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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아시아****국가들/⊙중국****서북지방

간쑤성(甘肅省)ㅡ실크로드.장예(張掖)ㅡ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왜 청년들에게 중국에 와서 쾌락을 즐기라고 했을까?

by 삼수갑산 2022. 3. 10.

실크로드ㅡ장예(張掖)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왜 청년들에게 중국에 와서 

쾌락을 즐기라고 했을까?

▲정액 대불사(大佛寺)

 

오아시스 도시가 모두 그렇듯이 장액 시내가 가까워 오자 사막지대가 녹음이 우거진 곳으로 바뀐다. 인간이 만든 빌딩들도 보인다. 옛날 실크로드 대상(隊商)들이 건조한 사막을 지나 수목과 물이 있는 도시가 보이면 식사와 휴식을 위해

더욱 힘을 내어 줄달음쳤는데, 나 또한 밀려오는 허기를 채울 식당부터 찾기 바쁘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인 것이다.

▶‘금장액(金張掖)’, 하서주랑 최고의 요충지

흑하(黑河)가 흐르는 장액은 하서주랑의 중부에 위치한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이자 무역도시다. 한약재로 유명한 감초(甘草)의 특산지여서 감주(甘州)라고도 했다.

 

장액이라는 지명은 흉노를 몰아낸 한 무제가 “흉노의 팔을 꺾고 중국의 팔을 펼치다(斷匈奴之臂張中國之掖).”라고 한 말에서 나온 명칭이다.이처럼 장액은 그 명칭에서부터 서역과의 무역 거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유구한 역사와문화, 풍부한 농산물로 인해, 중국인들은 장액을 ‘금장액(金張掖)’이라 부르며 하서주랑의 도시 가운데 최고로 쳤다.문화면에서도 서역불교의 전래와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장액에 오면 가장 먼저 둘러볼 곳이 대불사(大佛寺)다. 대불사는 서하 시기인 1098년에 창건되었는데 당시 이름은 가섭여래사(迦葉如來寺)였다. 1411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중건하면서 ‘홍인사(弘仁寺)’라는 편액을 내렸다.

 

청나라 강희제 때인 1678년 사찰 내에 있는 거대한 불상을 기념하기 위해 ‘굉인사(宏仁寺)’로 개칭했다. 이때부터 굉인사는 속칭 대불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1940년대부터는 훼손된 불전(佛殿)을 중심으로 다시 중건이 이루어져 지금과 같은 규모의 사찰이 되었고, 거대한 불상 덕에 1996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었다.요기를 하고 시내에 있는 대불사를 찾았다. 패루(牌樓)식으로 만든 산문(山門)에는 ‘부처님의 말씀은 변방이 없다.(佛法無邊)’라는 편액이 금빛 환하게 빛난다.

 

산문을 지나니 정전(正殿)을 중심으로 작은 전각들이 오밀조밀하다.2층 겹처마 구조의 정전에는 중국 최대의 실내 와불(臥佛)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 열반상인 이 와불은 길이가 35미터, 어깨 너비가 7.5미터다. 다리 길이만 4미터요, 귀는 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와불 주변에는 부처의 10대 제자의 소상(塑像)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회랑에는 18나한상(羅漢像)을 배치하고, 천장에는 ‘24제천(諸天)’을 그려 놓았는데, 열반을 앞둔 부처님의 모습이 대전 전체를 장엄하게 만든다.와불이 뿜어내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와불의 규모가 커서도 아니고 특별한 조형미 때문도 아니다.

 

숭고한 신앙심이 바탕이 되어 예배(禮拜)의 대상으로 모셔진 까닭이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앙의 향기가 고스란히 살아 있기에 오늘 이곳을 찾은 신심 없는 나그네도 장엄한 분위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중국 최대의 와불인 대불사 열반상

 

열반(涅槃)이란 번뇌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내가 열반에 들지 않은 지금, 나를 공양하는 것과 나의 열반 후에 공양하는 것은 마음이 평등하므로 얻는 복덕도 똑같다.”부처의 이 말씀은 그의 열반 후에 탑을 세우거나, 열반에 드신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조성하여 공양하는 공덕신앙의 기반이 되었다.

