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나 카르타의 고향
1215년 이 평원에서…王이 무릎 꿇고, 法治가 시작됐다
'마그나 카르타의 고향' 영국 러니미드 평원
전쟁 나간 형을 배신하고 부하의 약혼녀를 빼앗은 왕…무리한 군자금 축적과 전쟁 패배그런 존 왕에게서 귀족과 사제가 '법으로 왕의 권력을 제한한다'서명을 받아낸 곳이 러니미드 평원이곳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동상이 세워졌다비문엔 '정치와 소풍의 고향'대헌장이 쟁취한 자유의 터전에 사람들이 소풍을 즐긴다
▲러니미드 평원의 대헌장 기념비. 미국변호사협회(ABA)가 대헌장이 미국 헌법에 끼친 영향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ABA는 수년마다 한 번씩 이곳을 방문해 기념 행사를 열고 대헌장의 의미를 되새긴다./게티이미지코리아
대헌장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법에 의한 자유다. 근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법에 의해 통치하고, 법에 의지해 자유를 지켜내는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를 채택했던 고대 아테네에서는 민심(民心)이 곧 법이었다. 민심이 냉철한 이성을 포기하고 냉혹한 현실을 외면했을 때 아테네 민주주의는 멸망했다.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는 타살된 게 아니라 자살했다.영국의 민주주의는 아테네와 달리 국민의 대표가 제정한 법에 의한 통치를 통해 발전했다. 대헌장이 출발점이었다. 존 왕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는 왜 러니미드까지 끌려 나왔을까?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존, 왕이 되다
존은 1167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존의 아버지는 앙주 제국의 수장. 12세기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군주였다. 그의 제국은 잉글랜드에서 남프랑스의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광활했다.
헨리 2세는 많은 자식 중에 어린 막내아들을 가장 사랑했다. 그러나 존은 형 리처드가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를 버렸다. 형이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던 존의 배신은 아버지에게 치명타가 됐다.
얼마 후 헨리 2세는 외롭게 죽었다. 왕위에 오른 형은 동생에게 막대한 영지를 하사하며 보답했다. 그러나 존의 목표는 형을 돕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야망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리처드는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 하여 '사자심(Lion heart)왕'이라 불린 중세 기사의 전형이었다. 그는 명성에 걸맞게 십자군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으로 떠났다.
왕국은 측근들에게 맡겼다. 존은 형이 떠나자마자 배신했다. 프랑스 왕 필리프 2세(Philippe Ⅱ·재위1180~1223)와 비밀리에 손잡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존은 원조의 대가로 프랑스에 있는 가문의 노른자위 영지들을 넘기기로 했다.
음모는 실패했지만, 존은 멈추지 않고 틈만 나면 형을 상대로 음모를 일삼았다. 왕이 될 운명이었을까? 1199년 리처드 왕이 급사하면서 존은 그토록 원하던 왕위에 올랐다.
▶존, 사랑을 얻고 땅을 잃다
존의 즉위는 본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배신을 서슴지 않는 비열(卑劣)한 천성이 문제였다.존은 왕위에 오른 다음 해 자기 부하의 약혼녀와 결혼했다. 충성을 배신으로 갚은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왕은 약혼녀를 빼앗긴 부하에게 어떤 보상도 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을 더 놀라게 했다.
명예와 실리를 모두 잃은 존 왕의 부하, 위그 드 뤼지냥(Hugh de Lusignan)은 프랑스 왕에게 '정의'를 호소했다.필리프 2세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중세 봉건제도의 특성상 존은 잉글랜드 내에서는 왕으로서 최상위 군주였지만, 프랑스 내에 소유한 영지들과 관련해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이기도 했다. 필리프 2세는 존 왕에게 법정 출두를 명했다. 존은 거절했다. 필리프 2세는 존의 영지 몰수를 선언했다.
1215년 6월 15일, 왕이 신하들에게 끌려 나왔다. 장검(長劍)을 허리에 찬 신하들의 서슬은 퍼랬다. 기죽은 왕 앞에 신하들은 한 문건을 들이밀며 옥새를 찍으라고 요구했다. 문건을 읽은 왕은 기가 찼다. 문건의 핵심은 '법으로 왕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감히 신성한 왕의 권능을 신하들이 넘보다니!' 칼자루는 신하들이 쥐고 있었다. 무력한 왕은 분노를 삼키며 옥새를 내줬다. 신하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더는 왕의 변덕스러운 권력에 자신들의 소중한 자유를 맡기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자유의 수호자로 왕 대신 법을 내세웠다. 이 문건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大憲章)'이다.
▶'자유의 수호자'로 王 대신 法
신하들에게 끌려 나온 왕은 잉글랜드의 존(John·재위 1199~1216) 왕이었다. 대헌장을 승인한 곳은 '러니미드(Runnymede)' 평원. 런던과 윈저성 사이다. 너른 들과 느린 강이 조화를 이뤄 런던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소풍의 명소다. 입구에는 작은 팻말이 세워져 있는데 예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지(The Birthplace of Modern Democracy)'
바로 이곳에서 근대 민주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고대 민주주의는 2500년 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됐다. 고대와 근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길래 영국인들은 이곳을 근대 민주주의의 고향이라 주장하는 걸까? 해답은 평원 안쪽 한적한 기념비 안의 원주(圓柱)에 적혀 있다.
