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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ㅡ크라쿠프(Kraków)ㅡ비엘리츠카 소금광산 내 킹카대성당

by 삼수갑산 2021. 10. 8.

비엘리츠카(Wieliczka)ㅡ비엘리츠카 소금광산 내 킹카대성당

폴란드의 남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크라쿠프 도시권(Kraków metropolitan area)에 포함되어 있다. 1290년에 폴란드의 프레미슬라스 2세 공작이 이 마을을 설립했다.

 

1975년부터 1998년까지는 크라쿠프 주에 속하였으나, 1999년부터 리틀 폴란드 주에 속하게 되었다.폴란드의 제2대 도시인 크라쿠프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비엘리츠카의 남쪽에는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 광산 중 하나인 비엘리츠카 소금광산(Wieliczka Salt Mine)이 있으며, 소금 광산을 기반으로 한 관광 산업이 주요 산업이다.

고대 켈트족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적 문서에서 최초로 언급된것은 1125년이다. 선사시대부터 소금 채굴이 시작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 광산 중 한곳인 이곳의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이 체계적으로 개발된 것은 13세기부터 였다.

 

소금 광산 내부에는 광부들이 암염을 조각하여 만든 예배당과 조각상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암염을 조각하여 만든 부조 작품과 요한 바오로 2세의 조각상, 암염으로 만든 샹들리에 등이 백미로 꼽힌다.

 

197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이 소금 광산을 방문하기 위해 해마다 1천만 여 명의 관광객이 비엘리치카를 찾는다.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휴식시간에도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에서 일하는 광산 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망치와 정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갱 안의 암염 벽에 부조를 조각하고, 조각상과 제단까지 만들었다.

 

일찍이 폴란드 왕국의 재정을 풍부하게 했던 암염 광산은 현재 훌륭하게 복원되었다. 일부에서는 채굴도하지만, 산출량은 아주 적다.광산 노동자들의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흥미 있는 작품과, 암염 광산의 채굴 기술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이 곳에서 볼 수 있다.

 

킹가 공주의 전설-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와 결혼하기 위해 폴란드로 향하던 킹가 공주는 트란실바니아의 소금물 습지에 있는 샘에서 발길을 멈추고 약혼 반지를 그 속에 던져 넣었다.

 

폴란드에 도착한 공주는 비엘리치카 주민들에게 암염 광산을 개발하라고 했다. 주민들이 공주의 말대로 땅을 계속 파내려 가자 암염층이 나왔다고 한다.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의 역사는 이 전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킹가 공주는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과 그 주변에 발전한 비엘리치카 마을의 수호신과 같은존재가 되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암염을 파 내려간 노동자들은 지하 100m 지점에 길이 55m, 폭 18m, 높이 12m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킹가 공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작업의 안전을 기원하는 뜻으로 거대한 소금예배당을 건설했다.

 

이 예배당에는 지상의 예배당과 다름없이 제단이나 촛대는 물론이고, 갖가지 조각상까지 갖추어 놓았다.이 모든 것들은 광산 노동자들이 암염을 캐내기 위해 광산에서 사용하는 도구만으로 조각한 것이다.비엘리치카 마을의 중심부에는 악엽송으로 만들어진 성세바스티안 성당이 있다.

 

16세기에 건설된 이 성당에는 수많은 장식으로 이루어진 바로크 양식의 제단과 함께, 이 작은 마을에‘백금’이라고도 부르는 암염을 가져다 준 킹가 공주의 옛 전설을 표현한 그림이 남아 있다.13세기경부터 본격화한 비엘리치카 암염 채굴은, 이윽고 폴란드 왕국의 경제를 좌우할 만큼 중요해졌다.

