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ㅡ가을의 길목ㅡ비움 으로 다시 채우는 맑은 땅.
▲지룡산 기암 아래 들어선 암자 북대암에 올라 내려다본 운문사의 모습. 거대한 산자락 아래 아늑한 자리에 운문사가 들어서 있다. 북대암의 스님은 암자에서 운문사를 바라보는 경관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오후 4시쯤’이라고 했다. 북대암은 운문사에 딸린 암자지만, 내력은 운문사보다 더 오래됐다. 신라의 신승(神僧)이 북대암에서 자리를 보고 나서 운문사를 앉혔다고 전해진다.
땅이 품고 있는 맑은 기운은 이름 때문일까요. 경북 청도(淸道)는 이름 그대로 ‘맑은(淸) 땅’입니다. 식수로 쓰는 운문호와 은어가 산다는 동창천의 물도 맑지만, 물길을 끼고 들어선 옛 정자와 고택에 깃든 선비의 정신도 맑습니다.
청도는 가을볕 아래서 뒷짐 진 채 서두를 것 없이 느긋하게 소요하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낯선 명승지 공암풍벽(孔巖楓壁)에서 시작해 정갈한 절집 운문사를 들러 서원과 고택을 지나 ‘새마을운동’까지 길을 이어붙이면서 빼어난 경관을, 때로는 차곡차곡 접힌 이야기를 따라가 봤습니다.
# 청도의 숨은 명소…공암풍벽
경북 청도의 지명에서 무엇부터 떠올리시는지. 소싸움, 와인 터널, 반시(감), 추어탕…. 모르긴 해도 가장 많은 이들이 꼽는 게 ‘운문사’이리라. 어디 하나 허투루 다듬어진 데 없는 절집 운문사야말로 청도를 대표한다.
하지만 운문사 얘기는 잠깐 미뤄두고 청도의 공암풍벽 얘기부터 시작하자. 명성으로 보자면 운문사에 댈 게 아니지만 은둔했던 선비들이 드나들었던, 아는 이들이 거의 없는 숨은 명소의 정취를 먼저 알리고 싶은 까닭이다.
공암풍벽은 산과 물이 태극을 이루는 운문호 상류의 공암리에 있다. 공암풍벽에서 공암이란 ‘구멍바위’를 일컫는 얘기고,풍벽은 ‘단풍나무가 벽을 이룬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운문호 한가운데 병풍 같은 석벽이자 그 자체로 자그마한 산을 이르는 이름이다. 풍벽을 두고 여름에는 창벽(蒼壁·푸른 벽)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공암풍벽까지는 운문호반의 공암리 마을에서 근래 나무 덱으로 조성한 트레킹 코스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길은 호반을 지나 석벽 사이로 이어지는데, 들머리쯤의 석벽에는 누군가 새겨놓은 풍호대(風乎臺)의 글씨가 뚜렷하다.
지금이야 아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풍벽은 과거 전국의 명승을 두루 찾아다니던 옛 선비들이 자신의 이름과 시 구절을 앞다퉈 적어두었을 정도로 이름난 명소였다. 석벽마다 풍류를 드러내는 글씨가 빼곡하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청도를 대표하는 선비 삼족당 김대유도 이곳에 ‘곡천대’란 정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공암풍벽은 독특한 지형과 병풍처럼 일어선 바위도 볼만 하지만, 풍벽 능선에 올라 바라보는 운문호 상류 물길의 모습도 독특하다. 경북 일대에 워낙 가뭄이 심해서 운문호 상류인 풍벽 아래는 그득한 물 대신 초지가 펼쳐지고 그 초지 사이로 가늘고 푸른 물길이 이어져 있는 데, 그 경관이 자못 이국적이다.
운문호의 수위가 올라 일대가 물에 잠기고 나면 공암풍벽은 수반에 올린 수석처럼 더 운치 있는 모습이리라. 풍벽이 보여주는 모습에 비하면 정작 ‘공암’이란 이름을 만든 정상의 바위 구멍은 실망스럽게도 시시하기 이를 데 없다.
▲운문호의 물길을 끼고 병풍같이 일어선 석벽인 ‘공암풍벽’으로 가는 길.
나무 덱을 지난 길이 바위와 바위 사이로 이어지면서 야트막한 능선을 딛고 간다.
공암풍벽은 옛 선비들이 찾아 바위 벽에다 이름과 시를 새기고 풍류를 읊던 명승이었다.
