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新八道(신팔도)*紀行錄/⊙전라 북도****기행

전북 익산ㅡ한국 천주교 순교 聖地ㅡ여산 성지(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도 길었던 곳)

by 삼수갑산 2021. 7. 21.

익산 여산 순교 성지(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도 길었던 곳)

▲여산성당 

 

▲찾아가는 길

▲여산성당

 

▲여산성당

 

▲여산성당 내부

 

▲여산성당 내부 제대

 

▲여산성당 내부 제대

 

▲여산성당 내부 감실

 

▲여산동헌(東軒)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 위치한 전주교구의 제2 성지라고 불리우는 여산은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보다 앞섰고 또한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도 길었다.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 유곡(深山幽谷)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즉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 땅은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어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일찍 복음을 전해 받은 반면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던 탓으로 일정한 형장이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박해 당시 부사(府使)와 진영(鎭營)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 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2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 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여산동헌

 

여산이 품고 있는 성지는 동헌과 옥터, 여산 숲정이와 배다리, 뒷말 치명 터 등 곳곳에 널려 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순교의 특징은 공동체적 성격이라는 점이다. 잡혀 온 교우들은 옥중에서도 항상 쉬지 않고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무수한 고문과 매질의 고통과 굶주림을 견디어 내다 마침내 차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특히 여산에서는 백지사형(白紙死形)으로 많은 교우가 순교했다. 그중에서도 동헌은 당시 사법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곳으로 지금은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동헌 자리 주위에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남아 있어 유적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동헌 마당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비(不忘碑)들과 함께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여산 동헌은 현재 전라 북도 유형 문화재 제93호로 지정돼 있고 맞은편 여산 초등 학교 종합 학습장으로 변해 버린

 

여산옥터는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까지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여산동헌(東軒)

 

▲여산동헌 각종 비와 척화비 

 

▲척화비

 

▲동헌에서 내려다보이는 백지사(白紙死) 순교 터 

 

▲여산동헌 백지사(白紙死) 터 성지

 

백지사 터는 동헌 옆의 숲에 있는데 순교비와 백지사(白紙死)기념비가 대형 십자가 곁에 우뚝 서 있어 그날의 아픔을 조용히 증언해 주고 있다. 1868년(무진박해)에 금산(錦山), 진산(珍山), 고산(高山)등 심산 유곡에 숨어 살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 이곳 여산으로 끌려 들어와 처형되있는데 기록에 남겨진 순교자는 불과 26명 만이 전해지고 있다.

 

▲백지사 터 성지

     

▲백지사 터 성지

 

◆순교일화

 

어느 날인가 8명이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게 되었는데 그 중 한명이 배교하는 일이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날 밤이었다. 옥사장이 단 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배교하지 않는 일곱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워주고 한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웠다 벗겼다 했다 그래서 옥사장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교자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옥사장은 배교자 대신 자기가 치명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서 일곱 사람과 함께 치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입전의 사실 여부가 어찌 되었건 이 입전을 소중히 간직하여 전해주려는 신도들의 숨은 뜻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옥사장이 결단을 내리게 된 동기는 신도들이 옥중에서 보여준 금석같은 신앙과 표양을 보고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초연한 행동에는 무엇인지 모를 깊은 뜻과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옥사장은 천주 신앙을 갖게 되고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입전자들의 내심에는 순교만큼 인간을 감동시키는 일도 없으며 순교는 큰 전교였다는 것을 꼭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백지사 터 성지 

    

▲나무십자가와 백지사 얼굴 

 

▲백지사 얼굴

 

동헌 아랫마당 백지사 터에서는 신도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발라서 질식시키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사)형이 집행되었다. 전하는 목격담에 의하면 교우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붙이고 또 물을 뿜으니 질식하여 죽는데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조창원 작, 백지 사형, 65 x 53cm, 2008년

 

▲여산 숲정이 성지

 

여산 숲정이는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전주교구 제2의 성지이다. 지금은 논과 밭 가장자리가 되어 있지만 박해 당시에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숲정이 성지로 유래되어 오고 있다. 이 곳에서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10분의 시신은 지금 고산 천호 성지에 묻혀 계시다. 이곳에서 순교한 22명 중 17명이 고산 널바위 사람들이었다.

