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雷帝)로 불린 러시아 최초의 차르.이반 4세(Ivan Ⅳ)...
아내 잃고 폭군으로 돌변
▲ 이반 4세의 초상화(왼쪽)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아나스타샤의 동상. 17세에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즉위한 그는 초기엔 대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며 건설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죽음 이후 잔혹한 공포 정치를 펼치며 국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결국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이어졌습니다./위키피디아
이반 4세가 가장 큰 목표로 삼았던 국내 개혁은 대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어요. 이를 위해 1549년 대귀족과 고위 성직자, 중앙과 지방의 고위 관리, 사족(士族·소지주), 대상인의 대표로 구성된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새로운 법, 지방 제도 개혁 등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이반 4세는 이를 기반으로 사족층을 육성해 모스크바에 가까운 봉토와 중앙 관청의 공직을 주었고, 영지의 규모를 기준으로 국가가 요청할 때 바쳐야 하는 무사와 말 등의 수를 정하는 개혁도 실시했습니다. 이는 대귀족 등 기존 봉건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교회 제도 개혁, 군사 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특히 그의 인기가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타타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덕분이었어요. 타타르족은 이전부터 러시아 도시들을 침탈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기도 했어요. 1552년 이반 4세의 군대는 여러 차례의 사투 끝에 카잔한국(汗國)을 정복했고, 4년 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汗國)도 장악하면서 또 하나의 타타르족 근거지를 무력화해나갔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볼가강 전 유역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시베리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게 됐어요. 이반 4세를 흔히 '뇌제('그로즈니'라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말로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섬뜩하고 무섭다는 의미)'라고도 부르는데, 훗날 펼친 공포정치 탓도 있지만 이처럼 강력한 정복 정책을 펼친 것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내 죽음 이후 공포정치 시작
하지만 이반 4세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폭력적인 기질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줬던 그의 아내 아나스타샤가 1560년 30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그의 변화가 시작됐어요. 그는 귀족들이 왕비를 독살했다고 믿었고, 그녀의 죽음 이후 이반 4세는 대귀족들과의 전쟁을 선포했어요.
우선 이반 4세는 전 국토를 차르의 직영지인 '오프리치니나'와 귀족들의 영지인 '젬시치나'로 구분하고 오프리치니나에 편입된 토지를 자신의 오프리치니크에게 나눠주었어요. 오프리치니크는 '지옥의 암흑'이라 불리는 자들로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대 조직이었어요.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타고 빗자루와 개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서 온 나라를 누비며 대규모 테러를 자행하였어요. 대상은 차르에게 배반을 꾀한 자뿐만 아니라 차르의 기분을 상하게 한 자도 포함되었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하였어요.
차르의 돌발적인 행동은 1564년 말부터 정점에 이르렀다. 모스크바로부터 약 100km 정도 떨어진 알렉산드로프 마을에 정착한 이반 4세는 귀족과 평민들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를 수좌대주교에게 전달했다. 그 내용은 귀족과 성직자를 비난하면서도 평민들에게는 아무런 적대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혼란에 빠진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모스크바 시민들은 차르가 모스크바로 돌아와 다시 차르로서 통치해달라고 간청했다. 이반 4세는 차르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오프리츠니나’를 창설하고 차르의 반대파들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고 재산까지 몰수할 수 있는 요구 조건이 수락된 이후 모스크바 크렘린으로 돌아왔다.
이후 1565년부터 1572년까지 약 7년간 러시아에는 암흑과 공포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차르의 반대파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쿠릅스키 공후, 차르의 사촌 형제인 스타리차의 블라디미르 공, 필립 수좌대주교 등 주요 인사들이 차르의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처형됐고, 처형된 인사와 관련된 가족, 친척, 친구들이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때 차르의 폭정에 앞장서 행동대 역할을 했던 기구가 바로 ‘오프리츠니나’이다.
흔히 러시아 비밀경찰의 효시라고 부르는 오프리츠니나는 본래 모스크바 공후 가문에 속한 영지를 뜻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이반 4세 이후 차르가 직접 관리하는 ‘황실령’으로 불렸고, 비밀경찰이라는 뜻과 함께 1565년부터 1572년까지 진행된 이반 4세의 통치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르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한다.
사설 비밀경찰로서 오프리츠니나는 한때 6,00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들의 임무는 차르를 험담하거나 그에 반대하는 불순한 자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검은 옷과 검은 말을 타고 다녔으며, 개 머리와 빗자루를 달고 다녔다. 차르에 반대하는 적들을 개처럼 물어뜯고 빗자루로 쓸어버린다는 의미였다. 이들이 행한 고문과 처벌 방식은 잔인하고 끔찍했다.
공식적으로 오프리츠니나는 1572년에 종결됐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반 4세의 정서적 불안과 그에 따른 폭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됐다. 폭정의 마지막 사건이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은 1581년 11월 16일 밤에 일어났다.
