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 한국 천주교 순교聖地ㅡ절두산 순교 성지
▲절두산 성지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절두산 순교성지 위치도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김옥덕 한국화전, 한지에 수묵담채, 49x59cm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참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섰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벽 부조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2010 이전 후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으로 처절한 순교광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1972년 최종태 교수가 제작하였다. 좌대 1.7m, 본상 2.2m 이다.
▲성모상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이 만들어졌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 만들어졌다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우측), 박물관(좌측)
▲성당 내부
▲중앙 제대
▲성 모자 상
순교 성인 28위의 지하 성해실
"성당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성인들의 유해"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하다.
특히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다 .
▲납골당
▲예수 성심 상
▲성 모자 상
▲성모 상
▲김대건 신부 동상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가 건립한 것으로
홍익대 전뢰진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 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한국 방문 기념상
▲최양업 신부상
▲김대건 신부상
▲절두산 순교 기념비
한 시대를 살고 간 큰 인물들은 그 자취를 뭇사람의 가슴에 새기고 떠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가슴에 새겨진 그 인물을 다시 돌에 새겨서 아름다운 그들의 삶을 기린다.
우리 교회가 대희년을 지내던 2000년도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 간에 걸쳐서 절두산에서 순교한 분들 33명은
자신이 순교했던 그 자리에 높이 8m, 두께 4m, 폭 10m, 총 무게 250톤이나 되는 돌에서 다시 태어났다.
절두산 순교 현양비가 세워진 것이다. 믿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그분들은 상주(尙州) 산 화강암에 재현되어 나갔다.
상주 쑥돌은 수정(水晶)이 자라 기포가 많고 큰 구멍도 가끔 있다. 흑운모(굵은 검은 점)와 검은 긴구름(우라)
무늬도 있지만, 붉은 색을 띠는 홍장석 입자가 굵어 돌의 색깔이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띠워 순교자의
기념탑을 제작하는 소재로 적당했다.
이러한 돌은 섬세한 조각보다는 거친 터치의 작품에 더 잘 어울린다. 이 돌의 외곽에 드로잉 선들의 변화를
주면서 단순한 면을 강조한다면, 오히려 소박한 인상이 강해지고 붉은 돌은 순교자 얼굴에 빛을 더해 주리라.
현양비를 제작하던 4개월간 컴퓨터 조감도를 4번 작성했고, 여덟 차례에 걸쳐서 모형을 제작했다.
그 작품의 초점인 절두상(切頭像)을 확정하는 데에 네 차례의 모형작업을 시도해야 했었다. 이 작품은
상주(尙州) 부근의 화북 면소로부터 2킬로미터 정도가 떨어진 외딴 산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작품의 제작을 대부분 채석장 현장에서 진행했다.
채석장의 오두막에 기거하며 4개월을 지냈다. 핸드폰마저 터지지 않고 간이 화장실 마저 없는
오지에서 불편을 감수하면서 작품에 전념했다.
늦장마와 태풍, 그리고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 추석 때문에 작품 제작에 애를 많이 먹었다. 장마 때는
채석장 인근의 배부른 개울소리가 요란했다.
초가을의 태풍이 몰아칠 때 그 엄청난 폭풍 때문에 작업장의 텐트를 고정시켰던 못이 빠져 총알처럼
석공의 귓가를 스쳐갔던 아찔한 장면도 이젠 거짓말처럼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채석장 맞은쪽의 견훤산성 돌담이 보이는 하늘 높은 날이면, 속리산의 가을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함을
금할 수 없었다. 가끔은 내 작품에 쓸 돌을 산봉우리를 폭파해서 산허리에 있는 작업장까지 중장비로 굴려
운반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마치 전쟁터를 연상케 하는 그 현장에서 나는 이 자연파괴가 과연 아름다운 창조의 시작일 수 있을지 의문을
갖기도 했다. 250톤이 넘는 현양비를 서울로 옮길 때는 차의 하중을 초과해서 중량위반을 감수해야 했다.
큰돌을 운반하기 위해 차폭을 늘렸으므로 차선을 위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현양비는 야밤중의 도둑질처럼
한 밤에 조심스럽게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마음 졸인 기억은 아마 꽤 오래갈 것이다.
<이춘만(크리스티나, 조각가), 순교자 현양, 제 62/63호(2001년 4/5월),
▲절두산 순교기념비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가운데 자리잡은 '큰칼' 모양의 작품은 주탑(主塔)이다. 주탑의 정면에서 오른쪽에 있는 우측탑(右側塔)에는 절두(切頭)된 머리가 올려져 있다.
이 탑의 이름은 '절두탑'으로 불려도 좋을 것이다. 이는 이곳에서 순교가 있었음을 말함과 동시에
이곳의 지명이 절두산임을 암시해준다.
주탑의 왼쪽에 있는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이곳에서 순교했을 또다른
무명순교자들을 조각해 넣었다.
주탑과 우측탑에는 모두 33명의 순교자들이 늙지도 변하지도 않을 화강석 육체를 가지고 다시 태어났다.