 

특히 당시 57세의 고령이었던 김성첨 일가 6명의 치명은 대아(大雅)리 저수지에 잠겨 버린 '널바위'(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의 대표적인 애화(哀話)로 남아 있다. 김성첨은 조카 김명언을 비롯해 정규, 정언 등 3형제와 그 아들 등 3대에 걸치는 6명을 포함한 한 마을 17명의 믿음이 모두 자기가 가르친 것이라고 진술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칼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야 칼을 풀었고 얼마나 굶주렸던지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김성첨은 "우리는 이 때를 기다려 왔으니 천당 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 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순교 후 그 시신들은 형장 곁에 있던 미나리꽝에 던져졌다. 이것을 눈여겨 보고 있던 신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신들을 건져냈는데, 겨울에 입는 솜옷 속에는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 솜을 먹어 버린 탓이었다.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일단 한 곳에 가매장하였다가 훗날 일부를 찾아내 천호산에 안장하였다. 박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연풍 성지에 묻혀 있는 황석두(루가) 성인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은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 없다해서 얼굴을 지표면에 엎어 놓는 풍습과 같다. 이 순교자들도 그런 상태였다.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니, 죽어선들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였음이 분명한데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 곳 여산 숲정이에서 치명한 이들 가운데 10명의 시신은 신도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자루에 담아서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안장시켰다고 한다. 천호성지에 가면 성인들 묘소 아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볼 수 있다.

 

그 순교자들 모두가 이 곳 여산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따라서 이곳 여산성지와 천호성지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여산 순교지에서 천호산을 옆길로 넘어 천호 마을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도보 성지 순례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천호산 기슭인 이곳은 여산에서 8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 산길이었으나 1987년 전주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말끔히 포장되어 있어 순례길이 더욱 가까워졌다.

 

이와 같이 여산의 성지는 숲정이, 동헌과 기금터. 옥터. 뒷말 치명터와 배다리등 곳곳에 널려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여산 성당은 이들 순교자를 기념하여 그 정신을 따르기 위해서 1958년 10월에 세워졌다.

 

▲여산 숲정이 성지 

 

▲여산 숲정이 성지

 

▲여산 숲정이 성지 기념비

 

▲여산 숲정이 성지 기념비

 

▲여산 숲정이 성지 기념비

 

▲여산 숲정이 성지 기념비

 

▲여산 숲정이 성지 기념비 예수성심 상

▲여산 숲정이 성지 기념비

 

▲여산 숲정이 성지 제대

 

▲여산 숲정이 성지 피에타상 중앙광장

 

▲여산 숲정이 성지 피에타상 중앙광장

 

▲여산 감옥터인 여산 초등학교

 

현재 여산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에서 옥사를 했고, 옥에서도 신덕 높은 교우들은 배교하려는

교우들을 권면하여 참회시키는 기도장소였다고 한다.

 

▲여산 감옥터인 여산 초등학교 

 

▲여산 뒷말 치명터인 장터

 

뒷말 치명터에서는 장날을(현 1, 6일장) 골라 신자들을 정자나무 가지를 늘어 뜨려 목에 건다음 가지를 놓아서 교우들을 목졸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죽였다. 그 당시 신도들의 처형 일을 장날로 삼은 것은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것을 장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장날이 되면 공개 처형장으로 변했던 '배다리'와 '뒷말 치명 터'는 하사관 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버려졌고 뒷말 치명 터에서는 신자들을 정자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다.

 

▲여산 뒷말 치명터인 장터

 

▲배다리

 

우시장, 현재 군인 아파트 앞 정자나무 있는 곳과 시장 안이다.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던져졌다. 그런데 신도들이 야음을 틈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건져내어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보니 솜을 두텁게 넣어 입었던 옷 속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하도 고파서 솜을 다 뽑아 먹었던 것이다.

 

◆순교자, 「치명일기」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

 

◆ 김성첨(토마스)

 

본디 함양사람으로 고산 넓은 바위(넙바위, 廣岩)에 와서 살 때, 병인군난(1866년)에 그의 사촌 프란치스코 대신으로 잡혔다가 놓였더니, 무진(1868년) 9월에 다시 여산 포교에게 잡혀 목이 졸려 치명하니 나이는 62세요, 때는 무진 10월 10일이었다.

 

◆ 김 안드레아

 

김 프란치스코의 큰 아들이다. 무진 9월에 여산 포교에게 부자가 함께 잡혀 목이 졸려 치명하니 나이는 62세 였다.

