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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충청 북도****기행

충북 진천.증평ㅡ초록빛 호수가 말하네....머물지 말고 천천히 흘러라

by 삼수갑산 2021. 7. 22.

진천. 증평ㅡ초록빛 호수가 말하네....머물지 말고 천천히 흘러라

▲충북 증평의 좌구산 아래 삼기저수지를 끼고 조성된 수변 걷기 길 ‘등잔길’ 나무 덱 구간.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3㎞ 남짓한 산책로로 물에 몸을 담근 수몰 버드나무들이 신록에서 녹음으로 건너가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돌이켜 보면 코로나19 이전에는 여행의 목적지 목록은 너나없이 다들 비슷했습니다. 인기투표 순위를 매기듯 순서를 정하고 다들 똑같은 여행지를 찾아다녔지요. 잠깐 끓다가 금세 식는 유행처럼 이름난 여행지를 메뚜기떼처럼 몰려다니던 여행자들을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게 한 건 순전히 코로나19의 가공할 만한 위력 때문이었습니다.

 

긴 고통의 터널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지만, 코로나 시대를 건너가며 새끼손톱만큼이나마 얻은 게 없지 않네요. 이를테면 생각 없이 누려왔던 것에 대한 감사, 사소해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관심 같은 건 팬데믹의 와중에서 얻게 된 것들이지요.

 

특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곳이 뜻밖에도 좋은 여행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도,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좋은 여행지’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한 것도 팬데믹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충북 진천과 증평.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서 여행목적지 순위에는 올려두지 않았던 이곳을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호수를 보는 자리, 호수를 걷는 길

충북 진천에는 이렇다 할 대표급 관광명소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농다리’가 있긴 하지만, 옛 다리 하나로 관광객을 불러모으기란 역부족이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말이 있다. 진천이 살기 좋다는 얘기다. 살기 좋다면 여행하기도 좋은 곳일 텐데 진천은 관광지로 알려지지 않았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자원이 없지 않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지도 있고 송강 정철과 표암 강세황의 묘도 있다. 천주교 순교지인 배티성지도, 삼층 목탑 법당이 인상적인 절집 보탑사도 있다. 이런 곳을 다 미뤄두고 초평호로 먼저 간다. 봄날, 진천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은 저수지 수변에 있으니 말이다.

진천을 대표하는 저수지는 초평호다. 초평호는 1958년에 만들어진 저수지로 충북에서 수 면적이 가장 넓다. 낚시 명소로 알려졌지만, 빼어난 저수지 수변 풍경이 알려지면서 근래 전망대와 걷기 길 등이 조성됐다. 초록 숲이 그림자를 드리운 만수위의 초평호 수변 풍경은, 딱 지금 가야만 볼 수 있다.

먼저 초평호를 멀찌감치 물러서서 굽어보는 전망대 얘기부터. 초평호를 끼고 있는 두타산(596m) 칠분 능선쯤에 ‘한반도 지형 전망공원’이 있고, 공원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전망대까지는 초평호 붕어마을에서 차로 단번에 오를 수 있다.

 

전망대에서는 발아래로 초평호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수면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낚시용 좌대가 마치 근사한 수상 리조트를 연상케 해 남국의 휴양지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한반도지형 전망’이란 공원 이름은, 동의할 수 없지만 호수 안쪽의 지형이 한반도 모양이라고 붙여진 것이란다.전망대에서 멀리 초평지를 봤다면, 이제 가까이서 호수를 봐야 할 차례. 초평호에는 물가에 바짝 붙어 걸을 수 있는 근사한 수변길이 있다.

 

붕어마을에서 호수를 끼고 진천군 청소년수련원까지 가는 길이다. 나무덱 길을 따라 느긋하게 걸을 수도 있고, 차를 타고 호수의 경관을 감상하며 드라이브를 할 수도 있다.

청소년수련원에서 하늘다리를 건너면 농다리까지 수변을 잇는 걷기 길인 ‘초롱길’이 이어진다. 두 길을 이어서 걸을 수 있지만, 청소년수련원까지는 차로 가고 거기서부터 농다리까지는 도보로 왕복하는 것을 추천한다. 지금, 하늘다리 주변의 신록과 녹음이 절정이다.

