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聖地ㅡ수리산 성지(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묘.고택성당)
▲수리산성지 성당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씨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배교의 죄를 지을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찾아가는 길
▲성지가는 초입 길
안양 수리산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 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곳으로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 수리산 속에 있었던 '뒷듬이' 마을은 푸른 소나무 숲 속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담배밭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작은 마을이었지만,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오랫동안 교우촌으로 이어져왔다.
천주교도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담배촌이라 칭하게 되었다.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성지 성당
▲성지 성당
▲바네의 성모 상
▲이성례의 집, (최경환 성인의 부인)
▲이성례의 집, (최경환 성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의 집 성모상
▲예수성심상
▲수리산 성지순례자 성당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李聖禮)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이정표
▲성지 안내도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성 최경환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 나라의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 (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 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는 말하기를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 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9월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1925년에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 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수리산성지 표지석
▲최프란치스코, 이성례마리아
▲나베드로탁덕 대주교
▲범라우렌시오 주교
▲사향가
▲이에메렌시아
▲류베드로
▲유바오로
▲유안드레아
▲유요셉
▲묘소 오르는 길
▲묘소 오르는 길
▲성인 묘소 오르는 길
▲야외 미사 뜰
▲야외 제대
▲최경환 성인 묘
▲최경환 성인 묘
▲최경환 성인 묘
▲최경환 성인 묘
▲최경환 성인 묘
▲최경환 성인 묘
▲성 최경환 묘비
▲성 최경환 묘비 옆면, 성인의 아들 최양업 순교자
▲성 최경환 묘비 옆면, 성인의 부인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0-1840)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며 최양업(토마) 신부님의 어머니이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 아들을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옥에 갇힌 다섯 아들은 희정(羲鼎 당시 15세) 선정(善鼎 당시 12세) 우정(禹鼎 당시 9세) 신정(信鼎 당시 6세) 그리고 젖먹이였던 세 살짜리였다. 한데 갇힌 최씨 일가의 비극은 그때부터 절정으로 치달았다.
우선 굶주림이 닥쳐왔다. 이들 어린이를 옥에 가두긴 했어도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밥 한덩이가 나오면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른들은 굶었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어머니의 빈 젖을 빨다가 첫 옥사자가 되었다.
젖먹이가 죽자 어머니 이성례는 실성을 했다. 그대로 가다가는 아이들을 모두 굶겨 죽이겠다는 모성애에서였을 것이다.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말하고 네 아들을 데리고 풀려 나왔다.
이때부터 어린아이들은 서울의 골몰골목을 누비며 걸식을 다녔다. 어느 집에서나 이들을 불쌍히 여겼으나 배교를 아는 교우들은 밥을 주지 않았다.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이성례는 아이들을 동냥 보낸 사이 남편 곁으로 돌아갔다.
다시 갇힌 몸이 된 것이다. 그러자 15세부터 6세까지의 4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을 찾아왔다. 그들 어린 형제들은 창살을 붙들고 어머니를 목메어 불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또 한번의 배교를 겁냈다. 돌아앉아 어린 아이들이 울며 부르짖는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등을 보인 채 미동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 그래도 일찍 철이 난 15살짜리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이라고 생각되자 울부짖는 어린 동생들을 달래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하여 4형제 거지는 다시 장안의 떠돌이가 되었다.
이제는 어느 집을 가도 쌀과 음식을 한아름씩 안겨주었다. 이들 4형제는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사식으로 넣었다. 한번은 어느 부자집에서 먹으라고 준 인절미를 가슴에 품고 옥리를 찾아가 얼마를 떼어준 후 사식을 넣는데 성공했다.
그 인절미에는 어린 아들의 손가락 자국이 아들의 체온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 인절미를 메이는 목으로 어떻게 넘겼을 것이랴. 이 눈물겨운 정경이야말로 백육십년이 넘은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뜨거운 감동을 준다.
최경환의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 지금의 서울 용산구 신계동 언덕에서 참수 치명한 날은 음력 1839년 12월 27일(양력 1840년 1월 31일)이었다.
15살 난 둘째 아들 희정은 가끔 옥사장에게 사정하여 푼푼이 모은 돈을 신바닥에 숨겼다가 어머니에게 갖다주곤 하였다. 이성례는 아들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각별한 사랑으로 보호하고 친척집에 각각 데려다 주고 지내자면
중국 마카오에 가 있는 너희 형이 나와 자연히 안배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며칠 동안은 오지 말라고 일렀다. 치명하는 날에 아들을 보면 미진한 육정에 끌릴까 보아서였다. 희정은 어머니가 오지 말라는 뜻을 알고 가슴이 막히고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나이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메고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희광이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 하며 가지고 온 돈 몇 닢과 쌀자루를 통째 내밀었다. 4형제의 눈물겨운 '청탁'은 희광이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달빛에 비춰 보았고 이튿날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날 구경꾼들은 더 못 나가게 막아 놓은 삼줄을 헤치고 앞으로 나와 어머니 이성례가 단칼에 치명하고 희광이들이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해온다.
당시 장안에서의 순교자들은 모두 시구문으로 불렸던 광희문 밖에 내버렸다고 하는데 그날 하루만도 당고개 아래로는 너무 많은 시신이 굴러떨어져 시구문 밖에 문자 그대로 시산(屍山)을 이루어 어린 형제들은 어머니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다만 옥리들의 배려로 아버지 최경환의 시신은 친척들이 거두어 그들 가족이 마지막 살던 수리산에 안장하였다.
▲성모동산
▲최경환 성인 고택
▲최경환 성인 고택
▲최경환 성인 고택
▲최경환 성인 고택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성화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내부
▲최경환 성인 고택 기념성당
▲성모 상
▲최경환 성인 고택 앞 쉼터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5 처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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