 

이 지방에는 이미 석기 시대부터 증류를 통해 소금 결정을 추출하는 방법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암염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하자, 폴란드 왕 카지미에슈 2세는 이 곳에 견고한 성벽과 요새를건설하고 채굴권을 독점했다.14세기 이후, 폴란드 왕가는 수입의 3분의 1을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가까운 이 암염 광산에서 채굴되는암염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암염 광산은 17세기경부터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산출량이 매우 적다. 1289년 슐레지엔의 제후 헨리크 4세가 비엘리치카에 자치권을 부여할 때, 서류에 이 마을의 이름을 라틴어로‘마그눔 잘(Magnum sal)'이라고 기록했다.이는 ’거대한 소금‘이라는 뜻으로, 폴란드인은 그 말을 폴란드어로 그대로 번역해 ’비엘카 술(Wielka sol)'이라고 불렀다. 훗날 이것이 마을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700년 동안 비엘리치카의 광산 노동자들은 약 2600만㎢의 암염을 채굴했다. 9층으로 나뉜 갱 안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갱도가 갖추어져 있는데, 이 갱도의 깊이는 300m, 총 길이는 300km에 이른다. 한편, 이 거대한 채굴 공간은 때때로 예배당이나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왕의 조각상, 난쟁이 조각상,광산 노동자들의 조각상, 코페르니쿠스의 조각상 등이 있는 작은 방도 있다.

 

지하 공간에는 강한 압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 암염 광산을 유지하고 채굴할 수 있는 기간은 몇 년밖에 안된다.

그러나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은 예외였다. 암염층이 너무나 거대하고 단단했기 때문에 버팀목으로 지탱해 두면 언제까지나 안전하게 소금을 채굴할 수 있었다. 갱 안에는 목재를 사용해 예배당에 어울리는 중후한 분위기로 꾸며 놓은 방도 있다.

 

암염 광산에서 가장 오래된 예배당은 광산 노동자의 수호성인인 성안토니우스에게 바쳐졌다. 현재 심하게 마모된 이 성인의 상은 17세기에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에서 일하던 안토니 쿠츠즈코브스키가 만들었다. 킹가 공주의 예배당에 있는 조각이나 부조 작품은 소금 결정으로 만들어진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빛나고 있다.

 

이 곳은 지하 최대의 예배당으로, 음향 효과가 뛰어나 콘서트가 개최되기도 한다. 이집트오 피신하는 성가족, 헤롯 왕의 유아 학살, 가나의 결혼 등 성서의 장면이 무려 700년에 걸쳐 벽면에 조각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모방한 작품도 있다.

 

비엘리치카는 현재까지 채굴이 계속되고 있는 암염 광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에 속한다. 갱 안에는 중세에서 현제에 이르기까지 광산 기술의 발전 역사를 알기 쉽게 더듬어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수많은 도구나 기계도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최근 복원된 박물관의 중앙에는 현장 감독이 사용하던 호화로운 장식이 곁들여진 무기류와 광산 책임자의 휘장 등이 장식되어 있다.또한 전시품 중에는 17세기의 동판화가 윌리엄 혼디우스가 작성한 광산 지도도 있는데, 그 곳에는 장식 문양과 함께 광산의 일산적인 풍경도 그려져 있다.

 

이 지하 박물관에는 보존 상태가 좋은 오래된 바퀴의 굴대, 수차, 가축의 힘을 이용해 움직였던 권양기 등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몇 세기에 걸쳐 갱도의 조명, 환기, 공기 정화 등의 설비가 서서히 갖추어진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이윽고 광부들은 갱 안에서 암염을 반출할 때 광차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광차는 처음에는 사람이 끌었지만 나중에는 말을 이용했다. 18세기의 ‘폴란드 분할’로 오스트리아 제국에 병합된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시찰할 때, 갱 안에 협궤 철도가 부설되었다. 길이가 3km에 이르는 철도를 따라가면 지하 136m까지 내려갈 수 있다.

 

암염 덕분에 부를 누린 것은 폴란드 왕실만이 아니었다. 광산 노동자도 그 혜택을 입었다. 1534년, 제염업자 세베린 보너는 은을 박아 넣어 호화롭게 장식한 뿔을 이 지방의 광산 노동자 조합에 기증했다. 암염 채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 폴란드 왕실은 착실하게 광산을 경영했다.

