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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아시아****국가들/⊙중국****서북지방

간쑤성(甘肅省)ㅡ실크로드.장예(張掖)ㅡ아들 목 베고, 강자에게 딸까지 주면서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게 권력

by 삼수갑산 2022. 3. 10.

실크로드ㅡ장예(張掖)

아들 목 베고, 강자에게 딸까지 주면서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게 권력

▲기련산맥을 따라 이어진 장성

 

여간촌을 벗어나니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코발트색 하늘 아래 멀리 만년설 덮인 산맥들이 이어지고 야트막한 산록의 푸른 초원에는 양들이 편안하게 풀을 뜯는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영화필름처럼 스쳐가는 풍경화를 감상할 즈음, 부서진 토성의 흔적이 화면에 나타난다.

점점 차창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급기야 시야에서 사라진다. 도로가 성벽을 뚫어버린 것이다. 토성을 둘러보기 위해 잠시 멈춘다. 산단고장성(山丹古長城)이란 안내석이 지나치는 자동차의 매연을 맡으며 폐허뿐인 성벽을 홀로 지키고 있다.

 

황토 성곽은 두 줄로 나란한데, 바깥은 한나라 때 만든 것이고 안쪽은 명나라 때 쌓은 것이라 한다. 한나라 때 장성은 상당 부분 훼손됐지만, 93km에 이르는 명나라 때 장성은 황토를 판축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하지만 명나라 때 장성 또한 훼손되기는 마찬가지다. 건조한 기후와 바람, 거기에 인간의 발길이 더해져 훼손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長城, 이제는 소통을 위해 뚫어야 할 벽

장성이 흔적 없이 사라지면 성곽과 함께한 역사도 잊힌다. 대지가 판축처럼 켜켜이 쌓여 새로운 자연을 만들면 인간은 그곳에 새로운 역사를 구축한다. 그리고 지나간 시대를 기록으로 남긴다. 판축처럼 켜켜이 쌓아올린다.자연은 항상 그대로이길 원하는데 인간은 쉬지 않고 자신의 역사를 만들고 기록하려 애쓴다.

 

그 역사가 찬란한들 어찌 칭송받을 수 있으며, 그 기록이 위대한들 어찌 영원할 수 있으랴. 물처럼 낮게 구름처럼가볍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다툼뿐인 역사와, 그로 인해 상처만 가득한 자연을 적셔주고 보듬어 주는 진실함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초원을 적시는 물줄기와 한 조각 흰 구름이 여느 때와 다르게 가슴을 울린다.

 

▲산단현 대로변의 명대 장성

 

황하는 멀리 흰 구름 속에 흘러가고 黃河遠上白雲間
높다란 산의 한 조각 성이 홀로 외롭구나 一片孤城萬仞山
오랑캐 피리는 어찌 구슬픈 이별노래만 불러대는가 羌笛何須楊柳曲
봄빛도 아직 옥문관을 넘지 못하였는데 春光不度玉門關


▶언지산(), 唐代 최대 말 목장은 야크와 양떼만 풀을 뜯고

산단현(山丹縣)은 말 목장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지명을 따서 지은 산단마는 천마와 버금가는 말로 예로부터 무장들이 즐겨 탔다. 산단이 목장으로 유명한 것은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물이 드넓은 초원을 적시며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흉노는 이곳을 천연목장으로 사용했다.

특히 기련산맥의 지맥인 언지산(焉支山)은 하서주랑을 지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다. 한 무제는 흉노로부터 이곳을 빼앗아 군현을 설치하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한혈마, 대완마(大宛馬), 화염구(火焰駒)와 같은 명마를 사육했다. 언지는 연지(臙脂)와 통하는데, 연지의 재료인 홍람(紅藍)이 이곳 언지산에서 많이 나기 때문이다.

 

▲야크와 양떼만 있는 언지산()록의 초원

 

천혜의 요충지인 언지산을 빼앗긴 흉노는 황량한 고비사막으로 쫓겨나 세력이 급속히 약해진다. 반면에 이곳을 차지한 한나라는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안정적인 힘을 구축한다. 흉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삶의 터전을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그들이 암담한 심정으로 쫓겨 가며 불렀을 ‘서하구사(西河舊事)’라는 노래가 전해온다.

우리가 기련산을 잃어
이제는 가축을 기를 수 없네.
우리가 언지산을 잃어
이제는 처자의 얼굴에 연지를 바를 수도 없네.


산단의 군마장을 찾아가는 길은 좌우로 온통 초록평원이다. 기련산맥을 이어온 앞산이 금방 손에 잡힐 듯 한데 가도 가도 그대로다. 한 시간을 내달려도 초원 역시 그 모습 그대로다.중국 속담에 손에 잡힐 듯한 산을 말을 몰아 달리다가 결국 말이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는데, 도대체 얼마를 더 가야만 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좌우로 펼쳐진 초원의 끝은 또 어디일까? 흉노가 이곳을 잃고 가축을 기를 수 없게 되었다는 아픔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토록 푸른 초원은 유목민족이면 누구나 차지하고 싶은 낙원이기 때문이다.4000여m의 산록 아래 펼쳐진 목장은 30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 무제 이후 군마사육장으로 변신한 이곳은, 그 뒤에 더욱 번창해 수나라 때는 10만여 필, 당나라 때는 70만여 필의 말을 사육했다고 한다. 이 목장은 아시아 최대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목장으로, 지금도 중국의 군마는 이곳에서 조달한다고 하니 가히 최고의 목장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산단군마장의 말들

 

하지만 최고의 목장에서 말을 찾아보기 어렵다. 너무 넓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동차가 말의 자리를 차지해 수요가 없기 때문인가.말이 뛰놀던 초원에는 야크, 염소, 양 등이 풀을 뜯고 있다. 그래도 말이 보고 싶어 한참을 더 들어가니, 겨우 수십 마리의 말이 보인다. 그런데 말들이 모두 울타리에 갇혀 있다.

