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펑(開封.개봉)ㅡ중국 드라마 포청천으로 유명해진 카이펑
▲개봉(開封·카이펑)
개봉(開封·카이펑)은 정주에서 동쪽으로 차로 1시간 거리의 황하 유역에 있는 고도(古都)다. 중국 역사상 전국(戰國) 시기의 위(魏), 오대(五代) 시기의 후량(後粱),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 그리고 북송(北宋)과 금(金)이 이곳에 도읍을 정했으므로, 오늘날 개봉은 ‘칠조도회(七朝都會)’의 영예를 안고 있다.
특히 개봉은 북송 때 동경(東京)이라 불렀는데, 당시 인구가 150여 만 명에 달한 세계 최대의 도시 중의 하나였다. “변경(汴京)의 부유함과 화려함을 능가하는 도시는 천하의 어디에도 없었다.”고 한다.
개봉을 또 변경(汴京)이라고도 칭하는 이유는 북송 때 이곳에 변하(汴河)라는 인공 운하가 있었던 까닭이다. 이 변하는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는데 황하와 장강(長江)의 수계를 이어주었다.
당시 남북의 물자들이 이 변하를 통해 동경에 집결했으므로, 동경이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상업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북송 때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길이 5m 29㎝의 거대한 풍속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보면 당시동경이 얼마나 부유하고 화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개봉은 황하에 의지해 발전했고 또 황하에 의해 몰락한 비운의 도시다. 역사상 7 차례나 도시가 완전히 수몰되었다.
오늘날 개봉 사람들은 개봉을 ‘성나성(城摞城)’이라고 부른다. 역대 왕조의 도성들이 차례로 수몰되어 마치 시루떡처럼 한층, 한층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오늘날 개봉이 지방의 일개 도시로 쇠락하고 볼만한 유물들이 중국 제5대 고도(古都)에 걸맞지 않게 그렇지 많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개봉 북성문(北城門)을 지나 북쪽으로 10㎞ 정도 나가면 이른바 ‘현하(懸河)’의 기관(奇觀)을 볼 수 있다. 황하의 하상(河床)이 개봉 시내 지면보다 10m 이상 높은 곳이다.
쉽게 말해서 황하의 물이 도시의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하상이 조금씩 상승하여 개봉 사람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 폭탄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역대 왕조의 궁전과 도시들이 지하에 그대로 매장되어 있으므로, 고고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개봉은 정말로살아있는 박물관인 셈이다.
개봉 사람들은 언젠가는 발굴을 단행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개봉이 다시한 번 세계적 관광지로 부상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11월 28일 아침, 동풍로(同風路) 집에서 가까운 북부시외버스터미널(北站·베이잔)로 걸어갔다. 정주에서 개봉 가는 버스는 정주역 근처의 이마루(二馬路) 터미널, 남부터미널, 북부터미널 등에서 탈 수 있다.
거리가 멀지 않은 까닭에 두 도시 간은 시내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집 근처의 수마공원(數碼公園: 디지털공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시민들이 나와 산책을 하고 있다. 노인들이 새장을 들고 나와 나무에 걸어놓고 관조(觀鳥)를 즐기고 있다. 청아한 꾀꼬리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귀를 간질인다.
이 공원은 이름이 말해주듯 근년에 조성한 현대식 공원이다. 올 3월에 처음 정주에 왔을 때 아침마다 수마공원에 나가 조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주일도 못 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다. 수마공원에서 정동신구(鄭東新區)로 이어지는 크고 긴 인공수로가 있는데, 물이 오염되어 악취가 진동하고 쓰레기들이 둥둥 떠다녀 도무지 운동할 맛이 안 났기 때문이다. 가끔 인공수로를 지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수로는 언제나 깨끗해질까. 한 10년은 지나야겠지.’
그런데 웬걸, 이 날 아침에 지나가면서 본 수로의 물은 지리산 청정수는 아니더라도 머리를 감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한 물로 변해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악취가 진동하던 물이 이렇게 깨끗하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군대 시절에“안 되면 되게 하라”는 사단 구호가 불현듯 떠오른다. 정말로 중국 사람들은 ‘하면 한다’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아침 7시 40분 첫차다. 개봉 가는 버스는 길이가 한국의 시내버스 한 배 반쯤 되는 것 같다.요금은 7위안이다. 차 정면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막 올라타는데 운전수가 노려보며 화를 낸다. “당신이 뭔데, 감히 사진을 찍어. 어디에다 쓸려고 그래?” 아마 아저씨는 내가 사진을 찍어 무슨 고발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아니,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데…”“응, 한국에서 왔다고, 그럼 찍어도 돼. 아마 한국은 이런 차가 없을 걸.” 아저씨 표정이 웃는 어린아이처럼 밝아진다. 고발은 고사하고 버스회사에 상을 주어야할 만큼 버스 내부가 청결하고 안락하다.
