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탈랴(Batalha)
스페인 카스티야 군에 대한 전승기념으로 지은 바탈랴 수도원
▲바탈랴 수도원 (Monastery of Batalha)
바탈랴 수도원은 포르투갈 레이리아주 레이리아시(市)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소나무숲이 펼쳐진 분지에 있으며, 원명은 산타마리아 다 비토리아 나 바탈랴(Santa Maria da Vitória na Batalha)로 도미니크 수도원의 하나이다.
1385년에 이 부근의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포르투갈의 주앙 1세(재위: 1385∼1433년)는 카스티야군을 격파하고 왕국의 독립을 지켜 이를 기념하여 1386년에 성모를 모시는 커다란 수도원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전쟁 승리를 기념해 이 수도원을 ‘전투(바탈랴)의 수도원’이라 불렀다.
포르투갈의 고딕양식과 마누엘양식을 오늘날에 전해주는 대표적 건물이자 포르투갈 국민에게는 독립과 긍지를 말해 주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한 이 수도원은 14세기의 중요한 건축물로서 권력의 상징이자 왕실의 영묘로 사용되었다.
풍부하게 장식된 수도원은 포르토 데 뫼스에서 가져온 석회석으로 쌓아 올려졌는데, 이 석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란 황토색으로 변했다. 이 건물은 유럽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영국 고딕의 강한 요소들이 결합된 레요냥과 플랑부아양 고딕의 혼합체로서 원래적 포르투갈 양식을 지니고 있다.
모든 도미니크 성당들처럼 이 성당도 종탑 하나가 부족하다.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 장군의 기마 동상이 있는 큰 광장을 마주하는 서쪽 파사드는 부벽들과 거대한 기둥들에 의해 셋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창설자의 예배당(Capelo do Fundador), 복도의 한쪽 벽, 그리고 돌출된 현관이다.
이 파사드의 우측 면에는 이 복합건물에 추가된 분리된 8각 구조물인 미완 예배당들(Capelas Imperfeitas)이 있다. 동쪽면에 떨어져서 성가대석의 옆에 성당 회의소(Sala do Capitulo)가 있다. 주앙 1세 왕의 사방회랑은 성당과 이 회의소의 경계상에 있다. 이 구조물은 아폰수 5세의 사방회랑으로 이어진다. 복합건물의 북쪽 면에는 무명 전사들의 묘가 있다.
포르투갈 레이리아 근교의 소촌(小村). 1385년 스페인 카스티야 군에 대한 전승기념으로, 아비스의 호안 1세(Joan I) 가 건립한 산타 마리아 다 비토리아 수도원(1402~1533)으로 유명 수도원 성당은 도미니코회 형식의 고딕 양식,창설자 예배당은 플랑부아양양식,왕가의 회랑과 미완성의 예배당은 고딕양식과 마누엘 양식의 멋진 융합을 나타내며 포르투갈 고딕 양식과 마누엘 양식 대표작의 하나이다
▲바탈랴 수도원 (Monastery of Batalha)
수도원은 1386년에 시작하여 1517년경에 마친, 건설하는데만 일곱 왕들의 통치를 거치는 2세기가 걸렸다. 수도원 건설은 15명 건축가들의 노력들이 동원되었으나, 그러나 그들 중의 7명에 대한 타이틀은 그들에게 수여된 명예에 지나지 않았다. 건설은 인력과 자재의 특별한 자원들을 사용하는 굉장한 노력이 요구되었다.
그 당시까지 포르투갈에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기술들과 예술적 양식들이 개발되었다. 건설은 포르투갈 건축가 아폰수 도밍게스에 의하여 1386년에 시작되었고, 그는 1402년까지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평면을 설계하였는데, 성당 내의 많은 구조물들과 회랑은 그의 성과물들이었다.