 

초원에서 뛰노는 말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산단의 군마장에서 이렇게라도 말을 보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한무제는 천마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말은 소중한 자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경마장에서나 보는 동물이 됐으니 말도 한 편의 기구한 대하소설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일까.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화촬영지로도 유명한 언지산 초원

언지산록의 초원은 말 목장뿐 아니라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당 태종의 조카딸로 토번의 왕인 손챈감포(松赞干布․605년경∼649년)에게 시집간 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문성공주’,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원전 1세기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간 한나라 원제의 궁녀 이야기를 그린 ‘왕소군’ 등 30편이 넘는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문성공주는 아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비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문성공주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 개봉됐었다.

 

한족이 세운 나라들은 자국의 힘이 약하면 오랑캐라 칭하는 이민족들과 ‘정략결혼’을 했다.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취한 고육지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권력자가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권력을 넘보면 아들이라 해도 목을 베고, 자기보다 힘이 센 외부 세력에게는 딸까지도 주어 무마시켰으니 얼마나 잔인한 권력인가.

 

그러므로 마약보다 더한 권력의 맛을 어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참형을 앞두고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권력이다.하지만 분명한 진실이 있다. 백성을 위한답시고 권력을 휘두른 자는 모두 자신의 칼날에 죽는다. 이 어찌 한 나라만의 일이겠는가. 동서고금 모든 나라에 통하는 만고불변의 법칙인 것을.

▶영국인 저널리스트 조지 호그, 중국인들에게 人類愛를 심어주다

이곳 산단현과 관련된 ‘황시의 아이들(黃石的孩子)’이란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1937년 일본의

남경대학살을 목격하고 이를 취재한 영국인 저널리스트 조지 호그(George Hogg)의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2008년에 개봉했던 영화 '황시의 아이들' 포스터

 

적십자 요원으로 위장한 조지 호그는 학살현장을 촬영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처형되기 직전 중국인 장군에게 구출된다.

그 후 호그는 호북성의 황시(黃石) 마을에서 60여 명의 고아들을 돌보게 되는데, 정신적 충격을 받은아이들은 이방인에게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다 호그의 진실한 사랑에 감동한 아이들은 점차 호그와 친해지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전쟁은 잠깐의 평화도 용서하지 않는 법. 국민당군이 아이들을 전쟁에 동원하려 하고 마을을 군사 요새로 삼으려 하자, 호그는 모두의 간섭이 없는 먼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그곳은 마을에서 1000㎞가 넘는 감숙성 산단현이다.

 

호그와 함께 아이들은 해발 3000m의 산맥을 넘고 사막을 지나는 온갖 고난 끝에 마침내 산단현에 도착하여 새로운 삶을 꾸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호그는 여정 중에 걸린 파상풍을 치료하지 못해 산단현에 도착한 1945년 7월,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덩샤오핑, “국제주의 전사여!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산단현은 조지 호그를 기념하는 능원(陵園)을 조성해 놓았는데 이름이 ‘애여와 하극(艾黎與何克)’ 능원이다.‘하극’은 호그의 중국식 표현이다. 그렇다면 ‘애여’는 누구일까? 호그와 함께 적십자 활동을 한 뉴질랜드 친구인 ‘르위 앨리(Rewi Alley)’를

가리키는 것이다.앨리는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리’라는 간호사 역할을 하는 여성이 앨리의 역할을 대신할 뿐이다.

 

하지만 앨리야말로 호그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영화까지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아울러 호그가 틈틈이 써 둔 유고를 모아 ‘새로운 중국을 보다(I See a New China)’라는 책을 펴내는데도 일조한다.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동료인 호그의 인류애적 감동을 알리기 위해 헌신한 앨리. 호그에 대한 그의 진실한 우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조지 호그와 르위앨리를 기리기 위해 산단현 시내에 조성된 농원

 

위대한 국제주의전사여! 우리 모두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능원에는 덩샤오핑이 쓴 글씨가 검은 대리석 위에 빛난다. 길이 7m, 높이 1.8m에 이르는 석비에는 그와 함께 호그와 앨리의 생애가 좌우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진실로 중국의 미래를 지켜준 두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배어 있는 듯하다.

 

사랑은 모든 생물을 행복하게 한다. 특히 전쟁이라는 참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이룬 사랑은 더없이 행복하다.여기에 국경과 민족을 넘나드는 인류애가 더해진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실크로드는 바로 이러한 인류애를 살펴보는 길이기도 하다.

전쟁과 탐욕으로 점철된 인간사이지만 그때마다 이를 깨닫게 하고 바로 세우는 원천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인간은 선한 존재다. 선함의 근원은 바로 사랑이다. 수천 년간 사랑이 오간 실크로드에서 잊었던 사랑을 다잡는다.더 큰 사랑, 더 넓은 사랑을 배우기 위해 실크로드에 선다. 나에게 있어 길이 곧 스승이요 친구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출처 / premium Chosun.com / [허우범의 실크로드 대장정]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