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固城)시장 한 바퀴 돌고 나니…검은 봉지 속엔 봄이 한가득!
▲머위
구경 삼아 한 바퀴 도는데 규모가 꽤 크다. 고성 인구는 3만명이 채 못 된다. 특별히 관광객이 몰리는 장도 아니건만 파는 이와 사는 이가 많다. 시장 초입은 농산물이 주다. 할매들이 몇 개의 바구니를 앞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앉아 진한 사투리로 흥정을 하거나 농을 주고받는 모습이 정겹다.
“아재요, 개시 좀 하소. 개시해주면 복 받는다.” 이리저리 구경 다니던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할매요, 머위 좋네요. 얼맙니꺼?” 머위는 봄을 알리는 나물 중에서도 빨리 나온다. 웃자란 것은 껍질을 벗겨 육개장이나 매운탕의 건더기 재료로 쓰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초봄에 나오는 머위 순의 맛이 일품이다.
묵나물(말린 나물)은 요리할 때 쓴맛을 제거하기 위해 하루 정도 물에 불려 먹는데 초봄의 머위는 그런 수고도 필요 없다. 고기 구울 때 같이 구워서 먹어도 좋고, 나물 무쳐서 파채 대신 먹으면 더 좋다. 한 바구니 5000원이다. 장터 구경 갈 때는 미리 현금을 챙긴다.
아무리 스마트폰으로 결제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라도 오일장에서만큼은 현금이 필수다. 옆에 원추리나물을 보고 있자니 “기새도 살래요?” 한다. “기새는 다음에 살게요.” 하고 어물전으로 넘어갔다.
생선과 어패류 장이 서는 곳 사이에 떡집이 몇 군데 있다. 방금 나온 시루떡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데, ‘무우떡’이라는 손글씨에 먼저 눈길이 갔다. 시루떡 만들 때 채 썬 무를 넣고 만든 떡이다. 다른 떡집에서는 막 나온 커다란 술떡이 또 유혹을 한다. 국적 불명의 길거리 음식이 차고 넘치는 관광시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경상남도 통영은 사시사철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통영을 가려면 꼭 지나가는, 아니 스쳐가는 곳이 고성군이다.
출장으로 통영이나 거제를 스무 번도 넘게 들락거렸지만 고성을 들른 적은 어쩌다 한두 번이었다. 고성의 동쪽은 마산, 서쪽은 사천, 남쪽은 통영이다. 고성은 수많은 낮은 산들 사이에 평야가 있고, 진주와 붙어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바다와 접해 있다.
사천에서 고성읍으로 갈 때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선택하면 바다를 낀 골짜기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아름다운 바닷길을 만난다. 바닷물이 빠지면 다른 경상도의 바다와 달리 너른 갯벌이 속살을 드러낸다. 굴 종패장(굴 유생을 키우는 곳)이 곳곳에 있고, 갯벌에서는 맛난 바지락이 지천으로 나고, 좋은 갯벌 덕에 고성에서 나는 갯장어, 붕장어 또한 맛있다.
▶어촌 오일장에선 보랭백이 필수
고성 오일장은 1과 6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선다. 밤길을 달려 고성으로 가는데 덕유산 넘는 사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봄을 여는 반가운 비에 고성 바닷가의 매화는 꽃망울을 터뜨렸지만, 한편으론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장이 썰렁할까 걱정스러웠다. 비는 봄을 재촉하듯 사람들의 발걸음도 재촉하는 듯. 푸르스름했던 하늘이 밝아오자 이내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무우떡
▲보리새우
어물전에는 바지락 파는 곳이 많다. 군데군데 바다에 얼굴 내밀기 시작한 횟감용 멸치가 끼어 있다. 좀 큰 바지락은 진해나 고성의 섬에서 캐 온 것들이고 고성 개펄에서 캐 온 것은 상대적으로 알이 작지만 크든, 작든 꺼낸 바지락의 살은 옹골차 보였다.
고성에는 매년 바지락 축제를 열 만큼 서해 못지않은 맛있는 바지락이 난다. 바지락이 가득 담긴 대야 옆에는 검지만 한 새우가 움직인다. 보리새우 같은데 긴가민가하다. “아저씨 무슨 새우예요?” “새우, 생새우.” “아니 새우 이름요.” 그제야 “보리새우”라고한다. 새벽에 그물 털어 온 거라 싱싱함이 눈에 보일 정도다.
그대로 볶아 먹거나 된장 넣고 탕을 끓이면 그만이라고 한다. 말린 것은 쉽게 살 수 있지만 생새우는 그렇지 않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 이내 돌아섰다. 챙겨 온다고 미리 탁자 위에 올려놨던 보랭백을 집에 두고 온 탓이다. 바닷가를 낀 오일장에서 현금만큼 중요한 게 보랭백이다. 아무리 재활용한다고 해도 스티로폼보다는 보랭백을 쓰는 게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
▲70년 넘게 흑염소로 탕 끓여낸 염소탕
시장을 몇 바퀴 돌고 나니 봄맛을 가득 담은 검은 비닐봉지 몇 개가 손에 들려 있다. 구경을 얼추 끝내고 70년 넘은 노포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오일장터 한편에 자리 잡은 흑염소 전문 식당이다. 양이나 염소는 특유의 노린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다. 보양식으로 특별히 찾지 않는 이상 잘 먹지 않는다.