도심을 벗어나자 안내양이 마이크를 잡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중국어 인사를 마치고 또 유창한 영어로 얘기를 한다.
‘아니, 세상에. 하남성의 시내버스 안내양이 영어로 인사를 하고 안내 방송을 하다니!’ 물론 간단한 영어 인사법만 달달 외워서 말했겠지만, 발음 좋고, 표정 또한 진지하다. 아침 이른 시간에 정주에서개봉에 가는 외국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만은, 눈치 빠른 아가씨가 한국인 한 명이 탄 것을 알고 회사에서 배우고 시킨 대로 영어 서비스를 했을 것이다. 정말 중국인들은 ‘한다면 하는 민족’이다. 그런데 영어 방송을 마치자 아가씨도 쑥스러운 듯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는다.
정주에서 개봉까지 연결된 ‘정개대도(鄭開大道)’는 ‘대도’라는 이름답게 왕복 10차선의 비행기 활주로 같은 도로다. 도중에 한 번도 정차하지 않고 곧장 달린다. 하남중의학원(河南中醫學院)의 신 캠퍼스가 보인다. 길이가 100m 남짓 하는 건물이 위용을 자랑한다. 하늘로 솟지 않고 좌우로 뻗은 특이한 건물 형태다.
대평원 곳곳에는 농가의 비닐하우스가 펼쳐져 있다. 농부들이 지붕에 올라가 밤에 쳐놓았던 짚으로 만든 덮개를걷어 올리고 있다. 이곳의 비닐하우스는 직삼각형 형태의 모양으로 벽은 토담이고 지붕 부분만 비닐로 덮었다. 또 해가 지면 보온을 위해 지붕을 덮개로 덮는다.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구조다. 중국 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우리나라는 태풍이 불거나눈이 많이 내리면 비닐하우스들이 무너져 농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본다. 우리도 이런 구조로 지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개봉 시내 입구인 금명광장(金明廣場)
개봉 시내 입구인 금명광장(金明廣場)에 도착했다. 안내양이 다가와 시내 중심지까지 16번 버스를 타고 가고, 요금은 1위안이라고 자세히 일러준다. 안내양의 사소한 친절과 따뜻한 미소가 처음 외지에 당도했을 때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관광 산업의 성패는 유적이 있는 게 아니고 사람에 있다고 생각한다.
버스 안은 노인들뿐이다. 사람들이 올라 탈 때마다 운전석 옆에 있는 전자카드 감지기에서는 계속해서 ‘노인카드’,‘노인 카드’라는 기계음만이 울릴 뿐이다. 노인 카드를 소지하면 요금이 거의 무료나 다름없다고 한다. 하남성에서는 유명 관광지의 입장료가 무척 비싸다. 아마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게다.
어떤 곳은 공원(公園) 급 유원지에 불과한데도 한국 돈 4천원 이상을 받는 곳도 있다. 하지만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무료다. 버스비 싸지, 입장료 무료지, 그래서 의외로 중국 노인들은 여행을 많이 다닌다. 한창 일하고 돈 버는 중장년층에게바가지를 ‘왕창’ 씌워 국고로 들어간 돈이 노인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간다면, 그것 또한 잘못된 정책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먼저 개봉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어느 도시를 여행하든 제일 먼저 박물관부터 가봐야 그 도시의 흐름을 제대로읽을 수 있다.게다가 박물관 직원들은 그 도시 문화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한가한 박물관에서 할 일이 별로 없어 다소 따분해 하는 그들에게 말을 걸면, 십중팔구 귀중한 정보를 쉽게 ‘공짜’로 얻을 수 있다. 지난 봄 이미 개봉에 간 적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박물관이 휴관이었다. 월요일에 갔기 때문이다. 무료 입장 티켓을 받아들고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모여 있다.
이름이 량즈차오(梁志超)라는 화가의 화조화(花鳥畵) 전시회가 마침 박물관에서 열리는 첫날이다. 카메라를 든 취재 기자도 있는 걸로 보아 상당히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인 듯하다.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1층 전시실을 들어가 보았다. 불청객이 제일 먼저 화조화를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안내 팸플릿에 의하면 량즈차오는 개봉시 신문출판국 당조서기(黨組書記) 겸 국장인데, 밀화(密畫) 화법(畵法) 분야 화조화의 대가(大家)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배고프고 관계(官界)와는 거리가 먼 법이데, 이 분은 직함으로 보아 예술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공직 사회에서도 크게 성공한 것 같다. ‘당조서기’라면 개봉의 모든 언론, 출판계를 장악하고 있는 책임자일 것이다.