 

항상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던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은 정성껏 손질되고 복원되었다. 비록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옛날처럼 갱 안에서 암염을 채굴해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이 있다.현재 갱도 대부분은 폐쇄되었지만, 일부는 견학용 코스로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있으며, 거대한 공간을보유한 지하 채굴 유적지는 극장이나 카페 또는 우체국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1964년에는 지하 211m 지점에 요양소가 설치되어 기관지 천식이나 알러지 환자가 요양하고 있다. 주위 암염의 영향으로 갱 안에 세균류가 매우 적고 공기 속에는 소금을 비롯한 미네랄 성분이 풍부히 포함되어 있어 치료 효과가 있는 듯하다. 최근 갱 안의 일부에 자주 물이 차서,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목록’에 첨가되었다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1978년 유네스코 지정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입구 현판

 

▲지하 계단

 

▲지하2층 90m

 

▲1978년 유네스코 1호 지정 마크

 

▲킹카 대성당

 

소금광산의 최고 볼거리인 킹가 대성당(The Chapel of Blessed Kinga)은 지하 101m에 위치하는데 길이 54m의 그 웅장한 규모도 놀랍다.

 

킹가 공주의 전설-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와 결혼하기 위해 폴란드로 향하던 킹가 공주는 트란실바니아의 소금물 습지에 있는 샘에서 발길을 멈추고 약혼 반지를 그 속에 던져 넣었다. 폴란드에 도착한 공주는 비엘리치카 주민들에게 암염 광산을 개발하라고 했다.

 

주민들이 공주의 말대로 땅을 계속 파내려 가자 암염층이 나왔다고 한다.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의 역사는 이 전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킹가 공주는 비엘리치카 암염 광산과 그 주변에 발전한 비엘리치카 마을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암염을 파 내려간 노동자들은 지하 100m 지점에 길이 55m, 폭 18m, 높이 12m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킹가 공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작업의 안전을 기원하는 뜻으로 거대한 소금 예배당을 건설했다.

 

이 예배당에는 지상의 예배당과 다름없이 제단이나 촛대는 물론이고, 갖가지 조각상까지 갖추어 놓았다. 이 모든 것들은 광산 노동자들이 암염을 캐내기 위해 광산에서 사용하는 도구만으로 조각한 것이다.

 

단 세 명의 광부가 65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만들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그야말로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광산 내 킹카 대성당

 

▲광산 내 킹카 대성당

 

▲제대  

 

▲지하 성당 내부

 

▲제대 성모자상    

          

▲소금으로 만든 대성당 샹드리에 

 

▲소금으로 만든 대성당 샹드리에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 조각

 

▲성당 부조

 

▲성당 부조

 

▲예수님 탄생 부조

 

▲최후의 만찬 

          

▲소성당

 

▲소성당

 

▲소성당 제대

 

▲소성당 십자고상 

 

▲지하 성당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벽화

 

▲교황 요한 바오로2세

 

▲교황 요한 바오로2세

 

1999년에 추가된 교황 바오로 2세의 조각상이다 킹가 축일(7월 24일), 성 바르바라 축일(12월 4일)과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이 곳에서 직접 미사가 열린다

 

▲무너짐 방지 목재 

 

▲킹카 공주의 전설을 담은 모형물

 

공주가 약혼반지를 떨어트려서 이걸 찾으려고 헤집고 다니다가 반지와 더불어 암염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소금광산의 기원에 관한 전설이 있다.

 

▲천장의 소금 결장

 

▲소금조각

 

▲레벨 3로 내려가는 길

 

▲소금 채취 작업 

 

▲지하 성당 건설 3인 광부 업적 기념물

 

▲지하 소금 박물관 입구

 

▲소금 바닥 통로

 

갱도 건설 목수들의 조형물

 

▲괴테 기념상

 

▲요세프 필더드 스키 비요스 장군(1867 ~ 1935) 상

 

▲붕괴 방지

 

▲붕괴 방지

 

▲광부 생활 밀랍인형

 

▲소금 작업 말 이용

 

▲소금운반 궤도

 

▲지하 광장 승강기 입구

 

▲고속 엘리베이터 지지대

 

▲고속 엘리베이터

 

▲1990년까지 700년간 소금 채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