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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서울 일원****기행

서울 일원ㅡ북으로 간 화가.이쾌대ㅡ좌파·우파에게 이용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진 천재화가

by 삼수갑산 2022. 4. 27.

북으로 간 화가.역사에서 사라진 천재화가 이쾌대(李快大)

▲이쾌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 /개인소장

 

비운의 천재 화가 이쾌대 화백

 

이쾌대= 1913년 경북 칠곡 출생.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광복 후 ‘군상-해방고지’(1948)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충격을 줬다.

 

홍익대 강사,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화가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6·25 발발 후 북한의 선전미술 제작에 가담하고 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월북, 65년 위천공으로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다. 87년 자강도에서 숨졌다는 설도 있다

 

카드놀이를 하던 저 젊은 부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932년 휘문고보 졸업반 이쾌대(당시 19세)는 진명여고 졸업생 유갑봉과 결혼했다.이쾌대(1913∼65)는 이듬해 도쿄 제국미술학교로 유학가 신접살림을 차렸다카드놀이 하는 부부’는 이 시절 그림이다

 

졸업하던 1938년 일본의 유명 미술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 입선하며 화가로 데뷔했다.귀국해 서울 돈암동에 성북회화연구소를 개소, 작품을 제작하며 후진을 양성했다.광복 후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를 안고 여러 미술단체에서 동분서주했다.

 

6·25가 나자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의 부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고,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 김일성·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 부역을 했다9월 서울 수복 후 국군에게 체포돼 부산을 거쳐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 군상

 

해방 직후 한반도의 공기를 담은 작품 '군상1-해방고지'(1948) /개인소장

 

▲군상1-해방고지

 

해방 직후 한반도의 공기를 담은 작품 '군상1-해방고지'(1948) /개인소장

 

광복 이후 우익·좌익 세력은 권력을 잡으려고 치열히 싸웠다. 한반도는 이념의 전쟁터가 됐고, 끝내 남한과 북한으로 쪼개졌다. 국민 대다수는 남한과 북한 중 어느 곳에서 살지 선택하지 않았다. 서울, 부산, 평양, 개성에서 살고 있었을 뿐인데 전쟁을 겪었고, 분단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소수는 자신의 의지로 남한과 북한을 선택했다. 사회주의를 동경한 젊은 예술가 상당수는 북쪽을 택했다. 6·25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월북'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금기였다.

 

반공을 시대정신으로 삼은 엄혹한 정권하에서 북쪽에 있는 시인의 시를 읊었다가는 고초를 치를 수도 있었다. 북쪽으로 넘어간 예술가들 이름은 대부분 잊혔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지용 시인은 한때 월북 작가로 분류돼 이름도 거론할 수 없었다.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백석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이 금기들이 해제된 건 1988년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월북 예술가 작품에 대해 해금 조치를 내렸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광복 직후 활동했던 예술가들이 대거 부활했다.

그들 중엔 화가 이쾌대도 있었다. 이쾌대 작품 수십 점이 공개됐다. 그림 주제는 대부분 인물화였다. 저고리를 입은 여인부터 부랑자를 그린 그림까지 있었다. 모두 조선의 얼굴들이었다. 자화상도 여럿 있었다. 사람들은 이쾌대 그림 앞에서 생경함을 느꼈다.

 

그의 인물화들은 모나리자나 고흐 자화상을 떠올리게 할 만큼 서양화 분위기를 풍기는데,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향토적인 느낌도 짙다. 묘한 조화다.

 

그림과 함께 화가의 삶도 알려졌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광복과 전쟁을 겪은 세대답게 이쾌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파도가 많은 인생의 끝은 대부분 슬픔으로 끝난다. 이쾌대의 인생도 그랬다.

 

▲무희의 휴식 1937, 캔버스에 유채, 116.7x91cm, 개인소장

 

▲부녀도

 

▲봄처녀

 

▲운명

 

일본 유학시절에 그린 '운명'(1938). 이 그림으로 일본 유명 전람회에서 입선했다. /개인소장

 

상황

 

▲부인도

 

▲부인도1

 

▲자화상

 

▲카드놀이하는 부부

 

아껴 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내 맘은 지금 안방에 우리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수용소에서 부인에게 이 같은 편지를 보냈던 그는 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을 택했다“친형인 이여성의 월북 등으로 남한서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 우려했고, 분단이 고착화 될 것을 예상치 못한 듯하다”고 국립현대미술관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설명했다.

 

61년 이여성 숙청 후 북한에서 이쾌대에 대한 기록도 사라졌다. 남한서도 그는 금지된 이름이었다.월북작가의 가족이어서 고초를 겪었던 부인 유씨는 패물을 팔아 네 아이를 길렀다.

 

남편의 그림은 신설동 한옥 다락에 숨겨 지켰다. 유씨는 80년 세상을 떴고, 88년 월북화가들이 해금됐다. 이쾌대가 체포되기 한 달 전 태어났던 막내아들 한우씨는 작품을 수리복원해,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대거 공개했다.

 

이쾌대는 그렇게 90년대 한국 미술계에 벼락 같이 등장했다사랑·전통·시대 등 세 개의 키워드를 내세워 연대기적으로 구성했다. 17세 때 그린 수채화 ‘정물’(1929)부터 제국미술학교 졸업작품인 ‘무희의 휴식’(1937)까지 행복했던 수업기의 작품,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에 골몰한 1944년까지의 작업, 화가로서의 소명의식으로 민족미술을 꿈꿨던 광복 후의 ‘군상’과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손수 그려 묶은 교재 『미술해부학』등이다이쾌대는 한국 화단에서 비밀스럽게 기억된 이름이었다.

 

▲이쾌대

 

◆나의 그림을 팔아 아이들을 먹이시오."

이쾌대는 인물화를 그렸고, 그중 상당수는 여성이다. 대부분 아내 유갑봉을 모델로 그렸다. 아내를 향한 이쾌대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내를 아끼고 아껴 말을 놓지도 않았다.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흰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쾌대는 자신도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을까 걱정해 그림을 팔라고 했다.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뒤로하고 이쾌대가 월북한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가늠할 수는 있다. 그의 형 이여성은 이미 월북해서 북한 정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쾌대도 어찌 됐든 전쟁 중 북한 정권 찬양 그림을 그렸다.

 

이쾌대가 남한을 선택하면 '빨갱이'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다. 물리적인 테러를 당할 위험도 컸다. 또한 그는 분단은 잠깐이며, 곧 가족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월북 이후 이쾌대 삶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다.

 

다만 평탄치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형 이여성은 김일성 세력에게 숙청당했다. 이쾌대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마음을 안고 살다가 떠났을 것이다.

유갑봉은 남편의 부탁을 무시했다. 이쾌대가 그림을 팔아 생계에 보태라고 했지만, 그는 남편의 작품을 소중히 간직했다. '월북 화가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견디면서도 남편이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했다. 악착같이 포목점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살렸다.

 

군사정권은 월북 작가의 아내라는 이유로 툭하면 유갑봉을 소환해 괴롭혔다. 1980년 유갑봉은 남편과 재회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이후 이쾌대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간직한 아버지의 그림 수십 점을 공개했다. 무언가를 바꿔 보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화가의 그림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쓰라린 삶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