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ㅡ정선.태백
비온 뒤 더 생생해진 원시림…지친 심신을 쓰다듬는다
▲초록의 바다를 이룬 대덕산 정상 능선. 초지와 숲이 뒤섞여 있어 정원처럼 보인다. 두문동재에서 검룡소까지
이어지는 트레킹 구간 중에서 시야가 가장 시원하게 트이는 구간이다.
강원 정선군의 남동쪽, 그러니까 정선의 고한, 사북 일대와 백두대간 너머 태백 일원에는 여러 개 지층이 차곡차곡 겹쳐 있습니다. 우선 때 묻지 않은 ‘첩첩산중의 자연’이라는 지층이 있고, 그 위로 한때 뜨겁게 달아올랐던 고된 노동의 탄광 도시 지층이 있으며, 폐광으로 쇠락한 뒤 탄광촌의 차갑고 쓸쓸했던 지층이 있습니다.
이런 기억 위로 카지노와 리조트라는 욕망과 휴식의 여가 공간 지층이 뒤덮인 지도 벌써 23년이 됐군요. 한 공간이 지닌 여러 겹의 지층은, 다양한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여행이란, 땅이 새겨 놓은 시간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곳으로 떠나는 여행자들은, 다양한 선택지를 받아 들게 됩니다.
손대지 않은 백두대간의 짙은 숲에 들어가 자연을 즐길 수도 있고, 리조트에서 쾌적한 휴식을 경험할 수 있으며, 쇠락한 탄광 마을에서 오래된 기억을 따라가는 여정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의 여정으로 다양한 여행을 꾸릴 수 있는, 정선과 태백으로 떠난 여행 이야기입니다.
# 꽃이 없어 알게 된 아름다운 숲
‘천상의 화원’이라 불러도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곳이 우리나라에서 딱 두 곳 있다. 화원(花園)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곳이다.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 곰배령과 태백산국립공원에 속한 태백과 정선에 걸친 금대봉과 대덕산 일대다. 서로 다른 매력이 있긴 하지만 둘 중 한 곳을 택하라면, 망설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두말할 것 없이 금대봉과 대덕산이다.
꽃도 꽃이지만, 금대봉 구간에는 축축하고 깊은 원시림이 있기 때문이다. 깊은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와 편안한 숲길이 주는 위안은, 도회지 생활에서 다치거나 지친 몸과 마음을 단번에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 효능이 강력하다. 숲은 몸과 마음을 다 쓰다듬는다. 물리적 치유와 심리적 치유를 겸한다는 얘기다.
금대봉과 대덕산에는 지금 꽃이 없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꽃이 있긴 있다. 그것도 여느 산보다 많다고 느낄 정도는 된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 금대봉이나 대덕산에 ‘꽃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능선을 따라 진짜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와 견줘 보면 지금은 ‘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대덕산에 꽃이 없는 이유는 봄꽃은 하나둘 져 가고 있고, 여름꽃은 이제야 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꽃을 피우고 있는 것들만 꼽아도 이 정도다. 꽃쥐손이, 구슬붕이, 요강나물, 고광나무, 국수나무, 전호, 노린재나무, 물양지꽃, 개회나무, 백당나무….
꽃이 없는데도 금대봉과 대덕산에 가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깊은 숲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숲을 구태여 지금 가자고 권하는 건 ‘비’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 내린 직후 숲의 정취 때문이다.
비 오는 날에 숲에 가 본 적이 있다면 알 수 있다. 비에 촉촉하게 젖은 숲의 초록 색감이 얼마나 생생한지, 비 오는 날 숲의 냄새가 얼마나 짙어지는지를 말이다.
금대봉 숲이 이렇게 아름다운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은 건 ‘꽃의 부재(不在)’ 덕분이었다. 돌이켜 보면 늘 ‘꽃이 필 무렵’을 겨눠 그곳에 갔고, 가서 꽃을 찾아 헤맸다. 야생화도 작황이 들쑥날쑥한 농사와 같아 좋은 해도, 그렇지 않은 해도 있다.