'법에 의한 자유의 상징, 대헌장(Magna Carta, Symbol of Freedom under Law)'
▲1215년 귀족들에게 끌려 나와 대헌장에 강제로 서명하고 있는 존 왕. 그는 무도한 왕으로 꼽히지만 역설적으로 대헌장 탄생의 일등공신이었다.(사진 위)
아래쪽 사진은 대헌장 8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작품 ‘배심원’. 영미 사법 제도의 핵심인 배심원 제도가 대헌장을 통해 명문화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앙주 왕조와 카페 왕조 사이에 전쟁이 시작됐다. 서전(緖戰)은 존의 대승이었다. 자신의 조카였지만 반대편에 섰던 브르타뉴 공작 아서(Arthur 1187~1203?)도 사로잡았다. 승리가 패배로 변하는 건 찰나였다. 원인은 교만과 비정(非情). 왕은 포로로 사로잡힌 귀족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왕의 부하들은 진저리를 치며 주군의 곁을 떠났다.
브르타뉴 아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치명타였다. 공작의 사인(死因)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사실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조카가 삼촌의 감옥에서 죽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기사도의 시대에 전혀 기사답지 못한 왕을 향한 경멸은 제국의 뿌리를 흔들었다. 대승을 거둔 존이 영지의 대부분을 잃고 프랑스를 떠나기까지는 5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1203년 1월)
실지(失地) 회복은 존의 숙명이 됐다. 강한 군대, 즉 많은 돈이 필요했다. 존은 10년 동안 무자비하게 돈을 모았다. 그 사이에 존의 왕국은 의적(義賊) 로빈후드의 배경이 됐다.
복수를 기다렸던 존은 1214년 7월 파리 북동쪽 '부빈(Bouvines)'에서 필리프 2세와 재격돌했다. 프랑스가 이겼고, 잉글랜드가 졌다. 군대를 잃고 귀환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반란이었다. "존 왕은 부빈에서 러니미드로 직행했다. 그 길은 짧았으며 피할 수도 없었다."(제임스 홀트 경·역사학자)
▶자유의 방패가 탄생하다
대헌장은 총 63절로 구성됐다. 내용의 대부분은 왕에게 저항했던 교회와 귀족의 자유와 권리를 왕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로부터 지키기 위한 내용이었다. 세월과 함께 대부분 잊혔다.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담은 몇 조항만 살아남아 세상을 바꿨다. 그중 하나가 39조다.
"자유민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와 같은 신분의 동료에 의한 합법적 재판 또는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체포·구금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거나, 추방되거나, 그 밖의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다."
이 짧은 조항으로부터 무도한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의 자유가 탄생했다. 법에 의한 통치, 적법 절차, 배심원 제도라는 현대 국가 운영의 기본 개념이 명문화됐다. 그 후로 대헌장은 무도한 권력에 맞서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이에게 방패가 됐다.
대헌장의 정신은 오늘날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 녹아 들어가 있다. 대헌장의 정신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당연히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권력과 자유의투쟁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서부터 오늘날까지 자유의 선각자들은 대헌장의 고향 러니미드를 더 견고한 자유의 터전으로삼고자 했다. 1957년 이곳에 대헌장 기념비를 조성한 미국변호사협회(ABA)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기념비(1965년)를 세운 영국 정부가 대표적이다.
▲러니미드 평원에 세워진 케네디 기념비 - 엄혹한 냉전 속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공을 기려서 러니미드 평원에 세운 ‘케네디 기념비’. /송동훈 탐험가
'대헌장 800주년'을 맞은 2015년, 러니미드에는 자유의 상징들이 더해졌다. 러니미드를 관리하는지방정부(Surrey County Council)는 아티스트 휴 로크(Hew Locke)에게 의뢰해 '배심원(THE JURORS)'이란 작품을 평원에 설치했다.
배심원을 상징하는 12개의 청동 의자에는 대헌장의 자녀인 자유(Freedom), 동등한 권리(Equal rights), 법치(Rule of law)를 위해 과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투쟁의 장면들이 조각돼 있다.
영국왕실은 러니미드 평원 안에서도 소풍 나온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동상을 세웠다. 비슷한 시기에 평원 입구의 팻말 내용도 바뀌었다.
'A Home to Politics and Picnics for over 1000 Years'
정치와 소풍. 의미심장하다. 천 년에 걸쳐 대헌장을 낳고 자유를 쟁취한 위대한 정치의 고장. 그 결과 사람들이 소풍을 만끽할 수 있는 곳. 바로 러니미드 평원이다.
▶앙주 왕조(Angevin Dynasty)
1154년 프랑스 중부 루아르 지역에 위치한 앙주(Anjou)의 백작 헨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출범한 영국의 프랑스계 왕조. 잉글랜드뿐 아니라 노르망디·앙주·아키텐 등 프랑스 중서부 대부분을 통치했다. 존 왕이 13세기 초 프랑스 내의 영지 대부분을 상실함으로써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랭커스터와 튜더, 스튜어트를 거쳐 오늘날의 윈저 왕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국 왕실의 시조다.
출처 / 조선일보 & Chosun.com / 러니미드=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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