러시아 유명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을 통해 더 잘 알려진 이 사건은 이반 4세가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반을 몽둥이로 죽인 사건을 말한다. 임신한 며느리의 복장이 탐탁지 않던 이반 4세가 그녀를 꾸짖자, 이를 말리던 아들을 쇠몽둥이로 내리쳐 죽인 것이다. 레핀의 그림에는 아들을 죽이고 부둥켜안은 채 절망감에 빠진 이반 4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폭군 이반과 그의 아들 이반’(일리야 레핀 作).
이반 뇌제가 그의 아들을 뾰족한 쇠몽둥이로 쳐서 치명상을 입힌 직후 장면을 상상해 그린 작품.
이 상처로 며칠 칠 뒤 아들은 결국 사망했다. / 위키피디아
왕권을 계승할 후계자의 죽음으로 러시아 왕조는 급격한 붕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측근인 보그단 벨스키와 체스를 두다가 발작을 일으켜 뇌졸중으로 이반 4세가 사망한 이후에 병약한 아들 표도르 1세(1584년 ~ 1598년)가 14년간 권좌에서 통치하지만, 실권은 차르의 처남 보리스 고두노프(재위 1598년 ~ 1605년)가 쥐고 있었다. 표도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에 등극했다.
이로써 9세기 중반부터 이어온 러시아 류리크 왕조는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는 1613년까지 러시아는 극심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에 처하고 외부 세력인 폴란드가 침입하는 등 절체절명의 혼란에 휩싸였다. 그런 까닭에 러시아 역사에서 이 시기를 ‘혼란의 시기(1598년 ~ 1613년)’라고 부른다.
공포정치로 이반 4세는 막강한 전제 권력을 확립할 수 있었지만, 나라는 점점 기울어갔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을 틈타 1571년 타타르족이 수도 모스크바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고 10만여 명의 시민이 학살됐어요. 이반 4세는 말년으로 갈수록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자신의 아들마저 죽였고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은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차르는 앉아서 위로부터 감시하며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는 거울이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나는 매일 일하며, 군림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이러한 말이 나온 이유는 푸틴 대통령이 지난 2000년 이후 모두 네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차르'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 모습은 차르로서 처음 왕관을 썼던 이반 4세(1530~1584)를 통해 추론해볼 수 있어요.
◇귀족들에게 홀대받은 어린 대공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였던 옐레나 글린스카야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대공 자리를 이을 적장자를 원했던 바실리 3세는 늦은 나이에 아들 이반을 보고 기뻐했어요. 하지만 이반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이반은 1533년 아주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반 4세에게 '대공'은 이름뿐인 직위였어요. 당시 러시아는 귀족 가문인 슈이스키가와 벨스키가로 양분돼 끊임없는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실 행사가 아닐 땐 이반 4세를 홀대하였어요.
이러한 무질서와 핍박을 경험한 이반 4세는 귀족들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해 깊이 불신하게 되었어요. 기록에 따르면 이반 4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놀이가 높은 테라스에서 개를 떨어뜨리고 개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는 일이었다고 하니 그의 성격이 얼마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형성됐는지 알 수 있어요.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즉위해 개혁 실시
1547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이반 4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여 '차르'로 즉위합니다. 로마제국 황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는 러시아 최초의 차르입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비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차르로 칭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지위였죠. 이반 4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닌 러시아 차르국을 선포합니다.
▲이반 4세 시대에 건축한 모스크바 붉은광장 남쪽의 상크트바실리 대성당.오른쪽은 크렘린궁의 스파스카야 시계탑.
/게티이미지코리아
폭군과 로맨티스트의 경계에 선 이반 4세의 평가는 항상 상반된 주장이 제기된다. 주된 이유는 그가 추진한 통치 전반기와 후반기의 특징이 너무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1560년 이전에 보여준 이반 4세의 정치적 행태는 러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통치자들보다도 뛰어난 모습이었다. 그러나 1560년 이후, 즉 첫 번째 부인인 아나스타시야가 사망한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는 단순한 평범을 넘어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을 상징하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이유는 심경 변화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이다. 이반 4세가 행한 전반기의 치적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귀족들의 권력 암투 속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의견이 대립하는 영역은 구조적 문제이다. 차르 개인의 문제로 제한하는 의견도 있지만,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차르와 보야르 사이의 권력 갈등이 심경 변화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더욱이 이러한 구조적 원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더해져 이반 4세는 급격하게 심경 변화를 겪었고, 그 결과 이반 4세의 통치 후반기가 폭력으로 얼룩졌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학자들도 있다.
이반 4세의 행위는 프랑스의 루이 11세, 영국의 헨리 8세 등의 경우와 같이 통치 행태에서 나타나는 잔인함의 정도야 다를 수 있지만, 귀족의 권한을 견제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한 군주의 정치적 행보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펌 naver 지식백과)
출처 / chosun.com / [숨어 있는 세계사]/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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