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新八道(신팔도)*紀行錄/⊙전라 북도****기행

전북 군산ㅡ군산(群山)기행ㅡ기차타고 떠나는 시간여행…

by 삼수갑산 2022. 2. 10.

군산(群山)기행ㅡ기차타고 떠나는 시간여행…

철로 바로 옆으로 작은 집들이 올망졸망 들어선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일제 말 세워져 기적 소리를 내며 동네를 시끄럽게 했던 화물열차가 사라진 그 공간을 이제는 관광객들이 채우고 있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무너져 간다. 해가 바뀌고 '올해의 결심'이란 걸 수첩에 빼곡히 적어놓았건만 한 달도 견디지 못하고 해이해진다. 시간은 어느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흘러가버린다. 쌓이는 건 후회와 번민.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시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해 주는 곳이 있다 했다. 전라북도 군산이란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1930년대풍경을 엿볼 수 있는 원도심과 미래의 먹거리가 될 새만금방조제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곳.

 

수탈의 상처로 멍들었던 풍요의 땅은 그 아픔 그대로 새로운 사람을 맞고 있다. 한때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적이 있다. 버티는 게 결국 승자고 견디는 게 이기는 것이라 말하지만,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이 왜 생기는 걸까. 고통 없이 지나는 삶은 없을까….

 

군산 원도심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근대의 유산은 그런 물음에 답하는 듯했다. 과장되지도, 억지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나도 한때는 아팠어'라는 말을 담담하게 건넨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1930년대 풍경의 거리… 낯설면서도 고풍스러워

 

군산 '근대문화역사거리'. 만나는 일제의 적산(敵産) 가옥과 건물들은 낡은 스냅 사진 속 모습처럼 낯설면서도고풍스럽다.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도 하지만 미래는 이를 극복하는 데서 온다. 장미동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로비에 새겨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글에서처럼 말이다. 군

 

산근대역사박물관 옆엔 전라북도기념물로 1908년에 준공된 옛 군산세관이 자리했다. 독일인이 건축하고 벨기에에서 수입한 적색 벽돌로 지었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다. 서울에 있는 옛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 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생선 비늘 같기도 한 지붕은 동판과 슬레이트로 올리고 3개의 첨탑을 세웠다.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서 쌀을 보관하던 창고는 장미(藏米)공연장으로 개보수됐다. 미즈카페는 1930년대 일본 무역회사가 사용하던 미즈상사가 변신한 곳이다.

 

◇스러져 가는 未生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듯한 '탁류'의 배경이 된 곳

미즈카페 뒤의 군산근대미술관은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었다. 그 옆쪽엔 근대건축관이 있다. 옛 조선은행 이었던 곳이다.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 했다'는 글이 지나던 사람의 발길을 붙잡는다. 밖을 나와보니'탁류길'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되는 곳이란다. 타락한 은행원인 주인공 고태수의 일터가 바로 조선은행이다.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부터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등장한 초원사진관, 일본식 가옥을 주축으로 리모델링한 월명동의 게스트하우스 고우당 등을 잇는 거리다.

 

채만식은 '탁류'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선량한 녀자 하나가 처음 인생을 스타-트하자, 세상이 탁함으로써 억울하게도 가추가추 격는 기구한 '생활'을 중심으로 시방 세태의 아수적은 몃 귀탱이를 그린 게 이 소설이다."(우한용, 채만식의 '탁류',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년)

 

당시의 식민지 경제구조 속에서 절망감 속에 속물로 변하는 인간군상을 그린 '탁류'가 군산을 배경으로 지어진 건 응당 자연스러워 보인다. 식민 수탈의 상징인 '미두장'이 항구로 통하며, 근대화의 표식인 통신시설이 정비된, 돈과 권력과 몰염치와 분노가 뒤섞인 공간이다.

그런데 조금만 뒤집어 보면 그 당시의 상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채만식의 말대로 어릴 적 유리같이 맑고 투명했던 마음이 세태에 찌들면서 탁해지는 것, 우리의 삶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1937년 12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탁류'의 시작 부분은 군산을 묘사하지만 스러져 가는 미생(未生)을압축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그렇게 흐려지지만 또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오는 게 삶이다.


"여기까지가 백마강(白馬江)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아니한 처녓적이라고 하겠다.백마강은 공주 곰나루(熊津)에서부터 시작하야 백제(百濟) 흥망의 꿈자최를 더드머 흘은다.

 

풍월도 조커니와 물도 맑다.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참이지, 강경이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든 수면의 꿈은 깨여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서 올케 금강이다. 이러케 에들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채 얼러 좌르르 쏘다져 바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은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市街地) 하나가 올라안젓다.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 얘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출처 / chosun.com / 군산=최보윤 기자 사진=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