개화 시기를 딱 맞춰 가는 것도 쉽잖은 일이어서 흐드러진 꽃을 보고 올 때도 있었고, 실망만 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지만 그 숲에서 늘 찾았던 건 꽃이었다. 꽃을 보았건 보지 못했건, 꽃에만 눈이 팔렸다는 얘기다. 꽃이 아닌 초록 이파리만으로도 그 숲이 이리도 아름답다는 걸, 그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금대봉에서 분주령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는 낙엽송 숲. 훤칠한 낙엽송 아래를 걷다 보면 피톤치드 향이
짙게 느껴진다.
# 장마철에 숲에 든다는 것
금대봉 해발고도는 1418m, 대덕산은 1307m다. 기가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1300m가 넘는 산을,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한 번에 넘는다니….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트레킹을 시작하는 출발 지점인 두문동재 터널 위 탐방지원센터의 해발고도가 이미 1268m다. 금대봉 정상까지는 그래도 150m를 더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금대봉 어깨를 슬쩍 짚는 시늉만 하다가 내려간다.
두문동재 터널 위 옛길 정상의 탐방지원센터에서 금대봉 아래 분주령까지는 시작부터 줄곧 내리막이다. 두문동재에서 분주령까지 거리는 4.8㎞다. 분주령의 해발고도가 1065m니까, 이 거리를 걷는 동안 해발 200m쯤을 내려가는 셈이다. 편안하기 그지없는 내리막이다. 지금 이 길에는 꽃이 적지만, 대신 초록으로 가득한 숲이 있다.
금대봉 능선의 숲은 다채롭다. 양치식물들로 가득한 한 뼘 남짓한 폭의 비밀스러운 느낌의 숲길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하게 솟은 낙엽송 숲길도 있다.
불쑥 숲 바깥으로 나와 초지를 걷는 구간도 있다. 초록이 가장 싱그러울 때는 비가 내린 직후다. 마침 장마의 한가운데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은 피해야겠지만,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는 정도의 날씨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우의 등 장비를 제대로 갖췄다면 말이다. 장마철에는 운이 좋다면 안개가 빨아들인 수묵화 같은 숲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하루 500명까지로 정해져 있는 입산 제한도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한결 여유 있다.
‘나흘 전까지 예약 필수’란 까다로운 조건이 내걸린 적도 있지만, 근래 들어서는 입산 제한 인원수가 넘지 않았으면 예약 없이도 당일 현장에서 인적사항을 쓰고 들어갈 수 있다.
두문동재에서 출발해 금대봉 능선을 내려가 분주령에 닿으면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 중 하나는 대덕산을 오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대덕산을 들르지 않고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자신의 체력을 가늠해 대덕산을 오르든지, 그쯤에서 그만 내려오든지 결정하면 된다. 대덕산 정상까지 다녀온다면 전체 코스 길이는 9.2㎞로 4시간 남짓이 걸린다. 대덕산을 빼고 검룡소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6.6㎞로 2시간이 채 안 걸린다.
대덕산을 들르지 않는다면 그때까지를 ‘등산’이라기보다는 ‘하산’이라 부르는 게 더 적당할 듯하다. 줄곧 ‘내려오는’ 길이라서 그렇다. 순하면 얕고, 깊으면 거친 법인데 금대봉과 대덕산은 깊으면서도 순하다. 여름날 깊고 순한 그 숲에 가 보면, 이런 숲을 걷는다는 게 축복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하이원리조트 밸리허브 부근의 꽃밭. 슬로프 가득 샤스타데이지와 금계국이 만발했다.
# 여름꽃이 슬로프를 눈처럼 덮다
하이원리조트가 들어선 고한과 사북 일대의 여름꽃은 ‘샤스타데이지’다. 스키장의 슬로프마다 가히 꽃 사태다. 하이원리조트는 스키장 문을 열기 한 해 전인 2005년부터 해마다 슬로프 주위에 꽃을 심었다.
원추리, 목수국, 개양귀비….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찾아낸 ‘대표 꽃’이 샤스타데이지다. 샤스타데이지가 군락을 지어 피어나면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근사하다.
