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구교사건(盧溝橋事件)
다리 근처에서 한밤중에 울린 총성… 中.日전쟁의 발단
▲ ①노구교(蘆溝橋) 사건은 1937년 7월 7일 중국과 일본 군대가 베이징의 다리에서 충돌한 사건이에요.
이 사건은 8년간 이어진 중일전쟁의 발단이 됐어요. 과거 노구교의 모습
▲노구교 사건이 일어난 뒤 중국군이 무장을 하고 있는 모습
▲노구교는 다리 난간에 새겨진 수백 개의 아름다운 돌사자상으로도 유명해요.
마르코 폴로는‘동방견문록’에서“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극찬하기도 했죠. /위키피디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지난 8일 선거 유세 연설 도중 총격을 받아 사망했어요. 이에 일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은 아베 전 총리를 추모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는데요.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일부 중국인이 아베 전 총리의 죽음을 조롱하며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 논란이 됐습니다. 술집 전광판에 '普天同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경축한다), ' 天喜地'(대단히 즐겁다)라는 문구와 함께 아베 전 총리의 영정 사진을 띄운 모습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퍼지며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이렇게 반일 감정이 고조된 이유는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일인 7월 8일이 '7·7 사변'과 일자상으로 하루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7·7 사변은 1937년 7월 7일 중국과 일본 군대가 베이징의 다리(교량) 노구교(蘆溝橋·루거우차오)에서 충돌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노구교 사건'으로도 불리지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은 8년간의 중일전쟁을 이어가는데요. 7월 7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9세기 중국 청나라와 일본
19세기 중국 청나라는 경제 위기와 부정부패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새로운 세상을 꿈꾼 유학생과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떠나 외국으로 향했는데, 많은 이가 일본을 택했어요. 1907년부터 30년 동안 약 3만명의 중국 학생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죠.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는지 배우고자 한 거예요. 일본은 청나라 정부의 정치 탄압을 피하는 도피처 역할도 했어요. 중국의 정치가인 쑨원(孫文)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후 대외 침략의 길을 걷고 있었어요. 1894년 청나라와 청일전쟁을 벌여 승리한 데 이어 1905년 러시아와의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며 제국주의의 발판을 만들었지요.
특히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승전국 위치에 서며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력한 국가로 급부상했어요. 그러면서 아시아의 패권을 잡겠다는 원대한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러일전쟁 승리하고 만주까지 점령
그 첫 번째 대상이 된 지역이 만주예요. 일본은 일찍이 만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근대 일본의 계몽 사상가이자 근대화의 스승이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0년부터 "러시아의 남하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위하고 열강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반도와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 지역을 손에 넣을 기회를 얻게 되는데요. 전쟁 후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남만주에 철도를 건설할 권리를 얻게 됩니다. 이에 일본은 철도 건설 권익과 만주에 살고 있는 일본인 보호를 명분으로 만주에 관동군(關東軍)을 주둔시킵니다.
처음에는 1만명 규모였는데, 점차 늘어 1930년대 초에는 10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했어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에 괴뢰정부를 수립합니다.
중국 본토 노리던 일본
만주를 차지한 일본의 다음 목표는 중국 본토였어요. 일본군은 이전부터 만주뿐 아니라 중국 본토에도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요. 일본군의 중국 본토 주둔은 '의화단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화단(義和團)은 외세 배격을 주장한 청나라의 반(反)제국주의 단체인데요.
1900년 의화단이 일으킨 봉기를 이듬해 미국 등 열강이 진압하고 청나라와 열강 사이에는 '신축조약'(辛丑條約)이 체결됐어요. 조약에 따라 열강은 베이징 공사관 구역과 베이징·산하이관 철도 주변 요지에 대한 군대 주둔권을, 그리고 1902년에는 톈진에 대한 군대 주둔권을 얻었습니다.
일본도 이 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어요. 당초 일본에 할당된 병력은 1600명 정도였는데, 1936년 5월 병력을 3배나 늘려 베이징의 서남쪽 교외인 펑타이에 주둔시켰죠. 군대 주둔권을 보유한 열강 가운데에는 이 30여 년 사이에 주둔군을 폐지하거나 단계적으로 감축을 단행한 경우도 있었는데요. 일본은 오히려 5600여 명으로 늘린 거예요.