그의 스타일은 근본적으로 중기 프랑스식 고딕인 레요냥 고딕이었지만 영국 고딕 시대로부터의 영향들을 받았다. 요크 민스터 사원의 외양과 캔터베리 대성당의 회중석과 익랑에서의 유사함들이 수도원에 나타나 있다. 수도원의 파사드는 포르투갈 후기 고딕양식을 띠고 있으며, 성당은 동일한 양식의 걸작으로서 작은 탑과 아치, 부벽 등으로 장식되었다.
성당 내부 규모는 높이 32.5m, 길이 79m이고, 성당 문 모퉁이에 있는 6개의 기둥에는 천사, 교황, 성인, 왕 등 100여 개의 조각상을 새겨 넣었다. 아폰수 도밍게스는 또한 신랑의 토대 부분, 사제관, ‘왕의 사방회랑’을 지었고, 성당 회의소도 설계하였다.
그의 뒤를 다비 우게토(영국명 데이빗 휴게트)가 1402년부터 1438년까지 계승하였다. 이 건축가는 카탈로니아 후예로 추정되는데, 플랑부아양 고딕양식을 들여왔다. 이것은 주(主) 파사드, 정방형 성당 회의소의 돔, 창설자의 예배당, 미완
예배당들과 주(主) 회랑의 북과 남의 회중석 등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회중석의 높이를 32.46m로 높였다. 비례를 변경함에 의해 그는 성당의 내부를 심지어 더 좁아져 보임에도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익랑을 완성하였으나, 미완 예배당들은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주앙 1세가 살아 있을 때 성당을 완성시켰으며, 창설자의 예배당을 덧붙였고, 미완의 예배당도 짓기 시작하였다.
그 곳에는 나중에 국왕 두아르테, 왕비 레오노르 등이 묻혔다. 마누엘 1세 때에는 ‘미완의 예배당’ 출입문의 아치 안쪽에 훌륭한 조각을 만들었다. 이 예배당의 튼튼한 기둥과 왕의 사방회랑에 보이는 마누엘양식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은 디에고 보이타크의 작품이다.
아폰수 5세의 통치 중에, 포르투갈인 건축가 페르난도 데 에보라가 1448년부터 1477년까지 건설을 맡았다. 그는 아폰수 5세의 회랑을 추가하였다. 그의 뒤를 1480년에서 1515년까지 건축가 마테우스 페르난데스 장자가 승계하였다.
▲바탈랴 수도원 (Monastery of Batalha)
1383년에 국왕 페르난두 1세가 왕위 계승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포르투갈은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유일한 상속자인 딸 베아트리스가 카스티야 왕 후안 1세와 결혼해, 법적인 왕위 계승자는 베아트리스와 후안 1세 사이에 태어난 왕자뿐이었다. 이 왕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포르투갈이 카스티야에 합병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였다.
그러자 페르난두의 선왕 페드루 1세의 서자이며, 아비스 기사단 단장이었던 주앙은 부르주아의 지지를 받아, 쿠임브라에서 개최된 신분제회의에서 왕위 획득에 필요한 법적 허가를 받았다. 주앙이 이끄는 소수의 포르투갈군은 왕위를 요구하며 침입한 카스티야의 대군에 맞섰다. 포르투갈군은 결사적으로 싸워 카스티야군을 물리쳤다. 패한 카스티야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포르투갈군은 모두들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전투가 일어난 다음날, 아비스 왕조의 창시자 주앙 1세는 성모 마리아에게 수도원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3년 후 알주바로타에서 몇 km 떨어진 분지에 ‘전승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수도원에는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포르투갈인들의 불굴의 의지가 깊이 스며 있었다. 1755년의 지진은 어느 정도 손상을 입혔지만, 그러나 훨씬 큰 손상이 마세나 장군의 나폴레온 군대들에 의해 일어났는데, 그는 이 복합건물을 1810년과 1811년에 약탈하고 불태웠다.