 

부처가 계시지 않아도 열반에 드신 모습에 공양함으로서 언제나 살아 있는 법신에 공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열반은 적멸(寂滅), 불생(不生), 적정(寂靜), 원적(圓寂)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부처님의 입멸(入滅)은열반이라 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 모든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상태)이라 하였다. 그것을 중국인들이 줄여서 열반으로 쓰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불도의 완성 없이 입적(入寂)한 일반 스님들에 대해서도 열반하셨다고 하니, 그릇됨을 알지만 구구절절 논함도 무상한 것이기에 그냥 지나치는 것인가. 참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 세상이다.

▶마르코 폴로의 삐뚤어진 中國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1260년 고향을 떠나 원나라 각지를 여행한 뒤 ‘세계의 서술’이란‘동방견문록’을 완성하였다. 당시 마르코 폴로는 장액에서 1년을 머물렀다. 이때 대불사를 둘러본 그의 느낌은 어땠을까?“캄프초(감주·장액)는 탕쿠트(서하) 안에 있는 매우 크고 훌륭한 도시다. 주민들은 우상 숭배자이지만 이슬람교도도 더러 있다.

 

기독교도도 있는데 세 개의 크고 이름다운 교회를 가지고 있다.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의 풍습에 따라 많은 사원과 수도원을 갖고 있으며, 그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우상들이 모셔져 있다.

 

▲마르코 폴로

 

어떤 것은 크기가 15미터나 되는데, 목석(木石)이나 흙으로 만든다. 그 위에 황금색을 칠하는데 그 모습이 아주 정교하다.

거대한 우상은 누워있으며 주위에는 여러 개의 작은 우상들이 경배를 드리는 것처럼 공손하게 큰 불상을 둘러싸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불교를 몰랐을까? 불교도들을 우상숭배자라고 불렀다. 그는 중국에서 17년 동안 생활했는데 3년 동안 관료생활도 했다.

 

그런 그가 중국인들이 전적으로 믿는 불교에 대해 기록하지 않은 까닭은 뭘까?하나님 이외의 신은 모두 우상이라는 기독교적 신심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일까?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분명 13세기 동서문명의 교류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다. 그러나 그가 구술한 내용을 음미하노라면 인간에 대한, 동양인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부족해 보인다.

 

특히, 그는 여성들의 결혼과 성에 대해서는 기회만 되면 야만인 수준으로 비하하였다. 한술 더 떠서 16세부터 24세의 청년들은 중국에 와서 쾌락을 즐기라고까지 한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있던 서양은 여성을 얼마나 존중하였던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마녀로 몰아 화형으로 생명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았던가.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의 상인이다. 베네치아는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겨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끈 도시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상인은 다른 어떤 곳의 상인들보다 자부심이 강했을 것이고, 최고의 이익을 남길 생각만 하였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 저서 세계의 서술

 

이를 위해 장사에 필요한 허세는 물론이고 부화뇌동도 서슴지 않는 상술을 터득했음에 틀림없다. 마르코 폴로에게는 대상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덕목인 인간에 대한 진실함과 따뜻함이 너무도 부족했던 것 같다.

 

그가 일평생 떠돌이로 살면서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그저 그런 장사꾼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책 여기저기에 묻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지혜보다는 물질적인 이득과 육체적인 평안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건만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 섰다. 황금빛 가사(袈裟)를 입은 채 게슴츠레 눈을 감고 계시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실로 숙연하다.

일신의 고통과 번뇌를 내려놓고 이제 막 입적을 앞둔 모습. 이 앞에서는 빈부귀천도 사리사욕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 작은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일체의 행함은 무상하나니一切行無常
진실로 생기고 나면 사라지는 법이다.信是生滅法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이미 없으니生滅旣滅已
적멸이 곧 최고의 즐거움이니라.寂滅爲最樂


부처의 사랑은 비움이다. 내려놓음이다. 스스로 그렇게 실천함으로써, 부처는 모든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그리고 내려놓아 비게 된 자리는 진실함으로 채웠다. 부처가 먼저 깨닫고 행동했을 뿐, 그 또한 부처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처는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이 곧 부처다.”라고. 부처를 존숭하기보다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음에 힘쓰라고 하셨다.

