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ㅡ실크로드. 둔황(敦煌)ㅡ막고굴(莫高窟).
▲둔황(敦煌) 막고굴 입구
둔후앙(敦煌)은 한(漢) 나라 때 ‘모래의 마을이라는 사주(沙州)’로 불린 도시입니다.‘둔후앙(敦煌)’은 고대어로 ‘성대하고 찬란하다’라는 뜻입니다. 기원 전 한 무제(汉 武帝)가 서역 경영에 나설 때 하서사군(河西四郡)의 하나가 되었습니다.둔황에 불교가 번지기 시작 한 것은 후한(后汉) 중기 때입니다.
이후 중국인들과 중앙 아시아인들이 마찰 없이 잘 지내면서 타림 분지에 번지던 불교도 번창했으나, 5호 16국을 거치면서 이 일대는 여러 민족 간의 다툼과 전란으로 얼룩졌습니다. 이 전란의 시기에 불교의 철학은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아 구원을 향한 불교 동굴 사원의 개굴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과 서역을 드나들던 대상들을 지원하던 재력가들은 석굴 사원을 만들어 부처님께 봉헌하고 상인들, 순례자들, 여행자들은 험난한 타크라마간 사막(塔克拉玛干 沙漠)의 위험을 물리치고 무사히 여행하기를 기도하기 위해 석굴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후 북위(北魏)가 들어서면서 둔황도 그 영향권에 들었고(439년), 불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왕조에 의해 중국의 3대 석굴이 조성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불교가 중국에 보급되는 초기였는데, 둔황은 그로 인해 서역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불교경전, 불화, 문서 들을 수용하여 보급하는 불교의 포교지였으며, 중국에서 인도로 향하는 구법승들의 출발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토번(吐蕃, 7세기 후반), 위구르 왕국(911년), 서하 왕국(1036년), 몽골족(1227년)의 지배를 받았으며, 몽골 시대 때 동서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슬람이 들어와 활발히 전해졌으며, 대부분의 이슬람 위구르 왕국들을 지배하던 차가타이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이슬람교도로 넘쳐나게 됩니다.
그 이후 모처럼 한족 왕국인 명(明) 나라 때는 지아위구안(嘉峪关)의 성문을 닫고 폐쇄정책을 쓰는 바람에 장성 너머 둔황은 그다지 중요성을 띠지 못하게 됩니다.실크로드가 개척되고 둔황은 서역(西域) 북로(北路)로 가던, 서역(西域) 남로(南路)로 가든 사막을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쉴 수 있는 도시이며 전초 기지로서 각광받았습니다.
고대 중국의 국경 도시였기에 중국과 다른 나라가 만나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장안(長安)을 떠나사람들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장을 세운 후 기후, 적국의 상태 등을 파악한 후 남로나 북로로 갈지 결정하게 되었고, 또 서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중국의 첫 도시이기 때문에 많은 상인들이 여기에 머물면서 장을 연 관계로 진귀한 물건과 돈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모래의 마을’에서 ‘성대하고 찬란한’ 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중국 최고의 전성기 때인 당(唐) 나라 때는 아침, 낮, 저녁 등 세 번이나 장이 설 정도로 번성하였습니다. 유명한 막고굴(莫高窟)도 이 시기에 많이 건립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야 할 당시의 상황으로, 인간의 두려움 등이 종교로 발전하였고, 그 여파로 이곳에 많은 종교 사원이 생겼습니다.
본래의 둔황은 지금의 도시에서 남서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지금 그곳은 전부 밭이고흙으로 된 잔해들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의 둔황은 청(淸) 나라 때인 약 250년 전(1,725년)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막고굴(모가오쿠. 莫高窟)
다통(大同)의 윈강 석굴(云崗 石窟), 루오양(洛陽)의 용문 석굴(龍門石窟)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의 하나인 막고굴은 둔황하면 떠오르게 하는 석굴입니다. 밍사산(鸣沙山) 기슭에 있으며 동쪽 언덕을 따라 약 1,600m에 걸쳐서 5층의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 만들어 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둔황 연구원 발표에 의하면 진(秦) 나라 때인 서기 366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원(元) 나라 때까지 약 1,000년에 걸쳐 만들어 졌으며, 1,000개 이상의 굴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답니다. 이는 14굴에서 발견 된 ‘이회양중수막고굴불감비(李懷讓重修莫高窟佛龕碑)’의 비문 내용을 근거로 알려진 것입니다.