도미니크 수도승들이 1834년에 이 수도원에서 추방되자, 성당과 수도원은 방기되었고 폐허로 남겨졌다. 1840년에 포르투갈의 왕 페르디난드 2세가 고딕 건축의 보석인 이 수도원을 구원하고자 폐허로 방치된 수도원의 재건 계획을 시작하였다.
재건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마누엘 1세가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왕실 영묘로 결정한 뒤 바탈랴 수도원의 정치적 중요성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기념비란 상징 가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구아르다 대성당이나 리스본의 카르무 대성당도 바탈랴를 모델로 하였다.
수도원은 1907년에 국가 기념물로 선언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이 수도원의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1980년에 수도원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바탈랴 수도원은 유네스코에 의해 198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바탈랴 수도원 (Monastery of Batalha)
마누엘양식의 이 대가는 카페라스 임페르페이타스의 현관에 대한 작업을 하였다. 디오고 보이타크와 함께 클라우스트로 레알에 있는 아케이드들의 창테두리 장식을 실현시켰다. 수도원에 대한 작업은 주앙 데 카스티요에 의하여 세밀한 르네상스식 트리뷴을 추가하면서 호은 3세 왕의 통치까지 계속되었다.
주앙 데 카스티요가 지은 또 하나의 회랑은 1811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탈랴 성당은 후기 고딕양식의 걸작품이다. 이 성당은 작은 탑, 아치, 부벽, 난간 등으로 꾸며졌고, 서쪽 파사드에는 매우 인상적인 플랑부아양 양식의 높은 창이 설치되어 있다.
팀파눔의 4인의 복음서 기자에 에워싸여서 성모대관 상, 주앙 1세와 왕비 필리파 데 랭커스터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다룬 사제관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눈길을 끈다. 왕이 리스본에 있는 제로니모스 수도원의 건설에 모든 그의 노력들을 쏟기로 결정하였을 때, 건설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현관의 아키볼트 안에는 78개 동상들의 무리가 보이는데, 구약성서의 왕들, 천사들, 예언자들, 그리고 성자들이 각각의 천개 밑에 6개의 열로 나뉘어 있다.
쇠사슬에 묶인 마귀 위에 한 인물상이 서 있는 양 측의 물매내기들에는 사도들의 동상들이 진열되어 있다. 박공벽은 우리에게 각각의 복음서를 든 4명의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천개 밑에 앉아서 경배를 받는 예수를 보여준다
▲성당 내부
성당은 그 높이(32.4m)에 비해 길이가 길고 폭은 22m로 좁다. 회중석은 건축가 우게토에 의하여, 성당의 비례를 변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도록 현재의 높이로 높여졌다.
성당 내부는 회중석 내에 장식이나 동상들이 거의 없어 그대로의 노출된 느낌을 준다. 복합된 기둥들에 의해 지지되는 늑골궁륭들은 장식된 종석들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빛은 채광층의 10개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들과 양측 벽들과 익랑에 있는 높고 창테두리 장식이 있는 창문들을 통하고, 그리고 성가대석의 란셋모양의 창문들을 통하여 성당으로 들어온다.
성가대석은 2랑식 익랑들로 확장되고 중앙에 단독 돌출된 5개의 후진형 예배당들로 구성되어 있다. 바탈랴는 포르투갈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들을 사용하기 위한 거의 첫번째 수련장이었다. 이 기술은 프란코니아와 누렘베르그 지역들로부터 온 독일 예술가들에 의해 포르투갈에 소개되었다.
