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텐베르그(Wittenberg)
종교개혁자.마틴루터 묘 & 비텐베르그 성. 교회.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1517년 10월 31일(루터 34세) 독일의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당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등 문제점을 지적한 '95개조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붙였다. 교황청은 진노했고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사건'은 번져갔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오는 2017년이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다. 이 특별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종교개혁 관련 지역들은 2008년 9월부터 '10년 준비 사업'에 착수했다. 종교개혁의 전주곡은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체코 출신의 얀 후스(1369~1415)가 먼저 울렸다. 그는 면죄부 판매 중단을 주장하다 콘스탄츠공의회 의결로 1415년 화형당했다.
관광지로 유명한 체코 프라하 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동상이 바로 후스다. 처형 당시 후스는 자신의 이름이 체코어로 '거위'를 뜻하는 것에 빗대 "지금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태워 죽이지만 백 년 뒤 백조가 나타나리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100년이 지난 1517년에 '백조'처럼 루터가 나타났다. 독일 작센주(州) 라이프치히에서 차로 1시간 반 달리면 '루터의 도시(Lutherstadt)' 비텐베르크에 닿는다. 인구 2만명의 소도시지만 루터가 '95개조 명제'를 붙였던 시내 중심부 비텐베르크 성교회를 방문하는 순례객은 연간 20만 명 이상이다.
1524년 카톨릭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전환됐고 당시 루터의 논제는 동판문에 각인돼 영구히 남아 있다. 문 상부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그림은 보통 그림과 달리 눈을 뜬 채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형상이다. 교회의 각성과 개혁의 바람을 은유한다.
성교회의 안내자로 평생을 바친 베르나르트 그룰(75) 씨는 "비텐베르크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며 신앙과 믿음, 개혁을 낳은 '정신적 문화재'"라며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들은 내면적인 변화와 신앙을 향한 개선 등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교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루터의 참나무'가 있다. 루터가 15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파문장을 불태운 후 참나무를 심었던 현장이다. 근처에 루터가 살던 집은 루터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성직자의 독신 수도를 반대한 루터는 수녀였던 카트리나 폰 보라와 결혼해 이곳에 살았다.
박물관에서는 작센 주의 궁정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의 초상과 제단화, 당시 판매됐던 면죄부, 종교개혁 확산에 쓰인 판화 등의 자료를 볼 수 있다.
파문장을 불태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와 라이프치히 등지에서 신학논쟁을 벌이며 신앙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름없는 젊은 사제의 외침은 처음에 그다지 반향이 없었으나 점차 확산되면서 결국 1521년 독일 서부 보름스에서 제국회의가 열렸다.
보름스대성당에 불려온 루터는 성당 뒤편의 제국회의장에서 황제 카를5세와 선제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루터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Ich stehe hier, helfe mir, Gott!)"라는 말로 신념을 지켰다. 비장했던 당시 상황을 작은 석판이 증언하고 있다.
목숨까지 위태로진 루터는 그를 지지하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으로 구출됐고 루터는 신분을 숨긴 채 보름스에서 270km 떨어진 아이제나흐에서 숨어지냈다. 루터가 이 지역 외곽 바르텐부르크 성에서 헬라어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덕분에 성경은 성직자의 전유물에서 평신도들에게까지 보급됐고 종교개혁의 정신은 빠르게 확산됐다.
그가 집필하던 책상과 작은 방은 지금까지 보존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경 번역을 끝내고 152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평생 종교개혁 정신을 전파하다 고향인 아이스레벤에서 생을 마쳤다. 루터의 생가와 그가 서거한 집, 마지막 설교를 한 안드레아교회 등은 관광명소가 됐다.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채. 교회정문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5개조 논제를 붙였던 성채교회 정문, 성당의 현관문은 전통적으로 ‘칠판’으로 되어 있어, 대학에서 일반인에게 전하는 사항을 적는데 사용되었다. 신학 교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의 판매에 항의한, 95개조의 유명한 반박문을 이 곳에 공표하였다. 그 때 루터 나이 34세였다
▲95개조 동판 정문
▲95개조 동판 정문
▲95개조
로마 가톨릭교회는 부패하여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폐단이 심했다. 루터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성자교회의 문 앞에 '95개의 논제'를 붙여놓았다. 이로써 그는 가톨릭교회와 전면적인 대립으로 치달았으며, 이 95개의 논제는 대중에게도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루터는 교회가 인간의 죄를 면하거나 구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텐베르그 성교회 안쪽입구
▲비텐베르그 성교회 안쪽입구
▲비텐베르그 성교회 안쪽입구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성. 교회 내부
▲마틴 루터(Martin Luther) 묘(1483.11.10 ~ 1546.2.18)
▲마틴 루터(Martin Luther) 묘
▲마틴 루터(Martin Luther) 묘
▲마틴 루터(Martin Luther) 묘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 묘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의 동료로서 종교개혁운동을 통한 복음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519년 루터와 함께 라이프치히 논쟁에도 참석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노력하였다. 신학자들의 신학적 차이를 화해시키는 관용적 인물로 종교개혁 신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 묘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 묘
▲마틴 루터(Martin Luther) 부조
▲95개조
▲루터의 처 까타리나 폰 보라
▲루터와 멜란히톤
▲비텐베르그 성마리아교회
비텐베르크 광장 건너편에 루터가 개혁 설교를 했던 성마리아교회
▲비텐베르그 성마리아교회
▲비텐베르그 성마리아교회
▲비텐베르그 성마리아교회
▲마틴 루터(Martin Luther) 동상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벌부(免罰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동상
▲마틴 루터(Martin Luther) 동상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으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맨 앞)과 필리프 멜랑히톤 (안쪽)의 기념비가 서 있어, 엘베 강가의 이 도시에서 일찍이 세계사가 기록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비텐베르그 대학
▲비텐베르그 루터가 1520년 교황의 파문장을 찢은 오크나무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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