샤스타데이지가 하이원리조트의 대표 꽃이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주요한 이유는 꽃이 흰색이어서 겨울의 설원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꽃이 슬로프 전체를 아예 순백으로 뒤덮다시피 해 겨울 스키시즌의 눈 내린 슬로프 풍경을 연상케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샤스타데이지가 잘 자라서다.
우리나라 기후에 잘 버티는 편인 데다 햇볕을 좋아해 노지에 심어 두면 저 혼자서도 잘 자란다. 장맛비가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리조트가 있는 고한과 사북 일대는 오랜 가뭄에 시달렸는데, 올해 샤스타데이지는 개화 시기만 예년에 비해 좀 늦어졌을 뿐, 생육에는 거의 문제가 없다.
샤스타데이지가 선택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꽃이 오래가기 때문이다. 샤스타데이지는 꽃이 한 달 가까이 간다. 하이원리조트는 꽃이 필 때쯤 축제를 하는데, 샤스타데이지 축제는 지난 주말 끝났다. 하지만 올해는 꽃이 예년보다 늦어 지난주 중반쯤이 절정이었으니, 앞으로 열흘쯤은 더 꽃을 볼 수 있다.
하이원리조트에는 밸리콘도, 힐콘도, 마운틴콘도 이렇게 3개의 콘도가 있는데, 샤스타데이지를 보려면 밸리콘도 쪽으로 가야 한다. 밸리콘도의 밸리스키하우스에서 밸리허브로 이어지는 ‘제우스’ 슬로프와 하이원탑으로 이어지는 ‘헤라’ 슬로프 구간에 샤스타데이지가 집중적으로 심어져 있다. 슬로프 아래쪽은 꽃이 지기 시작했고, 해발 1000m 남짓인 밸리허브 아래, 위쪽은 이제 꽃이 한창이다.
# 꽃밭을 홀로 독차지할 수 있는 곳
하이원의 제우스와 헤라 슬로프가 사진 명소로 소문이 나면서 주말이면 ‘사진 촬영용 복장’을 갖춰입은 이들과 중형 카메라를 든 동호인들까지 한꺼번에 몰려든다.
문제는 사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꽃밭이 북적인다는 점. 카메라 앵글 안으로 사람들이 불쑥불쑥 들어오니 기념사진은 관계없지만 이른바 ‘인생 샷’을 생각해 찾아왔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발품을 좀 팔면 드넓은 꽃밭을 독차지하고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슬로프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하이원리조트 이규훈 부장의 귀띔이다. “‘아테나2 슬로프’에 샤스타데이지가 가득 피었는데, 접근성이 떨어져 늘 사람이 없어요. 저희끼리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봐주는 사람도 없이 그냥 저희끼리 지는 곳입니다.
아테나2 슬로프에 가려면 곤돌라를 타고 마운틴 탑까지 오른 뒤에 거기서 밸리 탑까지 능선을 따라 30분쯤 걸어가야 한다. 돌아올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걸어 나와야 한다. 왕복 1시간 걷기란 수고를 바쳐야 하지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득한 꽃밭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샤스타데이지가 다 지고 나면 제우스3 슬로프와 아테나3 슬로프가 만나는 하부 쪽의 ‘슬로우 가든’에서 꽃을 볼 수 있다. 슬로프 관리 인력들이 정성껏 가꾸는 꽃밭이다. 샤스타데이지만큼 거대한 군락은 아니지만, 금계국, 목수국, 원추리, 범꼬리가 여름 내내 피고 진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곳 더. 헤라 2번 슬로프에는 뜻밖에도 더덕이 자란다.
보통 재배 더덕은 3년이면 수확하는데, 여기 더덕은 2005년에 심은 것이니 자그마치 17년이나 묵은 더덕이다. 더덕을 캐 갈 수는 없고, 그냥 8월쯤 피는 꽃을 보거나 진한 더덕 향기를 맡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더덕 꽃이 필 때쯤이면, 씨앗이 날아들어 자란 도라지 꽃도 함께 핀다.
