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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ㅡ우드스톡(Woodstock)ㅡ巨人이 잠든 시골 교회, 이정표도 없었다

by 삼수갑산 2022. 1. 22.

우드스톡(Woodstock)ㅡ巨人이 잠든 시골 교회, 이정표도 없었다

처칠은 마지막 선택도 위대했다, 소박한 교회와 화려한 궁전

- 뼛속까지 전쟁영웅
1700년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서 승리 이끈 말버러 공작의 후손
國費로 블레넘 궁전 지어 기념… 처칠은 유서깊은 이곳서 태어나

- 최고의 영예 거절하고…
히틀러로부터 인류 구했지만 영국 왕실·위인들의 안식처
웨스트민스터사원 마다하고 가족 있는 고향의 교회 묘지로

 

▲처칠이 태어난 궁전 - 처칠이 태어난 블레넘 궁전은 역사적 의미와 규모 면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궁전의 하나다.

말버러 공작이 루이 14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기념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왕실과 상관없이 ‘궁전(Palace)’이라

명명된 유일한 건물이다. 처칠의 긍지와 자신감은 이런 조상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건물 입구는 그리스 신전처럼 거대한 열주(列柱·큰 기둥)들이 받치고 있다. 정면의 두 개는 원형이고 그 옆의 네 개는 사각형인 게 독특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몇 시간을 둘러봐도 부족할 정도로 많은 예술품과 고서가, 밖으로 나가면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정원과 호수가 펼쳐진다.

처칠이 태어난 작은 방을 중심으로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내용물은 알차고 다양하다. 평생 처칠에게 이곳은 영감(靈感)이자 위안이었다. 그래서 이 궁전은 처칠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궁전의 역사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년)에서 시작됐다. 공석이 된 '스페인 왕위'를 두고벌어진 이 전쟁에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가 맞붙었다.

 

영국은 태양왕을 견제하기 위해 레오폴트 1세 편에 섰다. 전력이 우세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으로 진격했다.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남부 독일의 블레넘에서 기다렸다. 1704년 8월 13일 전투에서 연합군은 기적처럼 이겼다.

 

프랑스로서는 50년 만의 참패, 영국으로서는 역사상 최대 승리였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국군 총사령관이 윈스턴 처칠의 조상인 초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1650~1722)이다. 블레넘 궁전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비(國費)로 지어졌다.

◇10년간 野人… 히틀러에 결사항전하다

하지만 처칠은 어린 시절 불행했고 부진했다. 부모는 바빴고 사랑은 부족했다. 말썽쟁이 반항아였던 그는 세 번 낙방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겨우 진학했다.다행히 사관학교는 처칠에게 맞았다.

 

조상인 말버러 공작처럼 위대한 군인으로, 정치가로 살아야겠다고결심한 처칠은 자신의 약점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급한 성격을 고치려 했고 허약한 체력과 부족한 공부를 메우기 위해 노력했다.

 

1940년 5월 28일 오후, 영국 런던시 템스 강변 의회의사당의 한 비밀 방. 윈스턴 처칠 총리를 비롯한 전시(戰時) 내각 핵심 멤버 7명이 모였다. '히틀러와 협상할 것이냐, 저항할 것이냐'가 주제였다. 그 시각, 영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히틀러는 유럽을 접수했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가 차례로 무너졌다.
덴마크는 4시간 만에 백기를 들었고 프랑스도 항복 직전이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 전에 독일에 흡수됐고 폴란드는 이미 지도에서 사라졌다.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미국은 중립을 지켰다. 유럽에서 영국은 외톨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의 해안 됭케르크에는 영국군 19만 명을 포함한 33만 명의 연합군이
독일군에 포위된 채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다.영국 해군에는 구출 작전에 투입할 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때 무솔리니가 영국 외무장관

핼리팩스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핼리팩스는 유럽에서 홀로 히틀러와 싸워야 하는 영국의 현실을 협상 근거로 내세웠다.처칠은 반대했다. 논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처칠은 25명의 각료 전원을 소집하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협상을 시작하면 (중략) 결국 영국은 노예 국가로 전락합니다. 영국이 최후를 맞아야 한다면, 우리 모두 땅 위에 쓰러져 자기 피로 질식해 죽은 후라야 합니다."

각료들은 환호했고 협상론은 사라졌다. 진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히틀러의 궁극적인 패배도
이 순간 결정됐다. 처칠이 없었다면 2차 세계대전의 진행과 결말은 달랐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상도 지금 같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한 사람의 힘으로 처칠은 세상을 바꿨다.

