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대흥ㅡ임존성(任存城)
의좋은 형제ㆍ애잔한 백제…옛 이야기 줄줄이...작지만 큰 고을
▲봉수산 자연휴양림 전망대에 서면 대흥마을 앞으로 예당저수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대흥은 ‘의좋은 형제’를 비롯해 옛 이야기가 줄줄이 엮여 나오는 작지만 큰 고을이다.
예산=최흥수 기자
동헌이라 해서 거창한 줄 알았다. 예산 대흥면 사무소 앞의 ‘대흥동헌’은 웬만한 양반집 고택보다 작다. 솟을대문도 본채도 실제 건물을 축소한 모형 같다. 안마당이나 뒤뜰은 가정집 안채처럼 소박하다. 담장이든 지붕이든 관아의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 약속 없이 불쑥 들러도 전혀 실례가 되지 않는 이웃집처럼 친근하고 정감이 묻어난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의좋은 형제 마을
대흥은 작지만 큰 고을이다. 예당저수지와 어우러진 자연 생태와 풍요로운 이야깃거리까지 더해 2009년 슬로시티로 인증받았다. 신안 증도, 완도 청산, 장흥 유치, 담양 창평, 하동 악양에 이어 국내 여섯 번째다. 마을과 논두렁, 산기슭으로 이어진 ‘느린꼬부랑길’을 걸으면 아기자기한 볼거리와 옛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다.
▲대흥마을 입구에 대흥과 인연이 있는 인물을 기리는 비석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대흥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대흥초등학교. 학교를 포함해 마을 전체가 공원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20여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1578년 세워진 대흥현감 유몽학의 선정비를 비롯해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김육(1580~1658) 영세불망비 등 대흥과 인연을 맺은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치적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시골마을이라고 우습게 보지 말라는 은근한 자랑이자 자존심처럼 보인다.
대흥이 행정 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 말이다. 당시 예산은 예산현ㆍ덕산현ㆍ대흥현으로 구분돼 있었고, 대흥현은 예산의 남부 지역(광시ㆍ신양ㆍ응봉면)을 관할했다. 조선 숙종 때는 대흥군으로 승격했다. 일제강점기 예산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예산보다 상위 행정 단위였다.
1964년 예당저수지 건설로 대부분의 농토와 마을이 물속에 잠기고, 현재의 대흥은 봉수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호수마을이다. 마을 앞의 비석도 수몰지구에서 건져와 다시 세운 것들이다. 집과 농토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마을의 혼이 깃든 유물만은 고스란히 건져 낸 셈이다.
▲대흥마을은 전체가 ‘의좋은 형제’ 공원이나 마찬가지다. 면사무소 앞에 형제 동상이 세워져 있다.
▲대흥동헌 앞의 ‘이성만형제효제비’. 예당저수지 수몰지구에 있던 것을 옮겨 와 비각 안에 보호하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 예쁘게 단장한 대흥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고, 바로 뒤편이 대흥동헌이다. 동헌으로 들어가기 전 놓치지 말아야 할 비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성만형제효제비’다. 고려 초의 효자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글씨는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 없지만, 형제의 우애는 아름답게 각색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져 있다. 형과 아우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서 밤에 몰래 상대방에게 볏단을 날라다 준다는 이야기다. 한때 유행한 광고 카피인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흥현조(大興縣條)에 의하면 대흥호장 이성만과 이순 형제는 효성이 지극해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봄가을로 떡을 해 친척들과 나눴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형과 아우가 각각 3년간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를 지켰다.
그 후로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동생이 형의 집을 찾아가 한가지 음식이라도 서로 챙겼다고 한다. 비석은 연산군 3년(1497년)에 지금은 수몰된 가방교 옆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 비석 주변은 ‘의좋은 형제’ 공원으로 꾸며졌고, 교과서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재현해 놓았다.
▲대흥동헌의 정문인 임성아문. 바로 앞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어 상대적으로 더 작아 보인다.
▲대흥동헌 정문에 ‘임성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흥은 한때 ‘임존’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흥동헌 옆 뜨락에 옹기 항아리가 가득 놓여 있다. 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을 촬영한 곳이다.
대흥동헌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세워졌다. 1914년부터는 대흥면사무소로 사용되다 1979년 해체ㆍ복원했다. 솟을대문에는 ‘대흥동헌’이 아니라 ‘임성아문(任城衙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대흥은 백제 때 ‘임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마을 뒤편 봉수산 정상 부근에 임존성이 남아 있다.
현재 동헌에는 객사와 행랑 등 부속 건물은 사라지고 아문과 수령의 집무실인 정청만 남아 단출하다. 옆 마당으로 나가면 자그마한 기와집 앞에 항아리가 가득하다. 관청이라기보다 종갓집 안뜰 같은 분위기다. 실제 KBS의 전원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2007~2012년)’을 촬영했던 곳이다. 뒤뜰에는 조선 영조의 11녀 화령옹주 태실과 흥선대원군 때 세운 척화비가 남아 있다.