 

▲증평 좌구산을 대표하는 명소인 명상구름다리. 협곡 위의 다리 위에 오르면 온통 초록의 세상이다

 

# 비포장 길 끝에 비밀처럼 숨은 정자

진천에는 비밀처럼 꼭꼭 숨겨진 근사한 호반길도 있다. 비포장 흙길을 걸어 호반에 홀로 등대처럼 서 있는 작은 정자 식파정에 이르는 길이다. 덱도 없고, 안내판도 변변히 없는 비포장 흙길이지만, 수변 풍경을 솔숲 사이로 감상하며 걷는 맛이 훌륭하다.

식파정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쯤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은거했던 선비 이득곤이 지은 정자. 식파(息波)는 ‘물결이 쉬어간다’는 뜻으로 욕심을 잠재운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득곤은 혼탁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에서 식파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식파정은 백곡저수지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여러 번 자리를 옮겼다. 애초에 정자가 지어진 자리는 수몰 이전 백곡천의 맑은 물을 끼고 있는 비경의 명소였던 모양이다. 현판에 새겨진 최명길, 송시열, 채지홍 등의 시문이 그걸 증명한다. 시문 중에는 증평의 인물인 백곡 김득신의 글이 우아하다. 김득신 얘기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고, 그가 정자에 남긴 글을 옮겨 적어본다.

“들리는 것은 그 소리도 없어서 물결이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니 또한 그 물결의 쉼을 알겠다. 달과 물결이 한빛이 되니 곧 물결이 쉬고 달리지 않는 것을 또한 가히 알 수 있었다. 대개 이 물결이 맑게 모여도 머물지는 않고 천천히 흐르면서 급하지 않은 것은 지세가 평평하고 언덕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이러한 이유를 가지고 식파정이라고 이름 지은 것을 내가 알겠다.”

식파정 정자 앞에서 모여도 머물지는 않고, 천천히 흐르면서도 급하지 않은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이 다 어지러운 때라 그럴까. 작은 물가의 정자에서 만난 옛사람의 마음과 글이 더 굵고 진하게 마음에 새겨진다.

# 군(郡)은 작지만, 읍(邑)은 크다

증평은 한 번도 관광지로 조명받은 적이 없다. ‘증평’이란 지명부터가 여행자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증평군은 지난 2003년에야 만들어졌다. 괴산에 속한 땅이었다가 1991년 충북도에서 직할 관리하는 임시행정구역인 ‘증평출장소’가 됐고, 2003년에야 비로소 독립된 ‘증평군(郡)’이 됐다.

증평군의 면적은 82㎢로 우리나라 82개 군 단위 지방정부 가운데 두 번째로 작다. 울릉군(72.91㎢)보다 손톱만큼 더 크긴 하지만, 세 번째로 작은 옹진군(172.90㎢)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 좁은 땅이 뜻밖에도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적잖다.

증평은 세련된 도시와 시골의 느낌을 다 가졌다. 이 작은 땅이 어떻게 도시의 풍경을 갖고 있을까. 그건 증평읍 인구에 해답이 있다. 증평은 읍 하나(증평읍), 면 하나(도안면)를 가졌다. 증평군의 인구는 3만6500명. 군 단위의 인구순위를 매긴다면 이것도 뒤부터 세는 게 훨씬 더 빠르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증평군의 인구순위는 꼴찌에 가깝지만 ‘증평읍’ 인구는 3만5000여 명으로 충북의 16개 읍 중 청주 오창읍 다음으로 많다. 증평읍 인구가 많은 건, 증평군 인구의 95%가 증평읍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증평읍에는 내로라하는 도시의 거의 모든 프랜차이즈가 다 들어와 있다. 스타벅스 매장이 군 단위로는 네 번째로 증평에 문을 열었다.