그러자 중국은 일본에 항의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았죠. 이에 중국군은 일본군의 도발에 대비해 이 지역에 대한 수비를 강화했어요. 즉,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중국의 동북 지역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겁니다.
중일전쟁으로 이어진 우연한 사건
1937년 7월 7일 노구교에서 사건이 발생합니다. 베이징 남서쪽 10㎞에 있는 노구교는 중국 금나라 시절인 1192년에 지어진 아치형 석조 다리로, 길이 266m에 너비 9m에 달했어요.
이탈리아의 상인으로 중국 각지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는 다리 난간에 새겨진 수백 개의 아름다운 돌사자상과 주변 경치에 매료돼 '동방견문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극찬하기도 했죠. 현재는 물이 흐르지 않지만, 당시에는 베이징과 내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어요.
오후 11시쯤 이 다리 근처에서 총성이 울립니다. 그리고 야간 훈련을 하던 일본군 한 명이 실종됐어요. 일본군은 이것이 중국군 소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에 이튿날인 8일 오전 두 나라 군대 간에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졌죠.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1887~1975)는 사태를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일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사태 규명을 위한 교섭을 진행했지요.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투는 계속됐어요. 그러다 7월 11일 밤 정전협정이 체결됩니다.
하지만 일본 내각은 이날 긴급회의를 소집해 중국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병사의 실종은 발포와는 관련이 없었고, 병사는 무사히 원대로 복귀했어요. 하지만 일본군은 이 사실을 숨기며 병사 실종 사건을 중국 침략의 계기로 삼은 거예요.
당시 일본 군부는 3개월이면 중국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10여 만 육군 병력을 파견해 중국을 침략했어요. 7월 말에는 베이징과 톈진이 연이어 함락됐고, 일본군은 8월 13일 상하이로 진격하며 난징을 위협합니다. 이튿날인 8월 14일, 중국 국민정부는 대일 항전을 선포했어요.
당시 중국 민중 대다수가 "일본에 어떠한 양보도 해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러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12월 난징은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갑니다.
이에 국민당 정부의 관리 등 많은 이는 충칭으로 옮겨 항전해야만 했지요. 이후 중일전쟁은 8년간 이어졌어요. 일본은 1941년에 하와이를 공격하며 미국과 전쟁을 벌였고, 전장은 더욱 확대됐죠. 하지만 일본이 1945년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중일전쟁도 이때서야 끝나게 됩니다.
출처 / chosun.com / 글.사진 /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1937년 중일전쟁의 시발지였던 루거우차오(노구교.盧溝橋)
▲루거우차오(노구교.盧溝橋)
베이징(北京) 서남쪽 약 50km 근교에 노구교(盧溝橋)가 있다. 지금까지 800여년의 역사를 갖고있다. 북경시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로서 동,서 길이는 266.5메터, 남, 북 너비는 9.3메터이며 모두 백석(白石)으로 만들어졌다. 다리옆에는 청조건륭제가 쓴 "盧溝曉月"이란 비가 세워져 있고 옛날부터 燕京八景의 하나로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 노구교의 성문이 복원되어 올라갈 수도 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의 발단이 된 즉 중일전쟁의 발단의 노구교사건 때문에 잘 알려진 이 다리는 베이징의 명소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
아치형 교각 11개가 떠받친 길이 266.5㎙ 난간엔 140개의 기둥이 세워졌고, 각각 모양이 다른 사자상이 새겨져 있고 발 밑에도 조그마한 사자가 있다. 몇 번씩 세어보아도 잘 세어지지 않는다는데 정확하게는 486개이다. 1981년에 '盧溝橋史料陳列館'이 개설되었다. 밝은 달이 비치는 노구교의 하얀 모습은 그 자체가 예술이다.
북경시의 남서쪽 교외에있는 백색의 돌다리, 난간에는 486개의 사자상과 주석(柱石)등이 있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강에는 멋있는 다리가 걸려 있다. 아마 세계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일 것이다,' 라고 기록할 정도로 아름다운 다리이다.