▲절두산 순교기념비 주탑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의 주탑(主塔)은 높이 8m, 가로 5m, 세로 4m 중량 150톤이다. 기념탑의 상부에는
조선시대 죄수들이 목에 썼던 형틀인 '칼'을 상징하는 조각을 했다.
그리고 주탑의 하부에는 16명의 순교자를 새겨 넣었고 그 순교자들의 머리 위에는 아치(arch)형으로 이름을 새겼다.
그들의 인체는 내가 그동안 제작해 왔던 4등신 또는 5등신 비례를 적용했다.
이 비례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을 특히 중히 여겼던 단순 질박한 성격을 담아 보고자 했다. 순교자들이 모두 엇비슷한 신장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 '평등한' 인간으로 이미 태어났음과
아제 순교자로서 성인들과 '대등한' 기꺼움을 하늘나라에서 누리신다는 뜻을 함께 상징한다.
주탑의 오른쪽 옆면에는 '전구(轉求)하는 성모'를 선으로 처리하여 새겨 넣었다. '전구하는 성모님'의 변형(deform)된
손에는 인위적인 테크닉이 최대한 절제되었다. 이 절제감으로 번잡한 현실 질곡(桎梏)에서 벗어나 치유되는
이미지를 제공하고자 했다. '전구하는 성모'를 조각한 화강석은 자연의 본질 자체이다.
이로서 화강석에 새겨 넣은 반구상(半具像)의 모습에서 기도하는 마음, 세속적 일상에서 벗어난 마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주탑의 왼쪽 옆면은 '부활한 예수'를 각인했다. 이는 가로 1m 40cm, 세로 2m 40cm 크기로 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은 성서의 중심 내용인 동시에 순교자들이 믿었던 신앙의 핵심이었다.
'부활한 예수'가 자유를 주는 단순한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 준다. 이 부활한 예수 앞에서 우리 자신은 새로운 화두를 계속하여 자신의 미숙함을 성숙시켜 나갈 것이다. 형틀을 받치고 있는 주탑의 뒷 기둥의 옆쪽에는 높이 8m에 폭 3m 60cm 두께 1m가 넘는 '전구하는 성모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새겨 넣었다.
주탑의 뒷 기둥에는 현대 추상화를 조각화해 보았다. 그 곧게 뻗은 기둥은 형태가 없는 형태, 있었던 형태가 사라진 곳, 마음대로 자유로운 창의의 언어가 오가는 통로를 상징하고 있다. 주탑의 재질은 바윗돌이다.
이는 자연의 인내와 침묵을 담고 있어, 자연으로 가는 정확한 길을 안내해 주며, 설교 없는 설교를 하고 있다.
주탑의 전체는 모래 위에 파도가 만든 모래톱 자욱처럼 처리했다. 그리하여 자연에 바탕한 그 자욱(터치)을
소재로 하여 현양비를 캔버스로 삼아서 그 공간에 그림을 그리듯 조각해 나갔다.
주탑의 뒷면에는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밝혀진 33명의 명단을 도표로 만든 '절두산 성지 순교자 명단'을 새겼다.
이 명단은 전문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서 각종 교회기록을 참고하여 작성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더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이름을 밝힐 수 있는 이들의 명단만을 제시했다.
▲절두산 순교기념비 좌측탑
좌측탑은 길이가 5m, 가로가 2m 30cm, 세로가 1m 60cm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관찬 기록에 등장하는
무명인 4명을 비롯하여, 힘없는 농부, 상인, 노비들의 신앙을 기억하고자 했다.
이 탑은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많은 치명자들을 위한 '무명순교탑'이다. 그 감동적 비문에 쓰여진 바대로 박해의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순교자로 드날리는 영예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무명 순교자로 남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교회의 진정한 주인이었고, 진정으로 큰 인물이었다.
이들을 기억하면서 무명의 우리도 우리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다짐하기 위해서
이 '무명순교탑'을 만들었다.
절두산 순교기념비 우측탑
우측탑은 절두탑이다. 이 탑의 상부에 있는 절두상(切頭像)은 사실 이 순교현양 기념비의 중심 테마다.
순교자의 잘린 머리는 탑 위에서 오늘의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 이 절두상의 부릅뜬 한 눈은 탑의 중심이다.
이 부릅뜬 눈으로 무거운 화강석 기념탑은 지탱되고 있다. 그리고 그 눈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 있기를 경계한다.
우리는 쉴 겨를 없이 매일 죽음을 체크하며 살아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고 그리스도님은 말씀하셨다. 부
릅뜬 눈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부활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현실을 확실히 경계하면서
미래에의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는 기다리는 눈이다. 또다른 한 눈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눈물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참 믿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겨레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연민의 눈물이다. 회개의 연속인 삶만이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은 그침 없는 자기 회개와 정개(定改)의 눈물이다.
그 특이한 두 눈은 신망애를 상징하며, 우리에게 그 순교와 자기 비움의 신비를 기억케 할 것이다.
우측탑 하부의 정면과 양면에는 신문 과정에서 배교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순교의 길을 간 신앙의
선조들을 표현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치명자인 남편 김진(베드로)를 따라 닷새 후에 순교하신
김큰아기 순교자의 상을 비롯하여 열세 분의 상이 새겨져 있다. 우측탑의 윗면에는 조광 교수가 짓고
김단희 선생이 쓴 '절두산 순교기념비문'이 있다.