# 운문사…비워놓아 정갈한 절집
이제 미뤄놓은 운문사 산문을 들어선다. 운문사에서는 너른 마당에 그려진 빗질 자국부터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이 지나간 자리가 느껴진다.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절집인 운문사는 화려하다기보다는 정갈한 쪽에 가깝다. 운문사는 들머리의 우람한 솔숲도, 웅장한 대웅보전도, 사방을 트인 공간을 두고 있는 만세루도 죄다 큼직큼직하다.
처마와 처마를 맞댄 전각들도 당당한데, 이렇게 크고 장대한 건축에서 위압감보다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건, 절집을 화려함으로 치장하는 대신 정갈함으로 다듬어냈기 때문이다. 거대한 절집은 칠하고 채우는 대신, 지우고 비워놓는데 더 애를 썼다.
운문사에 갔다면 절집 동북쪽의 지룡산(666m)의 암봉 아래 들어선 암자 북대암을 꼭 올라봐야 한다. 운문사에 닿기 전에왼쪽 샛길로 빠져 거칠고 가파른 시멘트포장 도로를 차로 오르면 거기 북대암이 있다.
차로 거의 정상까지 오를 수 있지만, 사륜구동차량이라면 모를까, 승용차로는 언감생심이다. 중턱쯤에 차를 세우고 북대암에 오르면 그곳에서 운문사와 운문사를 발치에 품은 일대의 경관을 다 내려다볼 수 있다. 북대암에서 보면 운문사가 연꽃의 꽃술 자리에 앉아있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사실 운문사 창건의 시작이 여기 북대암이었다. 신라 때 영험한 스님이 홀연히 나타나서 여기 북대암 자리에 암자를 짓고 3년 답사와 7년 공사 끝에 중앙에 지금의 운문사인 대작갑사를 짓고, 사방에 하나씩 네 곳의 절을 더 지었다고 전한다. 이런 얘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건 북대암에 올라서서 보면 지금의 운문사 자리가 명당임을 누구나 대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에서 북대암보다 더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암자가 바로 사리암이다. 운문사 주차장에서 차로 사뭇 더 들어가면 사리암 주차장이 나오는데, 사리암은 여기서 갈지(之)자로 이어지는 산길을 30분 걸어 올라야 한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가파른 길을 따라 신도들이 줄을 지어 오르는 건 사리암에 올라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만큼은 들어준다는 속설 때문이다. 주말마다 포항에서 이곳 사리암까지 직행버스가 운행되고 있는 걸 보면, 사리암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간다.
사리암은 한국불교에서만 숭상하는 ‘나반존자’를 모신 기도처다. 나반존자는 홀로 이치를 깨우친 도를 이룬 성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륵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운 이다. 나반존자는 법당 관음전 바깥 계단 위의 천태전에 봉안됐는데 법당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이 암자 마당에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와 함께 절을 올렸다.
# 청도에서 만나는 두 명의 선비
청도에 간다면 꼭 기억해둘 인물이 김대유와 박하담이다. 청도에서 만나는 정자와 고택, 혹은 서원에는 동시대를 산 동갑내기인 이 둘의 이름이 스며들어 있다.
높은 벼슬을 지낸 것도 아니고, 역사에 큰 획을 그을만한 업적도 없지만, 고향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길러내며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던 이들을 청도 사람들은 오래 기억하고 있다. 김대유가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에도, 박하담이 심었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에도 이들에 대한 기억과 존경이 담겨 있다.
먼저 삼족당 김대유부터. 그는 과거 합격 후에도 벼슬에 나서지 않다가 훈구파와 사림파가 치열하게 당쟁을 벌이던 시절, 개혁을 앞세운 사림파의 추천을 받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지역의 신진세력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림파의 거두이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실각하면서 그도 삭탈관직이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동창천의 물길 옆 언덕에 정자 ‘삼족대’를 짓고 은거하면서 동갑인 박하담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청도에는 김대유가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아마도 그의 호탕한 성품에 대한 경외감이 깃들어 있는 이야기이리라.
소요당 박하담 역시 젊은 시절 과거에 잇따라 급제했음에도 늙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벼슬자리를 포기했다. 훗날 그의 학행을 알아본 이들에 의해 몇 번이고 벼슬자리에 천거됐지만,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나이 마흔 줄에 접어들어 동창천변에 정자 소요당을 짓고 독서와 풍류로 평생을 보냈다.