◇170년 전 전쟁 영웅 후손으로 태어나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왕족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공작(公爵) 가문 출신이다.
그가 태어난 블레넘(Blenheim) 궁전은 대학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북서쪽의 소도시 우드스톡(Woodstock)에 있다.

 

옥스퍼드에서 블레넘 궁전으로 가는 길은 잘 가꿔진 영국 농촌 풍광으로 가득하다. 완만한 초록 구릉이 이어지고 작은 숲들이 양떼처럼 무리를 이룬다. 구릉과 숲 사이로는 호수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한가로움에 취해 기분 좋게 15분쯤 가면 광활한 녹지 위에 궁전이 나타난다. 웅장하고 위엄 넘치는 외관이다.

 

▲사자의 용기와 집념이 또렷하게 드러난 처칠의 대표적인 사진과 고향마을의

작은 교회에 위치한 처칠의 소박한 무덤(아래 왼쪽 사진). /위키피디아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이긴 처칠은 어엿한 군인으로 변했다. 남아프리카에서 터진 보어전쟁을 계기로 그는 영웅 반열에 올랐다.26세, 처칠은 정계에 입문했고 통상 장관, 내무 장관, 해군 장관, 전쟁 장관, 식민 장관, 재무 장관 등을 줄줄이 맡았다. 하지만 1929년 노동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10년 동안 처칠은 권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살았다.

 

당시는 대공황이 시작됐고 세계경제가 휘청거리며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불만이 고조된 위기의 시대였다.증오를 자양분으로, 선동을 수단으로 한 정치 세력들이 출현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가 대표적이었다. 유럽과 미국은 나치 정권의 본질과 히틀러의 야망을 읽지 못했다. 처칠만이 히틀러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많은 지도자가 처칠을 노망 난 늙은이 취급하고 히틀러를 높이 평가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였던 로이드 조지는 히틀러를 '타고난 지도자'라며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비교했다.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The Times)는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을 지지했다. 소련과 비밀리에 불가침조약을 맺은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며 유럽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

1940년 5월 10일 밤 영국 총리로 최전선에 선 처칠은 비장하게 외쳤다.

"나는 오직 피와 땀과 눈물과 노고로써 공헌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정책은 총력을 기울여 인류 최악의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어떤 공포를 무릅쓰고라도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처칠의 강철 같은 의지 아래 영국은 단합했다. 매일 밤 독일의 전투비행단이 런던의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었지만 영국은 항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처칠의 영국은 1년 넘게 히틀러와 홀로 싸웠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미국이 참전했다. 처칠의 예상대로 미국의 도움으로 연합군은 승리했다. 종전 후 처칠은 한 차례 더 총리(1951~1955년)를 지냈고 1965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양… 無名 교회 묻히다

런던에서의 성대한 국장(國葬)이 끝난 뒤 처칠의 운구는 블레넘 궁전 정원과 맞닿은 작은 마을 블레이던(Bladon)의 성마틴 교회(St. Martin Church)로 향했다. 그의 최후 안식처였다. 그런데 이 교회를 찾아가는 게 참 힘들다. 큰길가에 있지도 않고, 이정표조차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작아서 종탑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큰길가 공터 어딘가에 주차를 하고 동네 골목길 사이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교회는 소박하고, 교회에 딸린 오래된 묘지는 적막에 싸여 있다. 여기에 영국이 낳은 위대한 정치가가 영면(永眠)하고 있다.영국의 위인은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이나 세인트폴교회에 묻힌다. 처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처칠의 자리를 마련해놓았다.

 

그러나 처칠은 사양했다. 영국인에게 부여되는 가장 큰 영예 대신 가족의 옆을 선택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돌보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었을까? 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모른다.

 

내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안다. 처칠이 무모할 정도의 용기로 시대를 휩쓸던 광기(狂氣)와 싸워 승리했기 때문이다. 히틀러에게 굴복하지 않았고 스탈린에게 속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오늘의 자유와 민주주의가살아남았다. 이만하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애주가 처칠이 사랑한 샴페인… '폴 로저' 유독 즐겨

 

처칠은 세상이 다 아는 애연가였다. 애주가이기도 했다. 브랜디 같은 독주도 즐겨 마셨지만, 샴페인을 더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폴 로저(Paul Roger)'를 유독 사랑해서 축하할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이 샴페인을 마셨다. 1928년에는 런던에 남아 있는 이 샴페인을 모두 사들일 정도였다.

 

처칠 서거 10주기인 1975년, 폴 로저는 그를 기려 'SIR WINSTON CHURCHILL'이란 이름의 최고급 샴페인을 출시했다.

처칠과 샴페인의 인연은 그렇게 그의 사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출처 / Chosun.com / 런던·우드스톡=송동훈 문명탐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