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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남 부산****기행

경남 함양ㅡ함양을 대표하는 전통마을. 선비의 고장 개평마을,

by 삼수갑산 2022. 10. 5.

함양을 대표하는 전통마을. 선비의 고장 개평마을,

경남 함양군 지곡면에 위치한 전통마을인 개평마을이다.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14세기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으며, 이후 풍천노씨가 처가였던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터를 잡았다. 지금은 하동정씨, 풍천노씨와 초계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김종직의 제자로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한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정여창을 비롯하여 노진 등 많은 유학자와 관리 등을 배출하여 양반들의 고장인 함양를 대표하는 전통마을로 여겨진다. 마을에는 정여창이 살았던 곳에 지은 일두고택을 비롯하여 풍천노씨 대종가, 오담고택, 하동정씨 고가 등 양반들이 살았던 유서깊은 대저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마을 부근 남강과 가까운 곳에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이 있다.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2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후대 서원 건축의 모범이 되었던 곳이다.

 

마을은 백두대간 대봉산(해발 1,252m) 줄기가 평지와 만나는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평촌천이 남강 지류인 지곡천과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2개의 하천 사이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고 개평(介坪)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위는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농지가 넓은 편이며, 배후에 큰 산을 두고 있어 물이 풍부한 편이다. 벼농사에 적합한 지형으로 예로부터 양반들이 세거지로 삼았던 전통마을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함양 개평마을,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릴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선비마을로 조선조 오현 중 한분인 일두 정여창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동정씨와 풍천노씨 그리고 초계정씨 3개의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 역사적 위상이 높은 선생을 배출하였다.

 

개평마을은 일두고택을 비롯한 많은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선조들이 풍류를 즐겼던 교수정, 일두선생의 명상의 장소였던 개평리소나무군락지 등 조상의 의식주와 생활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이 많이 남아 있어 민속자료로써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출처:문화재청>

개평마을은 선비의 고장 함양을 대표하는 전통마을이다. 백두대간 산줄기가 평지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물이 풍부하여 논농사에 적합한 고장이다. 마을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어 개평마을이라 불린다.

 

마을 입구 큰 길에 지곡면소재지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오랜 내력을 보여주는 고목이 마을입구 대로변에서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마을 양쪽을 흐르는 평촌천과 지곡천이 만나는 지점이다.

 

▲여느 시골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 입구에 방앗간이 자리잡고 있다. 넓은 들판에서 생산된 곡식들이 이 방앗간을

거쳤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시골마을마다 생겼던 방앗간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을 북쪽편으로 흐르는 지곡천. 마을 뒷편 대봉산(1,252m)에서 발원하여 남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지천이다.

이곳에서 평촌천과 합류한다. 하천 주변으로 비교적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지곡천 주변 들판과 봉우리들.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지곡초등학교.

 

▲초등학교를 지나면 넓은 밭과 크고 작은 한옥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원래 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과 가까워 자연스럽게 밭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마을은 양반들이 살았던 대저택들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생활편의를 위해 개량한 한옥들이 섞여 있다.

 

풍천노씨 종가집= 이 집은 풍천노씨 입향조인 조선초 문신 노숙동이 처가인 이 마을에서 처음 자리잡은 곳이다. 마을의

대종가이지만 저택의 규모나 형태가 소박하면서도 검소해 보인다.

 

▲맞은편에 있는 한옥. 집은 낡아 보이지만 마당이 넓고 규모가 있어 보인다.

 

▲풍천노씨 종갓집 옆에 위치한 한옥이다. 서울의 개량한옥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솟을대문이 있는 큰 규모의

문간채가 있다. 내부는 크지 않은 편이다.

 

▲마을 북쪽편을 지나가는 큰 길. 양쪽으로 전통마을임을 보여주는 담장과 한옥들이 들어서 있다.

다른 마을로 가는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이다.

 

▲개평마을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중에서 지대가 높은 이곳에 일두고택을 비롯하여 하동정씨고가, 오담고택 등 마을을 대표하는 대저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일두고택 입구에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일두고택 앞 골목길. 바닥에는 판석들이 깔려 있어 양쪽의 돌담과 함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솟을대문이 있는 일두고택 대문채. 충신과 효자를 기리는 정려가 4개씩이나 걸려 있어 유서깊은 고택임을

말해주고 있다. 구한말 한양의 도시한옥을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함양 개평마을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일두고택. 이 집은 조선중기 유학자이자 문신인 일두 정여창이 살았던

터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집이다.  

 

넓은 부지에 사랑채, 안채, 별당, 사당 등을 고루 갖추고 있는 대저택이다. 사랑채 앞 마당에는 자연석과 나무를 심어

인공적으로 정원을 꾸며놓고 있다.