 

첫 번째 군 단위 스타벅스는 경기 양평에서 문을 열었는데 지역 주민보다는 수도권 여행자들을 겨냥한 입지였고, 강원 홍천과 고성에 잇따라 들어선 두 번째와 세 번째 스타벅스는 모두 리조트 부대시설로 문을 열었다. 그러니 순전히 지역 주민 상대로 들어선 군 단위 스타벅스는 증평이 최초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뜬금없이 스타벅스 얘기를 꺼낸 건 증평읍이 그만한 소비시장이고 대도시와 다름없는 도시의 편의를 두루 갖추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다.세련된 브런치 카페에서 늦은 아침을 즐기거나, 로스팅 카페에서 진한 향의 커피를 마실 수 있고, ‘프로슈토’나 ‘살시차’에 프랑스산 와인을 곁들이고 토마토 파스타에 이탈리아 치즈를 얹은 ‘부라타 뽀모도로’도 맛볼 수 있다. ‘증평군 증평읍’에서 말이다.

 

▲진천 초평저수지 물가에 띄워놓은 낚시 좌대들이 마치 이국적인 수상 리조트처럼 보인다

 

# 기록과 기억을 담는 곳…증평기록관

증평에 도착했다면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으로 ‘증평군청’을 추천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증평군청 별관 1층 ‘증평기록관’이다. 증평기록관은 지역의 기록보존과 기억 공유를 위해 마련해놓은 복합문화공간. 도서관(Library)과 기록관(Archives), 박물관(Museum)의 영어 이름 합성어인 ‘라키비움(Larchiveum)’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런 공간을 지자체가 운영하는 건 증평군이 유일하다.

2003년 군으로 승격했으니 ‘증평군’이란 정체성을 갖게 된 지 이제 18년. 증평이 기록과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시간의 결핍 때문이 아닐까. 기억과 시간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증평의 정체성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증평기록관은 주민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여행자들에게도 제법 재미있는 공간이다. 기록관 내부는 사진과 전시 자료로 빼곡하다. 기록관에서는 ‘옛 사진 공모전’ 전시가 열리고 있다. 주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옛 사진 공모전으로 모은 365건의 사진과 영상기록 중 47건을 기록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1949년 괴산군 증평면에서 증평읍으로의 승격을 축하하는 기념사진부터 증평읍에 있었던 제일극장의 1970년대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증평사람들의 일상이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 있다.

기록관은 코발트색 책장과 진열대로 세련되게 꾸며져 있다. 자칫 딱딱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기록들을 입체적으로 잘 정리하고 시각적 효과를 고려해 흥미롭게 전시해놓았다. 기록과 기억에다 인물을 덧댄 것도 돋보인다.

 

이를테면 1925년 개교한 도암초등학교의 1회 졸업사진이나 졸업생 이름 등을 전시하면서, 재직 중인 도암초등학교 이혜영 교사를 불러내는 식이다. 증평역의 역사는 손부길 증평역장의 증언과 기록으로 보여준다. 전시장 한쪽에는 홍성열 증평군수가 기증한 증평출장소 공무원 시절 월급명세서와 업무 수첩도 있다.

인상적이었던 건 증평기록관이 ‘증평의 지금’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증평기록가’ 양성프로그램을 수료한 주민들이 자신과 주변의 기억을 기록집으로 제작했다. 농업기술센터의 봉사동아리 회장, 마을 부녀회장, 16년 차 공무원 등 다양한 신분의 주민들이 기록집을 남겼는데, 공적인 기록이나 정리가 아니라 대개 가족 이야기나 해외여행기 등 사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기록집을 들춰보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건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도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평범한 내 삶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충북 진천의 초평호를 건너서 농다리까지 이어지는 ‘초롱길’ 구간의 수변 풍경.

거울 같은 수면에 숲의 초록이 데칼코마니처럼 찍혔다.

 

# 책 한 권을 11만 번이나 읽은 까닭

증평 출신으로 가장 이름난 역사 인물이 조선 중기의 시인 김득신이다. 증평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독서왕 김득신 문학관’이 있다. 김득신의 생애와 문학적 성취를 전시하고 있는 전시관이다.

 

김득신은 영웅담을 앞세운 무결점의 위인과는 좀 결이 다르다. 김득신은 진주대첩을 이끈 임진왜란의 영웅 김시민의 손자다. 김시민 아들은 경상도 부사와 병조참의 벼슬까지 지낸 김치(金緻)이고, 김치의 아들이 곧 김득신이다.

내로라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만큼 기대를 한몸에 모았지만,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크게 앓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총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책의 첫 단락 26자를 사흘을 외웠는데 첫 글자 한 자도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기록을 보면, 질병으로 인한 뇌 손상이 있었던 듯하다.