가장 오래된 창문들은 143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성가대석에 있는 마누엘양식의 첨두아치식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들은 1520년대와 1530년대이며, 프란시스코 헨리크가 포함된 포르투갈 대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창문들은 예수와 마리아의 일생들의 장면들을 대표하는데, 성모 방문, 예수 공현, 이집트 탈출 및 예수 부활이다. 건축가 마테우스 페르난데스와 그의 부인이 현관에 가까운 대리석 묘판 아래 매장되어 있다.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왕의 목슴을 구해준 기사 마팀 곤살베스 데 마사다의 묘가 카펠라 도 푼다도르의 근처에서 눈에 띈다.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십자고상
▲주앙 1세의 무덤
이 정방형 예배당은 주앙 1세의 명령에 따라 건축가 우게토에 의해 1426년에서 1434년 사이에 지어졌는데, 포르투갈에서 첫번째 왕실 판테온이 되었다.
이 예배당은 플랑부아양 고딕과 랑카스터의 필리파와 함께 온 몇몇의 영국 건축가들에 의해 도입된 영국 고딕양식 사이에서 완벽한 조합을 주고 있다. 이 예배당은 3개의 추상적인 회랑들과 심하게 위로 받쳐 올린 아치들을 받치고 있는 덩굴무늬 장식들로 꾸며진 8개의 기둥들에 의해 부벽된 중앙식 팔각당으로 구성되었다.
별처럼 생긴 창설자의 예배당의 돔 밑에 주앙 1세와 그의 아내 랑카스터의 필리파가 함께 누워 있는 커다란 석재 묘는 두아르테 1세가 만든 마누엘양식의 독특하고 화려한 돌조각으로 꾸며져 있는데, ‘즐거워서’,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란 글귀를 새긴 장식 닫집이 씌워져 있다.
그들의 동상들은 포르투갈과 영국 사이의 좋은 관계를 표현하는 악수하는 손들과 정교하게 장식된 천개들 밑에 한 개의 벼개 위에 놓여진 머리들과 함께 모든 왕권의 상징들 속에 눕혀져 있다.
아비스와 랑카스터 가문의 문장이 든 갑옷들은 가터 훈위의 휘장과 함께 이 천개들의 꼭대기에 놓여져 있다. 묘의 뚜껑판 위에는 왕의 모토인 포르 벰(Por bem 더 좋게)과 여왕의 모토인 이 메 피에트(Yl me plet 나는 기쁘다)가 반복하여 새겨져 있다.
▲성당 내부
성당 회의소는 방문객들에게 이 건축물의 설립에 대한 군사적 이유를 상기시키는데, 2명의 보초들이 세계1차대전에서 죽은 무명용사들의 묘들을 지키고 있다.
성당 회의소의 특징은 스스로 지탱하는 궁륭에 있으며, 그 위에는 16개의 구면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둥근 천장이 얹혀 있다. 이 정방형 방은 중앙 지주가 없고 그리고 19평방미터 공간의 지주거리를 갖는 별모양 궁륭으로 매우 유명하다.
궁륭이 떨어지는 사고가 2번이나 일어나자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을 동원해서 공사를 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 대담한 개념으로서 죄수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여 그 임무를 수행케 한 것으로 비난 받았다.
마지막 비계들이 제거되었을 때, 다비 우게토는 그의 비판자들을 침묵시키며 그 궁륭 아래서 그 밤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동측 벽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르네상스식 창은 1508년부터 유래한다. 창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포르투갈 화가들인 거장 주앙과 프란시스코 핸리케스에게 헌정되고 있다.
▲성당 내부 유리화
▲미완예배당
팔각형의 왕실 묘소는 똑같은 모양의 예배실 7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인의 무덤으로 쓰려고 한 두아르테 1세가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급사해서 ‘미완의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마테우스 페르난데스 장자가 만든 장식은 독창적이고 환상적이면서도 매우 다양하다. 이 장식에는 짝을 이룬 장식 닫집과 벽감, 화초, 돌고래, 갑각류 동물 등의 모양이 연달아 들고 난다. ‘나, 숨이 붙어 있는 한 충실했노라.’란 두아르테 1세의 묘비명이 왕실 영묘벽 프리즈에 200번이나 되풀이된다.