이는 당(唐) 나라(698년) 때 이회양(李懷讓)이 석굴을 수리하면서 세운 기념비라고 합니다. 비문의 내용은, 이 지역을 돌아다니던 낙준(樂樽)이라는 수도승이 명사산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한 굴을 열었으며, 그때가 전진(前秦) 시대인 366년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낙준이 열었다는 굴은 보존되지 않고, 지금의 굴들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둔황 연구원이 발표하기로는 현재 굴은 492개, 벽화는 약 45,000㎡, 불상은 약 1,400여 개가 발굴 되어 있다고 합니다. 동굴별로 제작 시기가 거의 다 밝혀졌는데, 232개는 당(唐) 나라 때, 98개는 송(宋)나라 때, 79개는 수(隨)나라 때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제작 시기에 따라 벽화의 나타나 있는 복장 등의 생활 모습 등이 달라서 시대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1,900년에 17굴에서 많은 경전과 문서들이 당시 도를 닦던 왕원록(王圓彔)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중요한 책과 경전, 자료 등은 외국인에게 팔고, 또 외국인들이 도굴해 가서 중요한 것은 거의 외국에 있다고 합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당시에 발견되었는데, 이도 역시 그때 팔려서 지금은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 있습니다. 17굴에서 많은 경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장경동(藏經洞)’이라고도 합니다. 중국에 석굴 사원이 많이 지어진 이유는 인도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건조하고 무더운 기후는 무척 덥다고 합니다.
그런데 석굴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철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석굴을 조성하게 되었고, 이것 때문에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는 석굴이 발달하였고, 이 영향으로 중국에도불교가 전파되면서 석굴 사원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 된 경로와 석굴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즉 인도의 아잔타, 엘로라 석굴-아프카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중국의 키질 천불동-둔황의 막고굴루오양의 용문석굴-한국 경주의 석굴암이 불교 전파 시기와 100-200년의 차이를 보이면서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합니다. 막고굴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너무 방대하기에 이 정도 기본만 하겠습니다.
▲돈황석굴, 막고굴
▲둔황(敦煌)을 상징하는 비파 타는 비천(飛天)상입니다.
▲둔황(敦煌)을 상징하는 비파 타는 비천(飛天)상입니다.
막고굴 가는 길에 있는 비천(飛天)상들입니다. 비천은 불교에서 천사를 이르는 말입니다. 본래는 옷을 입지 않은 천사였으나, 유교의 영향이 강한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옷을 입은 천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막고굴에 가면 비천을 그려 놓은 벽화가 많이 있습니다.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북굴군
석굴군은 남쪽지구의 남굴과 북쪽지구의 북굴로 나눠진다. 남굴은 벽화와 불상들로 내부 장식이 되어 있는 반면,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석굴 안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기거한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돈황석굴 북굴군
▲돈황석굴 북굴군
▲돈황석굴 북굴군
▲영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 많이 본 사진이지요?
9층 누각으로 96굴입니다. 초당(初唐) 연재(延載) 2년인 695년에 짓기 시작하였으며,
서하, 원, 청 시대에 개축하였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민국년간에 개축한 것입니다.
안에는 34.5m의 대불이 있습니다.
▲돈황석굴 막고굴
중국 간쑤성[甘肅省] 둔황현[敦煌縣] 남동쪽 20km 지점에 있는 불교유적. 소조불상(塑造佛像)과 벽화 등의불교미술품 외에 많은 고문서류가 발견되어 동서문화교류사 또는 중국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907년 영국의 A.스타인과 그 다음해 프랑스의 P.펠리오에 의해 알려졌다. 둔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의 조사에 의하면 불상조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은 469개소에 달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막고굴을 대표하는 제96굴의 누각. 높이 34.5m의 북대불이 있다.