▲위 사진은 태백 장성광업소의 수직갱 타워. 장성광업소 탄광에서는 아직도 채탄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아래 사진은 태백 장성동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걸어 놓은 광부 사진. 마을 주민들은 사진 속 인물이
‘캐빙사끼야마’였던 ‘정국이 아버지’라고 했다.
# 현재진행형 탄광촌…태백 장성
정선과 태백 일대를 여행한다면 탄광을 비껴갈 수 없다. 하이원리조트가 자리 잡고 있는 정선의 고한과 사북 일대는 한때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거대한 탄광촌이었으며, 태백시도 석탄산업이란 단일산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시다.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된 탄광산업은, 1989년 이른바 ‘석탄산업합리화’를 기점으로 몰락했다.
그 번성과 몰락의 기록이 폐광된 광산에 새겨져 있다. 옛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를 예술 공간으로 다듬어 낸 삼탄아트마인이나, 옛 동원탄좌 사북광업소를 보전해 만든 사북 석탄역사체험관이 대표적인 곳이다. 멈춘 탄차(炭車)와 높이 솟은 수직갱, 녹슬어 가는 기계, 깨진 유리창…. 이런 것들이 옛 탄광에 박제돼 남았다.
탄광촌의 자취도 마찬가지다. 탄 더미 가득한 비탈에 판잣집 관사와 천변에 늘어선 술집, 루핑집에서 힘겹고 고단한 노동으로, 때론 뜨거운 공동체로 살아가던 탄광촌 마을 사람들의 자취도 철암역 일대에 ‘탄광역사촌’으로 남겨졌다.
이런 곳들을 둘러보다 보면 탄광을 오래된 과거의 일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탄광은 아직 숨이 붙어 있다. 태백의 장성광업소에서는 지금도 채탄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장성탄광에서 캔 석탄은 철암선탄장에서 선별작업을 거쳐 연탄공장 등에 공급되고 있다. 태백 장성에서 탄광은 추억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1988년 기준 전국의 광업소 숫자는 347곳이었다. 이 중에서 343곳이 문을 닫았다. 전국에서 가동 중인 탄광은 강원 태백시의 장성광업소, 전남 화순군 화순광업소, 강원 삼척시의 도계광업소와 경동 상덕광업소 이렇게 4개다.
여태 살아남은 4곳의 탄광 가운데 3곳은 이미 ‘문 닫을 날’을 받아 놓았다. 내년에 화순광업소가, 내후년에 장성광업소가 그리고 이듬해에 도계광업소가 차례로 폐광한다.
그렇게 되면 민영 탄광인 경동 상덕광업소 딱 한 곳만 남게 된다. 광산 세 곳의 폐광으로 석탄 생산이 줄어들면, 연탄 공급도 따라서 줄어들게 될 것이 자명하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석탄의 절반쯤이 연탄 제조에 쓰인다.
공급이 줄면 소비도 따라서 줄기 마련. 그렇게 연탄 소비가 줄면 마지막 남은 탄광도 문 닫는 건 시간문제다. 수입 석탄으로는 지금 같은 품질의 연탄을 만들 수 없어 탄광이 다 문을 닫고 나면 연탄도 사라지게 된다. 연탄이 ‘실물 없는 추억’이 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 동굴 앞에다 차린 주점 ‘용굴집’
삼탄아트마인이나 사북 석탄역사체험관 같은 잘 단장된 추억의 공간 대신, 태백 장성을 둘러보길 권하는 건, 그곳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진짜 탄광촌이기 때문이다. 장성은 추억이나 회고가 아니라 정면으로 목격하는 현재진행형인 탄광촌이다.
어두운 막장에서도 희망과 꿈을 일궜고, 석탄산업을 견인했던 이들이 살았고, 또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광부들이 수직으로 뚫린 최대 1000m 갱도로 내려가 고된 채탄 작업을 하고 있고, 퇴근 후에는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 고된 노동의 피로를 잊는다.
광업소가 문을 닫고 난 뒤에 장성은 어떤 공간이 될까. 장성은 탄광촌의 기억이 새겨진 공간이 박제처럼 남겨진 마을이다. 폐광을 앞두고 도시재생계획이 이미 수립됐고, 마을 한복판에서는 주거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임대아파트와 도시기반시설 공사가 분주하지만, 탄광촌의 공기 속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폐광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이 스며 있는 듯했다.
