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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충청 북도****기행

충북 제천ㅡ제천 봉양면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천등산(天登山) 박달재

by 삼수갑산 2021. 11. 12.

제천 봉양면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천등산(天登山) 박달재

천등산(天登山) 박달재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천등산과 지등산이 연이은 마루라는 뜻에서 이등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발 453m, 길이 500m. 예로부터 제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관행길이 나 있으나, 첩첩산중으로 크고 작은 연봉이 4면을 에워싸고 있어 험준한 계곡을 이룬다.

이곳은 1217년(고려 고종 4) 7월 거란군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전공을 세운 전승지로 유명하다. 또한 인근의 지등산·인등산과 함께 천(天)·지(地)·인(人)을 모두 갖춘 신령스런 곳으로, 단군이 하늘에제사 지내던 성소로 알려져 있다

 

산에는 잣나무 ·전나무 ·향나무 ·육송 등의 상록수가 울창하며, 도로가 구비돌아 9곡(曲)의 유서 깊은 박달재로 유명하다. 박달재 아랫마을 금봉 처녀와 과거를 보러 가던 영남 박달 도령의 애달픈 사연이 전한다.

 

때는 조선 중엽. 경상도 선비 박달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나섰다. 몇 날이나 걷고 걸어서 소백산맥을 넘고 제천에 이른 박달은 충주로 넘어가며 또 높은 재를 넘게 되었다. 마침 날이 저물어 박달은 재 아래 마을에서 방을 얻어 하루 묵었는데 그만 그 집 딸 금봉이와 눈이 맞아버렸다.

 

하루만 묵으려던 것이 이래저래 며칠을 더 머물게 되고 박달과 금봉이의 정은 하루하루 두터워졌다. 마침내 더는 출발을 미룰 수 없게 된 날, 박달은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겠노라 굳게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났다.하루, 이틀······, 금봉이는 목을 빼고 기다렸지만 한번 간 박달은 돌아오기는커녕 소식도 없었다. 과거 날짜가 지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박달이 넘어간 재만 바라보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금봉이는 급기야가슴이 타서 죽고 말았다. 금봉을 장사지낸 지 사흘 후, 한껏 풀이 죽은 박달이 마을로 들어섰다. 박달은 과거에 낙방하고 금봉이 볼 면목이 없어서 차마 오지 못했던 것이다.

 

금봉이 죽어 벌써 장사지냈다는 소식을 듣자 박달은 제정신을 잃었다. 금봉이 이름만 부르며 고갯길을 헤매기 며칠 만에 박달은 숨을 거두었다. 그후 사람들은 두 젊은이의 슬픈 얘기가 얽힌 그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제천과 충주 사이, 중원의 동과 서를 잇는 박달재에 얽힌 ‘전설 따라 삼천리’이다. 유행가 가사 덕분에 ‘천등산 박달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박달재는 차령산맥 줄기인 구학산(971m)과 시랑산(691m) 사이 폭 내려앉은 능선을 로지르는 고개(504m)로 제천시 봉양면 원백리와 백운면 평동리의 경계를 이룬다.천등산은 원서천을 사이에 두고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또 박달재는 등짐·봇짐 장수들이 넘나들던 장삿길로도 큰 몫을 했다. 특히 이 부근에는 옹기장수 얘기가 많은데,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를 세우고 옹기를 구으며 살던 배론이 동북쪽으로 5㎞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나······.” 웬만한 고개에는대개 ‘울고 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요즘과 달리 길도 험하고 산짐승에 도적까지 출몰하던 옛날에 박달재 너머로 시집이라도 가면 다시 친정 구경하기가 난망이었다. 그래서 새색시들이 노랫가사에도 나오듯이 눈물을 퍽퍽 쏟으며 이 재를 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서울로 가는 관행길이 박달재를 거쳐갔고 얼마 전까지도 38번 국도가 이곳을 지났다. 그러나 이제는 재 아래로 길다란 터널이 뚫려, 박달재는 고개로서의 구실을 잃었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지나 38번 국도에 올랐다. 박달재 터널이 있는 제천시 백운면까지는 서울에서 120km, 불과 1시간 30분 거리다. 제천시의 명물 박달재에는 터널이 뚫렸다. 넋 놓고 달려가다간 그냥 지나치기 십상. 길가에 표지판을 따라 재를 오르는 차들은 관광버스거나 일부러 한적한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차들이다. 꼬불꼬불 언덕길은 한산하다.

 

박달재의 전설은 제쳐두고라도 가을을 맞은 산속 풍경은 알록달록 아름답다. 고개 아래 자리한 마을백운면은 박달재의 봉우리 사이에 들어앉았다. 박달재 휴양림과 덕동고개, 영화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철도가 인근에 자리했다.

 

1945년 작곡된 울고 넘는 박달재’는 누구나 한 번쯤 불러보거나 들어본 노래다. 덕분에 박달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은 박달재가 원래는 천등산과 지등산이 이어진 ‘이등령’이라 불리는 고개였지만 박달선비와 금봉낭자의 로맨스가 전해 오면서 박달재가 됐다는 얘기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울고 넘는 박달재’의 주인공이 바로 이들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노래와 전설은 서로 다른 얘기다. 노래의 배경은 박달재에서 이별을 하던 촌농부의 모습을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보고 만든 노래인 것이다.

 

반세기 전의 박달재의 모습이 노래로 전해오니 고개 정상에 마련된 조각상과 해설을 통해 그때를회상해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촌농부의 이야기 ‘울고 넘는 박달재’가 국민가요가 되어 불리니 제천시를 알리는데 톡톡히 한몫했다. 박달재 정상에는 휴게소가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는 여기서도 울려 퍼진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며 따라 부른다. 박달재는 조각공원도 있고 몇몇 휴양시설도 있지만 번듯한 신작로에 밀려 이제는 관광객들만 찾는 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