▲조창원 작, 절두산의 대학살2, 73 x 60.5cm, 2008년
▲조창원 작, 절두산의 대학살2, 73 x 60.5cm, 2008년
▲조창원 작, 절두산의 대학살2, 73 x 60.5cm, 2008년
▲오성바위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조창원 작, 오성 바위에서 최후의 만찬, 65 x 53cm, 2008년
▲형구 돌
1976년 연풍 성지를 개발할 때 두 개가 발굴되어 하나는 그 자리에 두고 다른 하나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그 후에 또 하나가 발굴되어 현재 연풍 성지에 형구돌이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 절두산에 있는 형구돌의
크기는 둘레3m, 앞구멍 지름 30Cm, 뒷구멍 지름 6Cm, 구멍의 앞뒤 거리 30Cm로 원추형이다.
형구돌은 교수형을 집행했던 형구로 가운데 구멍으로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죄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쳐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곳에서는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는데, 이곳 연풍에서는 형구돌을
사용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은언군 묘비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
(1801년 3월).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송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
조선 왕실의 첫 순교자인 송 마리아 묘는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18번지에 있었는데 파묘되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후에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는 한 사찰에서 은언군과 송 마리아 묘비가
발견되어 한동안 보관되다가 그후 절두산 성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 기간 중에 치명한 많은 순교자들 중 왕족 출신으로 철종의 조부가 되는
은언군(恩彦君, 李彦, 1755~1801)의 부인 송 마리아( ?~1801, 철종의 조모)와
그의 아들 상계군의 부인 신 마리아( ?~1801, 철종의 큰어머니)가 있다.
그들의 입교와 순교의 내용은 천주교의 왕실 전교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여 관원의 눈을 피해
지하 전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국왕 정조에게 서제가 되고 철종에게는 조부가 되는 은언군이 있었다.
이복형제 정조는 은언군의 처 송씨에서 낳은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과 같이 반역을 꾀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벽파의 우두머리 대왕대비의 간청에 못 이겨 상계군을 자결케 하고
1786년 은언군은 강화로 유배 보냈다.
그래서 몰락으로 잃은 아들의 슬픔과 역모로 몰려 강화로 유배된 남편에 대한 비탄 속에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흉가라고 부르는 양제궁(良娣宮)에서 비운을 안고 살았다.
이 궁은 전동(磚洞, 현 종로구 송현동 근처)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역적의 폐궁(廢宮)이라 불렀다고 한다.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는 절망 속에 살던 그녀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갖게 해 주었으며,
그녀의 도움으로 주 신부가 폐궁으로 찾아가 두 부인에게 각각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또한 두 부인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교리 연구 단체인 명도회에도 가담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초청하여 강론을 듣고 그들에게 딸린 시비(侍婢)들도 입교케 하였다.
다행히 궁 옆에 열심한 교우 홍 안토니오가 살고 있었으므로 주 신부는 안토니오의 집 담 벽을 뚫고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 후 주 신부의 헌신적 노력으로 조선의 교세가 늘어갔지만, 날로 심해지는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긴 주 신부는 1801년 3월 12일에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모진 고문으로 폐궁의 궁인 서경의(徐景儀)가 고백하여 왕의 서숙모인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가 세례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 궁인은 배교한 후 풀려나왔다.
이로 인하여 사교에 물들고 흉측한 외국인과 상종하면서 국법을 어긴 대죄와 설상가상으로 폐궁까지 끌어들여
숨긴 죄는 마땅히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김 대비의 완강한 청으로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 고부는
1801년 3월 17일에, 강화도로 귀양가 있던 은언군은 같은 해 5월 30일에 사약을 받았다.
본래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과 송 마리아의 묘는 진관외동 산 18번지에 있었는데, 일제 때 다른 곳으로
이장되고 묘 앞에 큰 비각만 남아 있다가 1950년 전쟁 때 소실되었다. 그 이후 진관내동 흥창사에
은언군 묘비가 옮겨져 있다가 다시 1989년 9월에 절두산 성지로 옮겨졌다.
이 비의 비신 앞면에는 흥창사(興昌寺)란 사찰명과 개창주(開倉主) 부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다.
그런데 비신 뒷면을 보면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은언군...(恩彦君...)’
글자와 비문 맨 마지막에 ‘崇禎紀元後四辛亥八月 日立(숭정기원후사신해팔월 일립)’이란 글씨가 보인다.
‘崇禎紀元後四辛亥’는 1851년에 해당한다.
▲박순집 성인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현양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선교에 앞장서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다
▲성 남종삼 동상
남상교는 남종삼 성인의 부친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급선회함에
따라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 순교사적비
해운당대사의 징지비(주어사)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던 중 발견-1960년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됨-한 주어사 터 표지 비석으로, 海雲堂大師義澄之碑(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이 비가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며, 비신 높이는 91cm, 폭은 33cm이다.
▲척화비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박물관 전시실 내부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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