 

학문을 배우는 속도가 크게 떨어졌지만, 김득신은 백 번을 읽어 외우지 못하면 천 번을 읽고, 천 번을 읽어도 깨치지 못하면 만 번을 읽는 식으로 핸디캡을 극복했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겨우 소과(小科)에 합격해 마흔둘이 돼서야 말단관직에 오른 그는, 맡은 일이 탐탁지 않았던지 곧 벼슬을 내려놓고 귀향했다.

 

대과(大科)공부를 20년 더 했지만 번번이 낙방을 거듭하다가 쉰아홉이 돼서야 문과 증광시에 합격해 65세에 풍기군수 자리를 거쳐 종 2품 벼슬인 가선대부 자리까지 올랐다.

김득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1만 번 이상 읽은 책 36편을 적은 독서기록 ‘독수기(讀數記)’로 짐작할 수 있다. 독수기에서 그는 ‘백이전’을 1억1만1000번, ‘노자전’을 2만 번을 읽었다고 적었다.

 

당시의 1억은 지금의 10만을 의미하는 단위니 ‘백이전’을 자그마치 11만 번이나 읽은 것이다. 11만 번을 읽으려면 하루 100번을 읽는다 해도 꼬박 4년이 필요하다. 그러니 서른여섯 편의 책을 1만 번 이상 읽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독서에 쏟아부었다는 얘기인가.

# 김득신의 남긴 두 가지 이야기

김득신의 삶은 주어진 조건을 노력으로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스로 우둔했음을 숨기지 않았던 그는 부모세대가 자식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와 자식이 부모에게 부탁할 법한 두 가지 이야기를 남겼다.

 

먼저 스스로 지은 자신의 묘비명.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 이름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겠다. “남과 비교했으면, 나는 학문을 모른 채 15세에 죽었을 것이다.” 이건 자식이 부모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김득신 묘는 증평 좌구산 아래 있다. 좌구산은 지역 주민에게도, 여행자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증평의 명소다. 좌구(坐龜)는 앉아있는(座) 거북이(龜)의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좌구산은 산 전체에 다양한 휴양 시설을 들여놓은 종합 휴양지다.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니만큼 좌구산에 산에 놓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시설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휴양림을 중심으로 산림욕장, 휴양촌, MTB코스, 천문대, 명상구름다리, 자작나무 숲길, 명상의 집, 캠핑공원, 숲속 모험시설, 줄타기 시설, 가상증강현실 체험장…. 카페와 식당, 매점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 가족여행지로 맞춤하다.

좌구산 아래에는 아담한 규모의 삼기저수지가 있는데, 저수지 둘레를 따라 걷는 산책코스인 ‘등잔길’이 조성돼 있다. 등잔길 주변의 수변 풍경은,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서 있는 버드나무가 신록에서 녹음으로 번져가는 지금이 단연 최고다.

 

등잔길 중간중간에는 김득신 동상이 세워져 있고, 좌구산 아래 율리마을에도 김득신 묘까지 이어지는 걷기 길인 ‘백곡 김득신 이야기길’이 있다. 신록 가득한 등잔길을 걸으며, 또 율리마을을 돌아보며, 진천 식파정에 김득신이 적어놓은 ‘머물지 않고 천천히 흐르는 마음’을 다시 생각한다.

 

■ 배로 건너가는 식당

초평저수지를 끼고 진천 붕어마을에서 청소년수련원 쪽으로 가다 보면 저수지 건너편에 섬 아닌 섬에 식당이 하나 있다. ‘쥐꼬리 명당’이라 불리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외딴 음식점이다.

 

수변에 걸어둔 현수막의 전화 번호로 전화하면 식당 주인이 배로 마중을 나온다. 뱃길은 250m쯤으로 2분이면 건너간다. 1975년 개업했다니 이렇게 불편한 자리에서 46년째 닭볶음탕, 붕어찜, 민물새우탕 등을 내는데 고추장, 된장은 직접 담가 쓰고 찬거리도 주인장이 농사지은 재료로 만든다.

 

글.사진출처 / munhwa.com / 박경일 전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