특히 여기는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사자상이 조각된 난간에는 탄환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중일 전쟁 발발 60주년인 1997년 7월 7일 중국과 홍콩,대만에서는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강력한 주장과 시위가 잇따랐다.
베이징에서는 이날 참전용사와 학생,일본의 잔학행위 희생자가족 등 수 천명의 시민들이 지난 37년 7월7일 중일 전쟁의 단초가 됐던 '노구교(蘆溝橋)사건'의현장에 모여 8년간의 전쟁중 사망한 3천5백만 중국인을 추모하는 집회를 가졌다.이날 행사에는 류화칭(劉華淸)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과 웨이젠싱(尉健行)공산당중앙위원이 참석했다.
▶노구교 사건 경위
▲루거우차오(노구교.盧溝橋)
항일전쟁시기에 중국인민들은 크나큰 희생을 치르게 되어, 경제는 파탄되고, 현대적 산업과 국민총생산의 면에서도 발전은커녕 오히려 엄청난 후퇴를 하게 된다. 중국의 근대화를 향한 흐름이 또 한번 단절된 것이다.
부단히 핍박해 오는 일본을 바라보면서, 1935년 봄에 장개석은 내정과 외교.군사.재무와 군사에 대한 각 분야의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일제가 동북지역으로부터 남하하여 내려오는데 대비하여 국제적 지원, 특히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얻어내는 동시에, 화폐를 개혁하고 자원의 절야과 개발로 전쟁물자를 준비하였다.
3년간의 국방계획을 세워 육군을 새로이 편제하고 병역법을 실행하여 신병을 모집하며 군사공업을 일으키는 동시에 군비를 강화하고 전략상의 요충지에 국방공사를 벌였다.
장개석은 일본과의 싸움이 장기화될 경우 광대한 중국영토중에서도 서남과 서북지방이 최후의 결전지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서남지방의 개발을 강화하여, 서북지역의 국경선 밖으로 통하는 철로와 국도를 건설하였다.
또 '신생활운동'을 통하여 국민정신을 진흥하고 문화재를 보호[특히 고궁박물원의 문화재]하여 서남지역으로 옮겼으며, 대학들을 이전하는 등등의 일을 추진하였다.
중국국민당이 위와 같은 활동을 하던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9.17사변'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며 '7.7사변'때에는 중공이 이끄는 동북 항일연합군이 이미 4만5천명에 이르렀고, 일본군과 중국영토 내에서 일본군으로 편성된 괴뢰 일본군 14만을 섬멸하기도 하였다.
1935년 중공이 발표한 [항일구국을 위해 전체동포에게 고하는 글]에서는 전체 동포는 총동원하여 일제히 일본과 싸우자고 호소한다. 중공의 홍군(紅軍)은 계속하여 선언을 발표하고, 전민족이 항일 통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호소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Beijing West train station에서 964번 버스
전화:8389-3919
개장시간: 7:00-19:00
입장료: 10元
베이징(北京) 남서쪽 15㎞ 떨어진 운하인 융딩허(永定河)위에 세워진 루거우차오는 길이 266m, 너비 9m로 1189년에 만들기 시작해 1192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수해로 인하여 훼손되었다가 1698년에 복구되었다.
281개의 돌난간과 기둥이 있으며 기둥 위에는 사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기둥 위에 조각된 사자는 모양이 다양하고 살아 있는 듯하며 변화가 많아 ‘루거우차오 위의 돌사자가 몇 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속담이 전해진다. 조사에 의하면 큰 사자의 수는 총 281개이며, 그밖의 작은 사자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485여 개에 이른다.
루거우차오는 예로부터 베이징의 중요한 나루터였으며 이탈리아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는 루거우차오를 세계 최고의 훌륭한 다리라고 말했다.
특히 이 다리는 1937년 7월 7일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시작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일본군은 7일 전투를 개시해 다음날인 8일에 루거우차오를 점령했고 28일 베이징과 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를 계기로 루거우차오 사건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중?일전쟁으로 돌입했다. 중국측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항일(抗日)의 기운이 높아졌다.
글.사진 출처 / 박영서 기자(pys@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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