그런데 중생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처가 되지 못한다. 스스로를 비우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실천하지 못할 만큼 부처의 가르침은 어려운가 보다. 그래서 중생들은 오늘도 부처 앞에 모인다.

 

어제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기를,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것을 갖게 되기를 갈망한다. 터지는 것도 모르고 채우려고만 하는 중생들을 오늘도 부처는 보고만 계신다.“내 다 얘기했느니 더 무엇을 말할까. 그 역시 무상인 것을….”

▶서역불교를 발전시켜 선진문화를 꽃피우다

한 무제는 흉노를 물리치고 하서주랑의 무위, 장액, 주천, 돈황에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했다. 그 후 4세기 5호16국시대 약 100년간, 이곳은 오량(五凉)의 각 도읍지였다. 그래서 이 지역을 통칭하여 양주(凉州)라고도 한다. 이 지역은 서역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에 불교도 먼저 전해졌다.

불교가 장안으로 전래되기 이전에 이곳 양주 일대는 새로운 사상과 경전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당시 중원의 불교보다 선진적인 것이었는데, 하서주랑의 입지조건이 만든 것이다.

 

이 지역에는 석굴과 사원도 많이 조성되어 있다. 서역승려들의 수행에 필요했기 때문이다.이처럼 불교는 양주 일대를 중심으로 그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물론이고, 수행에 필요한 제반 문화까지도 일찌감치 정착시켰다.

 

양주 불교는 그 선진성으로 인해 북위 때에 이르러 그대로 중원에 흡수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도교와 유교가 통합된 중국 불교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의 중국 불교가 탄생하기까지, 양주 불교는 불교의 지향점이 도교나 유교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서역 불교를 중원에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불사에는 정전 외에도 둘러볼 곳이 많다. 장경각(藏經閣)과 장액오행탑 가운데 하나인 토탑(土塔)이다.장경각에는 1445년, 명나라 영종(英宗)이 하사한 6,000여 권의 불경이 보존되어 있다.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고문서가 즐비한데,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탁본이 눈에 띈다.

현장 스님이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심경(大般若波羅密多心經)’ 사본도 있다. 그러고 보니 대불사 입구에서보았던 도자기 벽화가 떠오른다. 손오공과 사오정, 저팔계가 현장 스님을 모시고 천축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묘사한 ‘서유기’ 장면들이 있었는데, 이곳을 거쳐 갔을 스님 일행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장치였다.

 

▲티베트 문화가 융합된 대불사 토탑

 

대전 뒤에 있는 토탑(土塔)은 높이가 약 34미터로 티베트 양식의 백탑이다. 아랫부분은 흰색 항아리처럼 둥글고 윗부분은 흙으로 탑을 쌓았는데 꼭대기의 모양이 마치 왕관 같다. 대불사는 시내에 있는 사찰임에도 고즈넉하다. 아마도 부처의 열반상이 있기 때문인가. 청나라 때의 동법(同法)도 쓸쓸한 가을날 이곳에 들렀다. 그리고 부처의 열반상을 바라보며 내려놓음의 어려움을 나직이 읊었다.

쓸쓸함 짙은 굉인사寥落宏仁寺
먼지 쌓인 불상은 한가롭고尘侵佛自閑.
성현의 석비도 닳아졌는데雄碑摩聖迹
고목만 굳세게 좌선하고 있네.古木壯禪觀.
황제가 하사한 함에는 삼장이 있고玉軸函三藏
금빛 부처는 아홉 칸을 길게 누워있건만金軀臥九間.
내려놓음을 어찌해야 이겨낼 수 있는가那堪牲牧厂
낙타와 말이 얼룩진 이끼만 밟고 섰구나.駝馬踐苔斑.

 

출처 / premium Chosun.com / [허우범의 실크로드 대장정]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