청도의 그윽한 풍류는 동창천에 있다. 동창천 변에는 암벽 위 솔밭 사이에 들어서 물을 굽어보고 있는 김대유의 정자 삼족대가 있고, 삼족대 건너편에는 김대유와 박하담을 함께 모신 선암서원이 있다.
선암서원은 건물의 배치며 건물의 미감이 여느 서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살림집과 절충식으로 지어져 서원이 아니라 운치 있는 별서의 느낌마저 준다. 서원 담장 밖으로 나와 물가로 내려서면 용두소가 있다.
용머리 형상의 바위 아래 물굽이를 이룬 곳이다. 용두소 건너편에는 뚝뫼라 불리는 봉긋한 언덕 위 솔숲이 있다. 청량한 솔숲도 솔숲이지만 물가에 배롱나무 붉은 꽃을 치마처럼 두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곳이다.
선암서원이 들어선 신지리 일대는 별서 만화정을 비롯해 운강고택, 섬암고택, 운남고택, 도일고택, 명중고택 등 옛집들이 몰려 있다. 박하담의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모여 살면서 지어 올린 수백 년 묵은 집들이다.
이 중 박하담이 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던 자리에 세웠다는 여든여덟 칸 운강고택의 풍모가 가장 당당하다. 운강고택은 6·25전쟁 당시 청도를 방문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루 묵어가기도 했단다.
박하담의 호는 소요당. 선암서원 밖 천변 일대를 일러 ‘소요대’라고 부른다. 도(道)와 함께 소요(逍遙)하며 노니는(遊) 것이 장자가 말하는 ‘최고의 경지’. 벼슬하라 불러도 나아가지 않거나 사화로 물러나서 평생을 고향에서 은거했던 두 선비는 과연 그런 경지에 닿았던 것일까. 그런 생각 속에서 신지리의 서원과 정자, 고택의 골목을 느긋하게 걷는다.
▲이른 아침 운문호가 짙은 물안개로 뒤덮였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일교차가 커져 운문호의 안개는 더욱 짙어진다.
운문호는 호수 전체는 물론이고 상류 계곡들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출입이 통제돼 물이 맑다
# 새마을운동 발상지가 두 곳인 까닭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긴 관광지가 여러 곳 있다. 관람객 격감의 순위를 매긴다면 경북 청도의 ‘새마을운동 발상지 공원’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공원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이즈음은 주차장이 아예 텅 비다시피 했다. 2년 전쯤 큰돈을 들여 마을 뒤편의 테마파크에 세워놓은 전시장도, 숙박시설도 모두 파리만 날리고 있다.
그 자체로 의미 깊게 기려도 좋을 새마을운동은 정권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정권 교체기 사회 분위기에 따라 관광객이 몰려들기도 했고,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건 새마을운동을 기념한다면서 주민이 아니라 통치자에게 조명을 맞추고 있어서가 아닐까.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던 시골 마을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협동과 울력으로 펼쳤던 잘살기 운동을 조명하기보다는,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상과 친필을 새기거나 대통령 전용열차를 복원하고 ‘통치자의 결단’을 칭송하는 방식으로 새마을운동을 기리고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청도에 새마을운동 발상지 공원이 있을까. 그건 청도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진짜 새마을운동 발상지냐를 놓고 포항과 갈등을 빚었고 다툼 끝에 법정까지 가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만 보면 발상지 원조 논쟁의 결과는 청도의 ‘우세승’쯤 된다.
청도가 화양읍 신도 1리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들어보자. 1969년 8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남지역 수해복구현장 시찰을 위해 대통령 전용열차를 타고 신도리 앞을 지나다 주민들이 스스로 지붕과 담장을 개량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열차 후진을 지시하고 잘 가꿔진 마을을 살펴보면서 박 전 대통령은 주민들의 노력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4월 열린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은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리면서 청도의 신도리를 예로 들었다. 새마을운동의 태동이었다.
그렇다면 포항이 새마을운동 발상지란 다른 주장은 왜 나온 것일까. 지금부터는 포항 측의 설명. 1971년 9월 박 전 대통령이 전국 시장·군수 비교행정회의를 열었다. 박 전 대통령은 회의 후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를 시찰한 자리에서 ‘전국 시장·군수는 문성리처럼 지도해 새마을정신 주입에 점화 역할을 하라’고 지시했다.