수도원이 결코 실제로 완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의 증언으로서 미완의 예배당들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성당의 성가대석 위에 접해진 그리고 오로지 외부로부터 출입할 수 있는 분리된 팔각 구조물을 형성하고 있다. 이 성당은 1437년에 두아르테 1세 왕으로부터 그 자신과 그의 후손들을 위한 두번째 왕실 영묘로서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와 그의 왕비 아라곤의 레오노르는 여기에 묻힌 유일한 사람들이다. 우게토에 의한 원래 설계는 후계 건축가들에 의해 변경되었는데, 특히 성당 내에 묻힌 마테우스 페르난데스 장자에 의해 많이 변경되었다. 팔각당은 7개의 방사상의 6각 예배당들을 갖고 있다. 예배당들의 모퉁이들 안에는 거대한 미완의 부벽들이 서 있는데, 그것들로 궁륭을 지지하려고 했었다.
디오고 보이타크에 의해 설계된 이 기둥들은 돌에 조각된 마누엘양식 부조들로 장식되어 있다. 현관은 기념비적인 15미터 높이로 솟아 있다. 원래는 고딕양식으로 세워졌으나, 후에 마테우스 페르난데스 장자의 승인 하에 마누엘양식으로 전환된 1509년에 완성된 걸작이다.
현관은 호화롭고 양식화된 마누엘양식 부조들의 레이스 작업으로 완전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혼천의들, 날개 달린 천사들, 밧줄들, 동그라미들, 나무 그루터기들, 클로버 모양의 아치들, 그리고 만개한 꽃모양의 돌출상들이다. 이 팔각당은 복합 궁륭을 가진 하나의 회랑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남측 벽에 우묵히 들어간 아치들의 일렬 안에 좌에서 우로 그들의 네 아들들의 무덤들이 서 있는데, 디. 페드로 왕자, 천개 밑에 항해왕자 엔리케, 디. 주앙과 그리고 디. 페르난도이다.
디. 페르난도는 무어인들의 죄수로서 훼즈에서 죽었다. 서측 벽 위에 3개의 무덤들은 아폰수 5세 왕(1433~1495년), 마세나 장군의 병사들이 뼈들을 흩어버렸기에 텅빈 묘가 된 존 2세(1445~1495년), 그리고 17살에 사고로 죽은 그의 아들 디. 아폰수의 원래 묘들의 복제본이다.
▲왕의 사방회랑
15세기에 지은 왕의 사방회랑은 유럽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걸작으로서 너비 50m, 길이 55m의 규모이다. 1층에는 뾰족한 아케이드, 2층에는 고딕양식의 창을 설치하였으며, 가느다란 원주로 떠받친 아치 사이에는 섬세하고 화려한 마누엘양식의 장식을 새겨 놓았다.
이 사방회랑은 원래 계획에는 없었다. 이겻은 건축가 페르낭 데 에보라에 의해 1448년에서 1477년 사이에 세워졌다. 이 회랑의 절제된 바깥으로 뻗은 외양은 성당의 플랑부아양 고딕양식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회랑에 있는 우게토에 의한 4엽모양 문양, 꽃모양 문양, 꽃메달 문양을 포함하는 고딕 양식에 포함되는 조각된 창테두리 장식은 후에 마테우스 페르난데스 장자에 의해 추가된 아케이드 차양들에 있는 마누엘양식과 성공적인 조합을 형성한다. 2가지 다른 문양이 교대되는데, 하나는 예수의 성상의 십자가이며, 다른 하나는 팔찌문양들이다.
이들 엉클어진 아케이드 차양들을 지지하는 지주대들은 나선형 부조들, 팔찌문양들, 연꽃들, 찔레 넝쿨들, 진주들과 조개들 그리고 이국적인 식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 곳은 돌을 진흙 빚듯 한 이 장식이 있었기에 유럽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회랑이 될 수 있었다.
▲왕의 사방회랑
▲주앙 1세 기마상
출처 / blog.daum.net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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