '모레아 전제국(Despotate of the Morea)'을 새롭게 세우고, 자신의 아들 마누엘(Manuel)을 전제군주로 임명했다.

 

미스트라스는 이 전제국의 수도가 됐다. 마누엘은 1380년까지 장기 집권하며 안정적으로 나라를 운영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좋은 정치는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도시는 계속 확장됐다.

 

전제군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궁전, 비잔티움 제국의 근간인 정교회의 교회와 수도원들이 연이어 들어섰다. 직물업에 종사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됐고, 제노바·베네치아·피렌체·에스파냐 상인들이 활발하게 오갔다.

 

비좁고 불편했지만 선정(善政)과 난공불락의 요새가 제공하는 안전은 미스트라스의 번영과 발전의 토대가 됐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비잔티움 제국 전체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자 안전한 피난처로서 미스트라스의 위상은 더욱 올라갔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인 게미스토스 플레톤(Gemistos Plethon, 1355~1452년)을 비롯한 학자들도 몰려와 도시의 명성을 높였다.

 

▶로마 황제의 마지막 대관식이 열리다

 

미스트라스의 번영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비잔티움 제국 자체의 생명력이 소멸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십자군을 몰아내고 제국을 되찾았으나, 비잔티움 제국은 베네치아에 빼앗긴 에게해의 요충지들과 제해권은 끝끝내 되찾아오지 못했다. 고질적인 내분과 종교투쟁도 계속됐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성장과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나라를 지킬 힘도 의지도 없는 제국의 운명은 참담했다. 서유럽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제국과 사회, 문명의 근간인 그리스 정교회까지 포기하려 했지만 이 같은 결정은 더 큰 분열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이때 황제 요한네스 8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죽었다(1448년).

 

후계자는 황제의 동생인 모레아 전제국의 군주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미스트라스에서 약식으로 황제로 선포됐다(1449년 1월 6일). 미스트라스에는 대관식을 집전할 총대주교가 없었기 때문에 이는 그저 민간 행사에 불과했다.

 

정식 대관식은 하기아 소피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상황은 황제의 대관식조차 허용치 않을 정도로 절박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죽는 순간까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다.

그가 황제로 선포됐던 곳이 여전히 미스트라스에 남아 있다.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 불리는 데메트리우스(Demetrius) 성인을 기리는 교회다. 전체적으로 밝은 적갈색을 띠는데 작지만 위엄 있고 정갈하다. 안은 좁지만 성스럽다. 수백 년 세월을 머금은 퇴색된 프레스코화가 이 건물의 가치를 크기로 평가하지 말라 속삭인다.

 

교회 가운데 바닥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상징하는 쌍두 독수리가 새겨진 석판이 놓여 있다. 바로 이곳이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자신이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황제가 됐음을 하나님께 고한 장소. 그 순간, 황제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기쁨과 영광도 아닌 두려움과 비애였을 것이다.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제국의 황제란 자리는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뜻하니까.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원망도 했을 것이다. 궁금하다. 그 순간 황제는 누구를 가장 원망했을까? 흥망성쇠는 그 누구도, 어떤 공동체도 피할 수 없는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역사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는 법이다. 누군가는 결과에 가장 크게 책임져야 한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누구를 가장 원망하게 될까? 미스트라스를 떠날 때면 항상 이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에 50일만에 성 무너지자…
황제는 칼 움켜쥐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미스트라스에서 민간 의식을 통해 황제로 선포된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us XI·재위 1449~1453)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정확하게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위대한 타이틀의 마지막 주인이었다.

 

▲미스트라스로 올라가는 진입로 초입에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상. /서경석 사진작가

 

그에게는 공포와 절망으로 점철된 짧은 재위 기간만이 주어졌다. 그가 즉위하고 난 2년 후에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새로운 술탄에 오른 메흐메드 2세(Mehmed II·1432~1481)가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1453년 4월 초 양측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두고 전쟁을 시작했고, 50일 넘게 격돌했다

 

최후의 공격은 5월 29일 한밤중에 시작됐다. 황제는 성벽에서 수비대와 함께 싸웠다. 성벽이 무너졌을 때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칼을 움켜쥐고 밀려드는 투르크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를 기리는 동상은 미스트라스로 올라가는 진입로 초입에 서 있다.

출처 / chosun.com / 미스트라스 송동훈=문명탐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