 

◆ 김 야고보

 

김 프란치스코의 둘째 아들이다. 다른 교우와 함께 옥문 밖에서 교(絞)하여 치명하니 때는 무진 10월 10일이요, 나이는 47세 였다.

 

◆ 손마리아, 혹은 막달레나

 

금산 개죽리 사는 한첨지의 며느리이다. 그 장부와 함께 잡혀, 장부는 매에 못이겨 배교 하였더니, 그 아내의 설득으로 다시 참회하고 내외 함께 목이 졸려 치명하니 나이는 27세요 때는 무진 10월이었다.

 

◆ 전 루치아

 

진산 사람이요, 공주 진밭에서 살던 문서방의 아내이다. 자원하여 전주에 들어가 옥에 갇히었더니 후에 여산으로 이송되어 목이 졸려 치명하니 나이는 35세요, 때는 정묘년이었다.

 

◆ 넓은바위(廣岩. 넙바위) 교우촌

 

여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주거지 가운데 가장 기억해야 할 교우촌은 넓은 바위이다. 대아리 저수지에서 동쪽으로 5㎞쯤 협곡을 따라 산천리, 왕재, 은천리를 지나면, 산에 묻힌 골짜기에 지금은 흔적마저 찾기 어렵지만 유서 깊은 넓은바위 교우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교우마을이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도, 일찍이 고산 관아에 천주도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1866년(병인년)1월 여러 신도들이 체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상당히 오래된 교우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신도들의 출신지는 대개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등이었다. 이 교우촌이 겪은 가장 큰 박해는 1868년(무진년)에 있었다. 이 때 이 마을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심지어 젖먹이를 둔 여인까지 수십 명이 여산으로 끌려가 그 중 16명이 순교했다. 이들 순교자들 중에서 지도적인 인물은 김성첨(토마스)였다.

 

■ 순교자

 

◆ 김성첨 토마스( ? -1868)

 

그의 본관은 선산 김씨이며 함양 출신으로 언젠가는 알 수 없어도 넓은 바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6년 1월 고산 관아의 포졸들이 이곳을 수색하여 신도들을 체포해 갈 때 그의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를 대신해서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868년 9월 10일이었다. 여산 포교 일행 28명이 넓은 바위를 덮쳐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여산 포교들은 해당 고을의 사법권이 없다 하며 완강하게 저항하므로 포교들은 할 수 없이 물러갔다.

 

그런지 4일 후 여산 포교들은 고산 포교들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와 그를 체포하여 고산 관아로 끌고 갔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고산 주민들에게도 김성첨은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에게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죄상을 꾸짖으며 개과하여 배교한다면 여산 부사에게 상신하여 석방해 주겠노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성첨은 만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라면서 여산 부사에게 이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여산은 고산과 진산을 관장하였고 영장(營將)이 있어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김성첨은 다른 10명의 신도들과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서 영장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다. 영장은 사학(邪學)의 괴수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가르쳤으며, 마을에서 발견된 천주학의 서적과 상본들은 모두 네가 준 것이 사실이며 그 출처를 밝히라고 닥달했다.

 

그는, 본래 대대로 내려오는 천주교 가정이어서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가 돌아 가신지 오래되어 그 출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신도 일당을 불라 하면서 혹독하게 형벌하는 바람에 자기와 함께 끌려온 신도가 전부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영장은 더욱 분노하며 혹독하게 형벌을 내렸지만, 얼굴빛 하나 변하기는 커녕 태연자약 하자, 초죽음이 되도록 매질을 해서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갇힌 신도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굶주림이었다. 그들의 집에 남은 가족들은 너무 가난해서 옥바라지를 해 줄 처지가 못되었다.

 

그런데 김성첨과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이었다. 김성첨과 함께 일가족 6명이 옥고를 치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기를, "우리가 (치명할) 이 때를 기다렸는데 천당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도 참아 받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받으라" 하며 격려했다.

 

김성첨은 신도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었다. 신도들에게 옥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신앙의 수련장이었다.

 

이러한 신도들의 기도생활을 보고 옥을 지키던 군인들은 능욕하기를, "저놈들은 죽어 가는 주제에 무엇이 즐거워 배가 고픈 줄 모르고 천주학만 한다."하며 비아냥거렸다.

 

김성첨과 함께 끌려간 신도들은 그해 10월 21일(양력 12. 4)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나, 김성첨은 그의 종손 마티아와 함께 11월 10일(양력 12. 23) 교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어떤 기록은 57세)였다.

 

출처 / blog.daum / sung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