중국화에는 문외한이지만 그의 그림은 필치가 대단히 섬세하고 전통 중국화와는 다르게
빨간 색 등의 자극적인 색깔을 많이 사용하여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2층 전시실에는 도자기류의 유물들이 시대별로 많이 진열되어 있다. 송대(宋代)는 청자가 대단히 유명하다.
고려청자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송대의 도자기들은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고려청자처럼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청자는 보이지 않는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인가’ 3층 전시실에는 ‘명청황가용품전(明淸皇家用品展)’이 열리고 있다. 명나라, 청나라 때 황실에서 사용한 물건들을특별히 전시해 놓은 것이다.
비단, 가구, 황제의 말안장 등 어느 것 하나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 없다. 내 손에 카메라가 쥐어진 것을 본 안내인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곳에서는 ‘절대 촬영 불가’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한다. 그런데 청나라 건륭제 때 의장용으로 쓰였다는 보검이 너무 마음에 든다.
“아저씨, 한국에서 불원천리하고 온 관광객인데 딱 하나만 찍읍시다. 이걸 못 찍고 돌아가면 너무 아쉬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아요.” “한국에서 왔다고? 당신 직업이 뭐야?”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중국문화를 강의하는 사람인데요.” “그래요. 암, 그럼 찍어야지요. 교수님에게만 특별히 허락하는 거예요.”
그 순간부터는 그 분이 양손을 몸 앞에 모으고 전시실 전체의 유물들을 꼼꼼하게 설명해 준다. 개봉박물관은 유물이 그다지 많지 않다.그렇지만 나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준 그 안내인의 말 의하면, 개봉의 보물들은 모두 땅 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개봉이 아시아의 ‘폼페이’가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개봉박물관 앞에는 북송 때 유명한 청백리였던 포청천(包靑天)의 이름을 딴 포공호(包公湖)가 있다.
이 호수 근처에 개봉부(開封府), 포공사(包公祠), 대상국사(大相國寺) 등의 유명 관광지들이 산재해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포공사로 걸어갔다. 입장료는 20위안이다.
포청천의 이름은 포증(包拯), 자는 희인(希仁), 고향은 개봉이 아니라 여주(廬州: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사람이다.그는 지현(知縣), 지부(知府), 감찰어사(監察御使), 추밀부사(樞密副使)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공무를 공평하게 수행하고 비리는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자신에게는 한 없이 엄격했던청백리였다
북송 이래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그는 가장 공정하고 청백한 관리의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당 건물들에는 ‘초직청렴(峭直淸廉)’, ‘철면무사(鐵面無私)’, ‘공정광명(公正光明)’ ‘집법여산(執法如山)’ 등의 명언을 새긴 현판들이 걸려 있는데, 이 가운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사로움을 없앤다.”는 ‘철면무사’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모름지기 관리 노릇을 하는 자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사로운 정을 끊고 국민과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당한 말이지만, 오늘날 한국이나 중국에서 포청천 같은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공무원들의 비리를 신문지상에서 읽어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역대 지도자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들이 벽에 붙어있다. 포청천처럼 그들도 자신이 청백리라는 것을 ‘인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포공호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개봉부로 걸어갔다.
포청천이 이곳에서 공무를 집행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곳은 송나라 때 지어진 건물들이 아니고 후대에 중건된 것이다. 다만 송나라 때의 건축 기술 분야의 유명한 서적인 『영조법식(營造法式)』의 내용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정청(定廳), 의사청(議事廳), 매화당(梅花堂) 등을 중심축으로 하여 여러 건물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건물군 이외는 별로 볼만 한 것이 없다. 밖에서 봐도 내부 구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곳에 입장료50위안을 주고 들어가자니 돈이 아깝다. 그래서 개봉부 성벽에 걸려있는 안내판을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송도어가(宋都御街)’로 발길을 돌렸다. 개봉 시내는 유명 관광지답지 않게 전반적으로 지저분하다. 삼륜 자건거와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든 삼륜차들이 많이 보인다.
▲관광 비수기라서 그런지 외부에서 온 관광객들은 눈에 거의 띄지 않고 노인들만 북적인다.
개봉은 유독 노인들이 많은 도시다.