간추리면 청도는 새마을운동을 ‘처음 구상한 곳’이란 얘기고, 문성리는 ‘처음 운동이 일어난 곳’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중 어느 곳을 즉 원조라고 할 수 있을까.
# 청도 땅에서 만나는 지나온 시간
청도와 포항의 원조 논쟁은 경북도가 ‘경북 새마을운동 97년사’를 발간하면서 본격화됐다. 갈등을 빚다가 급기야 포항의 시의원과 새마을 관련 단체가 청도군이 ‘새마을운동발상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달라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기에 이르렀다. 재판부의 결론은 기각. 발상지 논란이 ‘법률상 권리관계 분쟁’이 아니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서 법으로 어디가 ‘원조’인지를 손을 들어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청도와 포항은 저마다 새마을운동 발상지를 주장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청도가 먼저 2009년 4월 신도리에 62억 원을 들인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을 지었고, 이에 질세라 5개월 뒤에 포항 문성리도 42억 원 규모의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을 완공했다. 원조 타령을 하는 음식점도 아니고,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이 두 곳인 이유가 이렇다.
성역화 사업을 통해 더 많은 투자를 한 쪽은 청도다. 청도의 기념관은 2011년 8월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을 거쳐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15년에는 마을 뒤쪽에 제법 넓은 규모의 테마파크까지 들어섰다.
테마파크에는 어려웠던 시절 새마을운동 모습을 세트장과 인형으로 재현한 ‘잘살아보세’관, 조개탄 난로가 있던 1970년대 교실 풍경을 재현한 ‘교육체험 학습장’을 비롯해 초가집, 슬레이트집, 기와집, 구판장, 왕대포집,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워낙 손님이 없어서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없지만 호젓한 테마파크를 산책 삼아 찬찬히 둘러보는 재미는 있다.
사실 청도에서 누추했던 시절의 모습을 찾겠다면 새마을운동을 기리는 기념관이나 테마파크, 혹은 공원보다 수십 년 전에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소읍의 골목을 찾아가는 게 낫다.
시조시인 이호우·이영도 남매의 생가가 있는 청도읍 유호리가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유호리는 한때 극장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해서 마치 1970년대 거리를 재현해놓은 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줄잡아 90년쯤 됐다는 낡은 방앗간 영신정미소에서는 아직도 방앗간 목조 피대가 돌아가고 있다.
이른바 ‘최신식 자동 미곡처리 시스템’을 갖춘 시설이 인근에 있지만 대량 도정만 받는데, 영신정미소는 나락 한두 섬을 받아도 기계를 돌린다. 도정 비용은 현물로 받는다. 80㎏을 탈곡하면 두 되 반의 쌀을 도정료로 챙긴다. 이곳이야말로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현물로 거래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리라.
가는 길 = 상주∼영천 고속도로 신녕 IC로 나와 28번 국도 포항·영천방면으로 향한다. 영천을 지나 금호읍 교대사거리에서 좌회전, 909번 지방도로에 올라선다. 대창삼거리에서 자인·진량 방면으로 우회전해 길을 따라가면 운문호반을 끼고 달리는 28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공암풍벽이 있는 공암리가 나오고, 우회전해 호반길을 따라가면
운문사로 이어진다.
청도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 꼽히는 곳이 와인 터널과 코미디 타운이다. 와인 동굴에서 눈길을 끈 건 왕관 모양의 조형물. 2013년 2월 25일 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감와인으로 건배를 했다는데, 그걸 기념하기 위해 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대통령 탄생을 기다리며 감와인을 빚어 10년 이상 숙성하며 준비해왔다’는 대목이 민망하다. 코미디 타운은 코미디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 프로그램을 갖춘 전시장 겸 체험장이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청도에서는 마땅한 숙소를 찾기 어렵다. 용암온천관광호텔(054-371-5500)을 빼면 모텔과 여관이 대부분이다. 이웃한 대구나 경산 쪽에 숙소를 정해놓는 것이 더 낫겠다. 동창천의 맑은 물 때문인지 청도에는 민물고기 요리를 내놓는 식당이 유독 많다.
청도의 이름난 먹을거리 중의 하나도 추어탕이다. 청도역을 중심으로 양쪽 길가에 추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다. 민물매운탕 맛집으로는 청도읍의 원동매운탕(054-372-3737)이나 운문면의 대천횟집(054-372-9388),매전의 버들식당(054-372-5436), 달목식당(054-372-5241) 등이 이름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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