장성은 그나마 광업소가 운영되고 있어서인지 폐광 지역의 다른 탄광촌보다는 가게도 많고 장사도 제법 되는 것처럼 보였다. 폐광된 탄광 마을에서는 이미 사라진 것들이, 이곳에는 아직 살아 있다. 1977년 문을 열었다는 장성중앙시장도 누추하지만 제법 당당한 풍모를 잃지 않았고, 매달 4일과 14일, 24일에는 장도 열린다.
장성에는 제법 볼 만한 곳들이 있다. 시장 옆에는 이북에서 온 이가 지었다는, 100년 가까이 됐다는 2층 건물이 있다. 또, 석회동굴 입구에 집을 지어 굴 안에서 나오는,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을 이용해 1960년대까지 주점으로 영업하던 ‘용굴집’도 있다.
용굴집은 오래 손보지 않아 안전문제도 있고, 복잡한 소유권 분쟁도 있어 문을 닫았다. 광업소가 살아 있는 건 앞으로 2년. 탄광이 문을 닫고 나면 더러는 남겨지겠지만,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 정국이 아버지는 안녕하실까
장성에는 깃들어 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곰방대 바위 아래 무속인들이 신내림을 받았다는 성황당이 있고,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온 광부를 감시하고자 만들었다는 감시탑도 있다. 장성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흑면장군 전망대’가 있다.
과거에 한 도승이 이 고개를 넘어가다 문득 멈춰서 ‘여기가 훗날 흑면(黑面)장군 수만 명이 나올 산세’라고 두려워하며 절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도승이 절을 네 번 했다고 고개 이름이 ‘사배’(四拜) 고개다. 흑면장군이란 얼굴과 온몸이 검고 도끼를 들고 있는 장군을 말하는데, 지금의 광부를 뜻한단다.
장성에는 광업소가 아직 문 닫지 않았지만, 탄광을 추억하는 조형물과 사진이 곳곳에 있다. 장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집 석종사 앞길에는 광부들의 장화와 탄차, 광부 조형물이 있고, 마을 곳곳에는 1980년대를 전후한 탄광 사진이 걸려 있다. 아파트 공사장에서도 가림벽을 이용해 옛 장성 풍경을 담은 사진전을 하고 있다.
장성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장의 사진은, 한 광부가 갱도를 빠져나오는 흑백사진이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사진이었는데, 한 주민이 그 광부의 이름을 말해 주면서 사진은 특별해졌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은 아니다. 사진 속의 광부가 ‘정국이 아버지’라고 했다. 정국이 아버지는 ‘캐빙사끼야마’였다고 했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캐빙사끼야마’는 갱도를 뚫는 선산부 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는 기술자라고 했다. 번성했던 탄광 시대를 기억하는 주민들에게, 그는 용맹스러운 ‘캡틴’이었다. 장성에는, 그리고 고한과 사북에는 얼마나 많은 정국이 아버지가 있었을까. 정국이 아버지와 더불어 정국이의 안부를 묻는다. 다들 잘 살고 있을까.
■ 근사한 한옥서 술 한잔
하이원 리조트에는 ‘운암정’이 있다. 한정식을 내는 고급 식당으로 지은 근사한 한옥이다. 지금은 베이커리 카페와 전통주 주점으로 쓰고 있다. 으리으리한 한옥에서 술 한잔하는 기분이 훌륭하다.
전통주 주점에서는 율란, 호두정과 등 안줏감 주전부리를 내기도 하고, 홍어회 무침이나 불고기 전골 등 본격 안주를 차리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전통주를 ‘샘플러’ 방식으로 낸다는 것. 막걸리나 소주, 전통주 등 다섯 가지로 구성한 한 세트의 술을 한 잔씩 맛볼 수 있는데, 주종이나 알코올 도수에 따라 모두 다섯 종류의 세트가 있다.
출처 / munha.com / 정선·태백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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