 

TV드라마 ‘토지’를 비롯하여 사극에 자주 등장했던 집으로 남부지방 양반가 대저택을 대표하는 장면이다.

 

▲고택 앞에는 솔송주 문화관이 자리잡고 있다. 솔송주는 봄에 나는 소나무 순과 찹쌀, 솔잎을 이용해서 만드는 술로

정여창 종가에서 전해내려오는 전통주이다.

 

▲고택 아래쪽에 위치한 솟을대문이 있는 큰 한옥.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꽤 규모가 있는 한옥이다.

 

▲일두고택 뒷편 골목길.

 

▲일두고택 뒷편에 있는 낡은 한옥.

 

▲마을 안쪽에 위치한 하동정씨고가. 마을의 다른 저택들처럼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일렬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안채만 원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을의 명성에 걸맞게 이 집 주인은 성균관대 학장과 차관을 지냈다고 한다.

 

▲고택 앞 골목길.

 

▲일두고택 안쪽에 위치한 오담고택.  정여창의 후손인 오담 정환필이 종가에서 분가하면서 이 집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남부지방 양반가 저택의 형태가 잘 반영된 고택으로 건물은 ‘-’자형으로 지어진 안채와 사랑채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마당을 넓게 쓰고 있어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구한말 건축양식과 남부지방 양반가 저택의 형태가 잘 반영된 고택이다.

 

▲마을 남쪽 평촌천 큰 길. 옛 시골 마을길 풍경이 남아있다. 길 옆으로 다양한 형태의 한옥과 시골집들이 들어서 있다.

 

▲길 옆에 있는 낡은 한옥

 

▲돌담이 정겨운 마을 골목길. 판석을 깔아 놓은 곳이 많다.

 

▲평촌천을 따라 이어지는 길.

 

▲평촌천을 건너는 다리. 다리 건너 보이는 언덕길은 정여창이 이 마을에서 살 때 산책을 즐겼던 길이라고 한다.

 

▲길 옆에 있는 솟을대문이 있는 또다른 한옥.

 

▲다양한 규모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길.

 

▲일두고택을 비롯하여 대저택들이 있는 윗쪽과는 달라 아래쪽은 집들도 작고 골목길도 좁은 편이다.

 

▲마을 아래쪽에 위치한 노참판댁 고가. 저택의 규모도 작고 검소한 편이다. 아래쪽에는 풍천노씨 종갓집을 비롯하여

늦게 마을로 들어온 풍천노씨 후손들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마을 아래쪽에 위치한 작은 교회.

 

▲마을 남쪽을 흐느는 평촌천, 북쪽의 지곡천에 비해 좁은 개천같은 느낌을 준다. 개평마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울 건너편에도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아래쪽에 위치한 비교적 큰 규모의 한옥.

 

◆함양 개평리 소나무 군락지

 

개평리는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을 비롯한 뛰어난 유학자를 배출한 전통마을이다. 14세기 경주 김씨와 하동 정씨가 이곳에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후 15세기에 풍천 노씨가 이주하여 현재에 이른다.

 

개평리의 소나무 군락지는 풍수지리에 따라 서편으로부터 엄습하는 나쁜 기운을 차단하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숲이다. 마을 앞 야산의 능선을 따라 노송 100여 주가 생육하고 있는데, 군락지 내 노송은 수령은 약 300~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큰 나무는 높이 15m, 둘레 160~220c정도이고, 작은 나무는 높이 10m, 둘레 80~150cm 정도이다. <출처:문화재청>

 

▲마을 남쪽에 위치한 소나무군락지.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나쁜 기운을 차단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지곡천과 평촌천이 마을 입구에서 만나 남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낙동강 지류인

남강이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마을에서 2 ㎞ 정도 떨어진 남강변에 위치한 남계서원. 조선중기 학자이자 관리였던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졌다.

 

영주 소수서원이나 안동 도산서원과는 달리 성균관이나 향교처럼 낮은 곳에 강학공간을 두고 높은 곳에 제향공간을 두는 ‘상묘하학(上廟下學)’ 또는 ‘전학후묘(前學候廟)’의 공간배치를 처음으로 구현했다.

 

문루, 강당, 동.서재, 경판고(장판각), 내삼문, 사당, 전사청, 고직사 등 서원이 갖추어야 할 건물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며, 건물 배치 또한 후대에 세워진 여러 서원들의 모범이 되었다.

 

▲남계서원 옆에는 연산군 때 학자인 김일손을 기리기 위해 1907년에 세워진 청계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남계사원과 거의 비슷하게 지어졌는데 건축적 측면에서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마을에서 약 2 ㎞ 떨어진 승안사 옛 절터. 이곳에 정여창 묘소와 재실이 자리잡고 있다.

 

▲승안사 절터에 세워진 재실.

 

▲이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

 

글.사진출처 / culture & history.trave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