96굴은 돈황에서 제일 큰 대불로 석태니소(石胎泥塑)의 미륵불좌상이다. 석태란 돌을 깎아서 신체의 윤곽을 만들고, 니소란 진흙으로 모양을 만들고 채색을 했다는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측천무후 원년(695년) 영은선사와 음거사가 만든 것이라 한다. 대불의 높이는 34.5m로 돈황석굴 중에서 가장 크다.
이 불상은 130굴 대불에 비해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대불(北大佛)'이라고도 부른다. 그 크기와 섬세함에 떡하니 입이 벌어진다. 당시 황제가 여성인 탓에 불상은 다소 여성적 모습을 하고 있다.
초파일에는 불상의 뒤편까지 돌면서 불공을 드릴 수 있다고 한다. 대불을 보호하고 있는 건물은 원래는5층이었으나 장기간 직사광선에 노출되어 보존상태가 극히 나빠졌다가 지역 유지들의 기부로 1936년에 현재의 9층으로 세워졌다. 지금은 막고굴을 대표하는 누각이 되었다.
▲돈황석굴, 막고굴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도 492개에 이르고, 2천여 개의 불상과,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 벽화가 있다.
▲돈황석굴, 막고굴
석굴의 외부 모습들입니다.내부의 모습을 사진을 찍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 있는 것이라도 찍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렇게 밖에 나오질 않네요. 아마 많이들 보신 사진이실 텐데, 이렇게 밖에 찍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부 사진은 다음에 제가 사진 찍는 기술이 더 좋아지면, 책에 있는 것이라도 찍어서 올리도록 해 보겠습니다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1900년 초기의 막고굴 모습 (출처- kbs 역사기행 돈황석굴)
▲제130굴 섬세한 손이 아름다운 26m 높이의 남대불(南大佛)
<제130굴>에는 막고굴에서 두 번째로 큰 26m의 미륵불이 있다. 풍만한 얼굴에 온화한 표정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흘러내리는 듯한 옷 주름이 아름답다. 96굴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북대불의 반대 의미인 남대불(南大佛)이라고 한다.
당대에 이어 송나라 때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섬세한 왼손은 가장 아름다운 부처의 손으로 꼽힌다고 한다.
제259굴 깨달음의 순간의 미소를 표현한 동방의 모나리자
<제259굴>은 북위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공개되는 석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개의 불상이 있는데 화관 등의 힌두교 양식이 섞여 있다.
아잔타의 석불과 매우 유사하다. 이것들은 모두 목심불이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진흙을 붙여 만든 것이다.
가사를 몸에 두른 다보여래상은 깨달음의 순간 미소를 띠는 모습이 아름다워
'동방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328굴 보살좌상
보살상은 한 발을 대좌에 올리고 한 발은 연꽃 위에 올린 반가좌이다. 전신은 날씬하며 상호는 갸름하다.
광배는 석굴암 본존불에서 볼 수 있는 원형으로 원주에는 미약하게 화염무늬를 처리하였다.
대좌는 하엽을 마주보게 붙여놓은 형태에 옷자락을 드리웠다. 두 손을 옷자락에 넣고 서 있는
시봉하는 승려 모습이 무표정하면서도 온화하다.
45굴에 있는 보살상과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여인상이다
▲16굴 입구 고승 홍변 석상
돈황이 토번의 지배에서 벗어난 당 선종 때(848년), 당시 돈황의 유력가인 장의조가 그를 도와준
고승 홍변의 자문을 받아 <제16굴>을 만들었다.
16굴의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작은 동굴이 <제17굴>이다. 이 굴은 홍변의 영굴(影窟), 즉 그를 위한
기념굴이다. 굴의 정면에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94㎝의 홍변상이 있다.
이 17굴이 바로 왕원록이 5만 여권의 희귀한 서적들을 발견했던 장경동(藏經洞)이다. 1908년 16굴
입구에 쌓여있는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벽을 깨뜨리자 길이와 너비가 각각 3미터인 작은 굴 안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스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 중 하나인 <금강경>을 비롯한 이곳에 있던
7천여 권의 고서적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이어 프랑스의 펠리오가 나머지를 약탈해갔는데 우리나라 신라 혜초스님이 남긴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도 주인을 잊은 채 프랑스로 가게 된다.
▲17굴에서 엄청난 사료를 발견한 폴 필리오, 이 가운데 왕오천축국전이 있었다
▲17굴에서 발견된 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17굴, 61굴-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존되어있다.