송도어가는 1990년에 북송의 수도 동경(東京) 거리의 일부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이곳은 주로 전통 그림,
문방사우, 골동품 등을 파는 상점이 많은 데, 분위기가 내 고향 전주의 태조로(太祖路)와 많이 닮아 마치
고향 거리를 걷는 듯 하다. 이곳의 한 중심에 ‘고려의포(高麗醫鋪)’라는 병원이 있다.
한중 양국의 역사상 두 나라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때가 고려와 송나라 때였다.
아마 이런 연유로 송도어가의 한 중심에 ‘고려’라는 말이 들어 간 상호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고려의포 바로 맞은편에 도향거(稻香居)라는 유명한 음식점이 있다. 청(淸) 광서(光緖) 8년(1882)에 개업한 군만두로 유명한 집이다. 개봉의 대표적인 별미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관탕시아오롱파즈(灌湯小籠包子)’와 ‘궈티에(鍋貼)’다. 전자는 뜨거운 육수가 들어있는 고기만두인데 ‘제일루(第一樓)’라는 식당에서 파는 것이 유명하다.
하지만 개봉 시내에는 제일루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하는 집이 많아 어느 집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후자는 만두를 구울 때 솥바닥에 밀가루 껍질막을 얇게 깔아 만두들이 서로 달라붙게 하여 만든 일종의 군만두다. 군만두도 맛있지만 군만두에 달라붙은 이 껍질막이 훨씬 별미다. 기름에 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도향거’가 바로 이 ‘궈티에’를 파는 유명한 집이다. 한 접시에 10위안이다. 내가 살고 있는 정주에도 ‘궈티에’가 있지만 역시 ‘도향거’의 것이 천하의 별미다. 중국 음식은 대체적으로 양이 많아 1인분을 주문해 두 사람이 먹어도 부족함이 없다.
송도어가의 끝자락에는 개봉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용정(龍亭)이 있다. 호수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용정(황제의 정자·亭子)이 사방을 압도한다.입장료는 35위안이다. 용정 앞 광장에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한 여인이 눈그 노랫가락이 어찌나 애절하고 비통한지, 듣는 이의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
‘저 여인은 도대체 어떤 한(恨)을 품었기에 저렇게 슬피 울며 애간장을 녹일까.’ 사람들은 이 건물이 북송 때의 황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용정 일대가 북송 황궁의 금원(禁苑)이었다 나중에 황하의 범람으로 금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청(淸) 옹정(擁正) 12년(1734)에 하남총독(河南總督) 왕사준(王士俊)이 이곳에 만수궁(萬壽宮)을 지어 황제의 위패를 봉안했다. 문무관원들이 정기적으로 이곳에 와 배례를 올렸다. 봉건 시대에 황제는 ‘진용천자(眞龍天子)’로 불렀으므로,
나중에 이곳을 용정(龍亭)이라 한 것이다.
용정 안에는 건륭(建隆) 원년(960)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진교(陳橋)의 병변(兵變)’ 후 황위에 오른 뒤 숭원전(崇元殿)에서 문무백관들과 함께 대연회를 베푼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용정 뒤에는 비정(碑亭)이 있다. 남루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어떤 이는 비석을 향해 향을 피우며
절을 하고 있고, 어떤 할머니는 신령스럽게 생긴 나무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고, 어떤 이는 통곡을 하고
있고, 어떤 이는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비석 앞면에는 그림도 아닌 것 같고 글자도 아닌 것 같은 이상하게 생긴 도형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오악진형(叙五岳眞形)’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마 주문과 부적을 통해 온갖 병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가(道家)의 부록파(符箓派)와 관련된 주문(呪文)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화려한 경제 성장의 이면에 깔린 9억 농민들의 슬픈 사연들이 이곳 용정에서 기도와 울음 그리고
노랫가락 속에서 절절히 배어나오는 것이다. 울적한 마음을 호수에 이는 물결에 실어 보내고 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남대학(河南大學) 구캠퍼스로 갔다. 하남성에서 캠퍼스가 가장 아름다운 학교라는 얘기를 들었던 까닭이다
▲1912년 린보샹(林伯襄)을 대표로 하는 하남성의 선각자들이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하남유학구미예비학교(河南留學歐美豫備學校)’를 세웠는데 지금 하남대학의 전신이다.
▲원래 구미 유학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인 까닭에 건물들이 서구풍이며 아울러 중국 전통의 건축
양식과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54년 하남성의 수도가 개봉에서 정주로 옮겨가기 전에는 하남대학이 하남성 최고의 명문대학이었으나, 지금은 정주대학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하남대학 바로 옆에는 유명한 철탑공원이 있다. 대학 구내의 후문과 연결되어 있다. 입장료는 20위안이다. 갈색 철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개봉에 와서 철탑에 오르지 않으면, 개봉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물이다.