▲대흥현 옥사는 현재 천주교 순교성지로 복원해 놓았다.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이 살았던 이한직 가옥.집보다 아름드리 나무가 숲을 이룬 뒤뜰이 운치있다.
▲대흥향교는 대흥동헌과 함께 대흥의 역사를 증언하는 대표적 건물이다.
동헌 옆에 감옥(대흥옥)도 복원해 놓았다. 관아의 부속 건물이라는 설명보다 천주교 순교 성지라는 점을 강조해 놓아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깔끔하게 복원한 옥사 외벽에 신유박해 때 숨진 이 고을 출신 김정득 베드로의 초상이 걸려 있다.
초등학교에서 뒤쪽 골목을 따라가면 이한직 가옥이 나온다.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1796∼1870)이 기거했던 집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넓은 뒤뜰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오히려 대흥동원보다 격식을 갖췄다. 1405년에 건립한 대흥향교는 동헌과 함께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건축물이다. 바로 앞에 600년 된 은행나무와 함께 역시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봉수산 자연휴양림 숲속의 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봉수산 자연휴양림 전망대에 오르면 대흥마을과 예당저수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봉수산 자연휴양림에서 보면 대흥마을은 전형적인 호수마을이다.마을 앞 예당저수지 가장자리에는 생태공원이 꾸며져 있다. 덱 산책로를 따라 예당호 출렁다리까지 걸을 수 있다.
대흥동헌에서 약 1.5km 떨어진 봉수산 자연휴양림은 가볍게 숲 산책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수목원까지 목재 덱과 산책로로 연결돼 있다. 휴양림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숙박시설(숲속의 집) 어디서나 전망이 시원하다.
산책로를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대흥마을과 예당저수지의 풍광이 특히 일품이다. 호수는 잔잔하고 고층건물 없이 나지막한 마을은 평화롭다. 저수지 맞은편엔 부드럽게 산 능선이 이어져 호수마을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대흥마을은 방문자센터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둘러볼 수 있다. ‘의좋은 형제’ 공원에서 매월 둘째 토요일에 마을장터가 열려 주민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살 수 있다.
▶임존성, 백제 부흥의 희망이 좌절된 곳
대흥마을 중앙에 ‘배맨나무’라 이름 붙인 느티나무 한 그루가 멋들어지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대흥의 역사를 단숨에 백제시대로 연결하는 나무다.
마을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이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을 공격하러 왔을 때 이 나무에 배를 맸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에는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과 삽교천을 통해 이곳까지 들어왔다. 한때 주변에 샘을 파면 곳곳에 갯벌과 짠물이 섞여 나왔다고 한다.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임존성. 약 2.5km에 걸쳐 봉수산 정상을 감싸고 있다.
임존성은 대흥마을 뒤편 봉수산(484m) 정상 부근에 쌓은 성이다. 봉수산 자연휴양림과 광시면 대련사에서 등산로가 나 있다. 기록에서도 영원한 패전국이 돼 버린 백제의 유적은 왠지 모르게 애잔하다. ‘님이 계신 곳’이라 풀이할 수 있는
임존성에 얽힌 이야기 역시 서글프기는 마찬가지다.
백제 무왕의 조카 복신은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백제가 망하자 승려 도침과 함께 부흥을 꾀한다.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부여풍(풍왕)이 귀환하자 왕으로 추대했지만 기울어가는 왕조의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부흥군 사이의 내분으로 복신은 도침을 죽이지만 나중에는 풍왕과의 알력으로 자신도 피살된다. 백강전투에서 패한 후 풍왕도 고구려로 도주했다가 끝내는 당나라로 끌려가 중국 남부로 유배된다.
3만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존성에서 저항했던 흑치상지는 종국에는 부흥운동을 포기하고, 오히려 적군인 당나라의 대장군으로 이름을 떨친다. 당나라 고종의 초청을 받은 그는 토번(티베트)과 돌궐을 정벌하고 그 공으로 대총관(大摠管)의 지위에 오른다.
▲옛 백제의 애잔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임존성은 현재 석성과 토성으로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백제부흥군 최후의 보루 임존성은 현재 일부를 복원해 옛 골격을 갖췄다. 바깥은 돌로, 안쪽은 흙으로 쌓은 성곽길 2,468m를 걸으면 봉수산을 한 바퀴 돌게 된다. 성곽이 없는 일부는 숲길이다.
부드럽게 곡선을 형성하며 능선과 계곡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어서 걷는 재미가 있다. 송애순 예산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체험학습에 참가한 한 아이가 던진 한마디가 잊히질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왜 싸움이 났을까요?” 동심으로 읊조린 그 감성마저 애잔하긴 마찬가지다.
출처 / hankookilbo.com / 예산=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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