혜초는 780년께 오대산에 들어가 건원보리사란 절에서 입적했다는 기록 한 줄만알 뿐 그 절이 도대체
어디 어느 사찰인지 몰랐다.
최근 한 연구자가 ‘보리’라는 말의 연원부터 추적해 그 사찰을 오대산에 있던 금각사의 별칭 혹은 숙종
원찰로서의 상징적 보통명사일 것이라는,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던 중 61호굴에서 단서를 찾았다. 이 굴은 사방이 14m 정도로 막고굴 중에서도 손꼽히는 큰 굴이다.
동·남·북 세 벽면에 강렬한 색채로 한족, 위구르, 호탄 출신의 여성 공양자상 52명을 그린 벽화가 있고,
특히 굴 중앙에 놓여있는 기단 뒤 서벽에 거의 완벽한 ‘오대산지도’가 그려져 유명하다.
전체 면적 250㎢에 달하는 산시성 오대산의 축소도인 이 그림의 길이는 13m, 폭은 3.4m로서 막고굴에서도
가장 큰 벽화 중 하나다.
지도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남선사와 불광사를 비롯한 67개의 명찰 이름이 명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생활풍속도 그려져 대단한 진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신라○탑’이란 글자가 어렴풋이 보인다. 20년 전에는 ‘신라승탑(新羅僧塔)’으로 또렷이
보였다고 한다. ‘신라의 승려 탑’(사리탑)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한 고승이 입적한 곳임을 시사한다.
또한 ‘신라송공사(新羅送供師)’, 즉 ‘공양을 보내는 신라인’이란 글자도 있었으나 지금은 닳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혜초의 입적지를 밝히는 새 실마리를 찾아냈음에는 틀림 없다
▲석굴 내 불상
수성암(水成岩)으로 된 석굴이어서 불상은 모두 소조상(塑造像)이며 4세기 중반부터 13세기에 이르는
1,000년 간 석굴조영자(石窟造營者)들은 벽화의 제작에 힘썼다.
▲ 석굴 내 불상
▲45굴 칠존상
▲석굴 내 불상
▲석굴 내 불상
▲막고굴 내부
석굴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석굴암처럼 화강암을 새긴 바위석굴이 아닌 사암층 동굴이다.
벽면에 바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목재로 뼈대를 만든 다음, 진흙과 갈대 잎을 섞은 흙으로 형체를
만들고, 그 위에 벽토와 석회 같은 것으로 곱게 바른 다음, 수채화로 단청을 입혀 놓은 것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것과 달리 섬세한 곡선과 화려한 채색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제작되었지만 그 모양과 색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의 메마른 날씨 덕분이다.
▲비천도
▲벽화 비천상
불교가 인도로 부터 중국에 전래될때 비천상도 함께 전래되었는데 중국에 전래되면서 원래 괴물의
모습에서 중국고유의 신선사상(도교)과 결부되면서 선녀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해 왔다.
상반신은 나신이고 하반신은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어서 신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표정은
요염하며 손의 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러한 변천은 아마 페르시아 등 서역의 문화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음보살도
석가모니의 설법도 중 우측의 관음보살만을 확대한 것이다
▲문수경변도
문수보살 관련 그림으로 밝게 처리한 얼굴들이 특색이다
▲반탄비파도
궁중악사들의 연주장면 같은데 중앙의 여인이 비파를 왼쪽 어깨에 올리고 발을 들어올려
춤추듯 연주하고있는 인상적인 그림이다
▲수월관음도
관음보살을 둥근 원형으로 처리한 수작이다. 손상되었지만 회화의 기품은 아직그대로 살아있다
▲채색 소조상
석가모니의 수제자 가섭과 아난. 목과 허리를 좌우로 꺾어 부드러운 모습을
강조한 전형적 삼절기법(三折技法)을 썼다
▲220굴 벽화
▲82굴 벽화
▲275굴 불상과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벽화는 표면에 석회를 칠한 벽면 위에 짙은 채색의 불교회화를 치밀하게 묘사했는데, 제작 연대별로는 위대(魏代)가 22굴, 수대(隋代)가 90굴, 송대(宋代)가 103굴이 있다. 그 중에는 청대(淸代)에 들어와서 그린 것들도 있다. 돈황석굴에는 흔히 '라피스 라줄리'라 부르는 보석에서 체취한 짙은 푸른색이 무척 많이 사용되는데 현재의 '이란'의 고대 국가인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페르시아 사산왕조가 무너지면서 이들 왕조의 당의 돈황으로 들어와 정착하는데 이때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화려한 문화가 돈황 벽화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일명 '호풍'이라고도 일컬었던 그들의 영향은 당대에 유행처럼 퍼져나갔는데 호희(:호나라 여인이라는 뜻으로, 당인들은 페르시아의 여인들을 이렇게 불렀다.) 들이 춤을 추는 동작이 드러난 <호선무> 같은 장면들이 돈황 벽화에 잘 나타난다.