▲북송 황우(皇祐) 원년(1049)에 개보사(開寶寺) 안에 지은 높이 55m, 8각 13층 탑이다.
그런데 안내문을 읽어보니 철탑이 아니라고 한다.
탑 표면에 갈색의 유리기와를 상감한 탑인데, 오랜 세월이 흐르자 그 표면이 마치 녹슨 철처럼 보여 지금은
철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송(宋)은 비극의 왕조였다. 황제와 관리들이 그다지 부패하지 않았고 수준 높은 문화와 당시 세계 최대의 경제력을 자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송은 금나라에 의해 남송은 몽고족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개봉은 황하의 범람에 온 도시가 수장되어 폐허가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철탑은 천 년의 잔인한 세월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래서 개봉 사람들이 이 탑에 더욱 진한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개봉 시내에는 유명한 불교 사찰이 하나 있다.
북제(北齊) 천보(天保) 6년(555)에 창건된 중국 10대 명찰 중의 하나인 대상국사(大相國寺)다. 특히『수호전(水滸傳)』의 노지심(魯智深)이 사원 마당의 수양버들을 통째로 뽑아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대상국사는 북송 때 황실의 사원으로서 크게 번창했다.
그런데 현존하는 건축물들은 모두 명청(明淸)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산문(山門)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좌우 양쪽으로 고루(鼓樓)와 종루(鐘樓)가 있다. “새벽에는 종을 치고, 저녁에는 북을 두드려서 시간을 알린다.”는 중국 불교의 규정에 따라 지은 누각이다.
종루 안에는 높이 2.23m, 무게가 5톤에 달하는 청나라 건륭제 때 만든 동종(銅鐘)이 있다. 초겨울 서리 내릴 때 종을 치면 성안 곳곳에 퍼지는 종소리가 청량하고 은은하다고 한다. 그래서 자고로 ‘상국사의 상종(霜鐘)’은 ‘변경팔경(汴京八景)’ 중의 하나로 쳐주고 있다. 천왕전(天王殿) 안의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은 다소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천왕전 뒤에는 상국사의 주전(主殿)인 대웅보전이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중원의 제일전(第一殿)’이라고 한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동방약사불, 서방아미타불을 봉안해 놓았고 좌우에는 십팔나한이 서 있다. 대웅보전 뒤에는 사면천수천안관세음보살(四面千手觀世音菩薩) 및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봉안한 나한전(羅漢殿)이 있다. 전각이 팔각 모양이어서 속칭 ‘팔각유리전(八角琉璃殿)’이라고도 하는데, 그 건축 형태가 특이하여 중국에서는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한다.
2층 장경루(藏經樓)가 상국사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불감(佛龕) 가운데에는 석가모니 백옥불(白玉佛)이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앉아 있다. 해외 화교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상국사에서 나와 근처의 상국사버스터미널로 갔다. 개봉은 한나절이면 웬만한 유적지들은 다 둘러볼 수 있다. 내 생각에 개봉은 한 나라의 도읍지로서 적합한 곳은 아니다. 우선 주변에 산이 없어 조금은 삭막한 분위기다. 또 개봉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황하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북송 때는 개봉을 중심으로 수로가 대단히 발달하여 남북의 물자들이 이곳에 쉽게 집결할 수 있어서 도시의 번영을 구가 했지만, 결국 황하의 잦은 범람에 의해 과거의 영화가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에 들어와 하남성의 수도를 개봉에서 교통이 편리하고 숭산(嵩山)이 있는 정주로 옮긴 게 아닌가 한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내가 살고 있는 가속원(家屬院)에 도착했다. 막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데 조화(弔花)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장례(葬禮)를 치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조화가 한국 것과는 다르게 화려하고 앙증맞게 생겼다. 얼른 카메라를꺼내 셔터를 누르자 갑자기 안에서 서너 명이 뛰쳐나온다.
당신, 누군데 남의 집 앞에서 사진을 찍는 거야?” “경공업대, 한국인 교수인데요. 장례 풍습을 알고 싶어서 그만 실례를 했네요.” “아, 그래요.” 다들 두 말 않고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진을 찍다가 여러 번 혼쭐난 하루다. 하지만 하남성 사람들의 넓은 아량과 친절에 감동을 받은 하루이기도 하다.
출처 / hankyoreh.com / 한겨레불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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