둔황석굴의 조사보존사업은 1960∼1970년대에 걸쳐 행해졌는데 1972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최고(最古)의 것인366년(前秦의 建元 2)의 것으로부터 492개의 동굴이 조사되어 2,000여 채의 채색소조상(彩色塑造像)과4만 ㎡의 벽화를 조사 연구하고 500여 ㎡의 벽화와 30여 채의 소조상이 복구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북위(北魏)와 당대(唐代)의 견직물 60여 점, 748년의 문서, 인쇄된 불상 등을 발견 조사하고 계속 연구하고 있다.
▲보살 그림 드리개(菩薩立像幡) , 국립중앙박물관
돈황(敦煌). 비단에 채색. 27×323cm. 10세기.둔황에서 가져온 드리개로 ‘번(幡)’이라고도 부른다. 번은 사찰 건물의 안팎에 걸었던 것으로, 불·보살의 위대함과 자비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일종의 장엄구(莊嚴具)이다.
이 번에는 비슷한 모습의 보살 3명이 표현되어 있다. 모두 화려한 보관과 목걸이를 하고, 연꽃 대좌 위에선 모습이다. 보살의 육감적인 몸과 풍성한 옷자락이 능숙한 필치로 잘 묘사되어 있다.
선을 위주로 한 이와 같은 표현은 중국 회화의 영향을 반영한다. 중국 오대(五代, 1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여겨지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번은 프랑스 기메 박물관[펠리오 컬렉션]과 영국의 브리티쉬 박물관[스타인 컬렉션]에도 소장되어 있다
▲보살 그림 드리개(菩薩立像幡) , 국립중앙박물관
▲보살그림 드리개, 10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 드리개는 풍만한 신체를 지닌 보살이 굵기가 일정하지 않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같은선은 중국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보살그림 드리개, 10세기
▲보살그림 드리개, 10세기
▲보살그림 드리개, 10세기
▲둔황 막고굴 61굴에 있는 벽화 우타이산도의 신라승탑 그림(점선 표시된 부분).
3층 사리탑 모양으로 옆에 신라승탑 명문이 보인다
▲ 둔황 막고굴 237굴의 ‘유마경변상도 ’벽화에서 발견된 ‘조우관을 쓴 삼국인
’(그림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삼국시대 관모의 특징인 조우관 형태가 뚜렷하다
◆220, 335, 237굴- 삼국시대 조우관을 쓴 삼국인 벽화
조우관을 쓰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에서 온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절, 공양사 신분의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하거나 공양하는 자리, 인도 불교전설의 불사리 분배 장면 등에 다른 외국 사절들과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인을 비롯한 여러 외국인들을 등장인물로 만들어 당나라 중심의 천하사상을 은연 중 과시하려는 양식화된 도상으로 봐야 할 것이 98, 428, 435굴 - 98호굴 남벽을 비롯한 여러 굴의 벽화에는 장구(장고)의 신명나는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 추는 익숙한 장면도 눈에 띈다.
428굴 벽화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비천상은 고구려 덕흥리 고분 전실 천장에 그려진, 천마상을 연상케 하며, 435호굴 벽화에서 인물상을 흑백색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기법은 고구려 수산리 고분의 기단을 입체감 나게 그린 기법과 동일한 음양법이다. 이들 현상은 두 지역간 문명이 공유한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다
'■동북 아시아****국가들 > ⊙중국****서북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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