그런데 장이 서지 않아도 항상 문을 연다는 것은 보양식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 흑염소탕을 시키니 이내 뚝배기가 나왔다. 맑은 국물에 흑염소 고기와 숙주가 들어 있다. 국물을 맛보니 닭이나 소고기로 끓인 맑은국 먹는 것처럼 맛이 편안하다.
고기는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처음 씹을 때는 좋은 양고기 먹을 때처럼 아주 살짝 특유의 향이 나는 듯싶다가 이내 사라진다. 아삭한 숙주와 고기의 고소한 맛, 깔끔한 국물이 아주 잘 어울렸다. 몇몇이 같이 와서 불고기도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서울 촌놈이 먹기에는 국물이 조금 짰다. 조리는 주인이, 간은 손님이 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린내가 안 나는 까닭을 물으니 다른 것은 없고 깔끔한 도축과 암컷만 쓰는 게 비법 아닌 비법이라 한다.
▲참치급’ 볼락 들어간 매운탕
통영과 고성은 한 바다를 공유한다. 통영에서 소비하는 생선 중에는 고성에서 잡은 것이 꽤 된다. 통영 가면 한 번 이상은 꼭 먹는 볼락도 고성에서 공급하는 게 많다. 큰길횟집은 남편이 볼락 잡아서 통영의 유명한 식당들에 공급하고, 아내는 볼락탕을 끓여 내는 곳이다. 메뉴는 제철 회와 회덮밥, 볼락구이, 볼락매운탕이 전부다.
단출한 메뉴 구성이 식당의 내공을 보여준다. 볼락매운탕에는 어른 손바닥 크기의 볼락이 두 마리 들어 있다. 손바닥 크기지만 볼락계에서는 참치급이다. 우럭(조피볼락) 등 볼락과의 생선으로 탕을 끓이면 맑은 기름이 동동 뜬다. 살아 있는 볼락으로 끓이기에 살이 연하고 고소하다.
묵직한 중저음 같은 국물 맛에 제철 맞은 미나리의 향이 더해지니 매력이 마력으로 변한다. 아주 가끔은 수조에서 죽은 볼락이 밑반찬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내가 간 날은 운이 나빠 죽은 녀석이 없었는지 안 나왔다. 고성 나들목에서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거니와 바다를 바라보며 국도로 통영 가는 길도 좋다. 바다 구경하다보면 금세 통영이다.
▶ 도다리가 아니라 쑥이 주인공
▲쑥도다리국
보통은 ‘도다리쑥국’이라 한다. 그런데 맛을 보고 나면 이름이 잘못된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봄철에 먹는 도다리는 맛이 별로 없다. 막 산란을 끝낸 터라 살이 무르고 단맛이 적다. 산란을 위해 수온이 먼저 오르는 얕은 바다에 도다리가 몰리기에 많이 잡히는 것이다. 도다리가 몰리는 3월 초, 따스한 햇볕에 다른 것보다 먼저 돋아나는 게 쑥이다.
한겨울 하우스 농사가 일반화되기 전 처음 맞이하는 푸른빛 나물이었다. 맹한 도다리 맛을 보완하는 향신채로 더할 나위 없는 짝꿍이 아니었을까 싶다. 쑥 없이 도다리 살만 발라 먹으면 맹하다는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쑥이나 쑥향이 녹아 있는 국물과 함께 먹어야 비로소 맹함이 사라진다.
쑥도다리국은 여럿이 모여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에 쑥을 살짝 데쳐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물론 혼자 여행하는 이에게는 언감생심이지만 주문할 때 쑥을 많이 넣어달라 하면 나름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도다리쑥국의 주인공은 분명 쑥이다.
▲메밀면
고성 읍내에서 사천 방면으로 가다 보면 갈모봉 산림욕장 초입에 오전 11시30분에 문 열고, 오후 3시30분이면 문을 닫는 국숫집이 있다(4월부터는 6시30분까지). ‘면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식당 이름 그대로 직접 메밀로 면을 뽑는 식당이다. 가게문 열기 전부터 주차장에 차가 속속 들어설 정도로 고성 사람들이 애정하는 식당 중 하나다.
메밀을 50% 이상 넣고 볶은 곡식을 섞어 뽑은 면은 검은빛이 돈다. 순도 높은 메밀면처럼 후루룩 면치기 하기는 쉽지 않지만 가위가 필요 없을 정도의 질김이다. 직접 낸 육수와 비빔장이 면과 잘 어울린다.
게다가 면이 ‘무한 리필’이어서 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곳이기도 하다. 영업 시간이 끝나기 전에도 면이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 고성이 본점이다. 따로 전화번호는 없고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
고성은 통영과 진주라는 유명 관광도시를 주위에 끼고 있다. 고성엔 화석이며, 공룡 뼈 등을 모아 놓은 박물관도 있고, 고속도로 휴게소 이름이 공룡휴게소일 정도로 공룡과 관련된 것이 많은 고장이다.
아이들과 공룡 전시관 구경 갈 참이라면, 통영이나 진주로 여행할 계획이라면 고성을 여행리스트에 넣어 보자. 가능하다면 고성 오일장이 있는 1·6일 전후로 맞춘다면 맛나고 재미있는 오일장 매력에 여행이 한층 즐거워질 것이다.
출처 / kyunghyang.com / 김진영 식품MD
'▣新八道(신팔도)*紀行錄 > ⊙경남 부산****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남 통영ㅡ통영기행ㅡ통영으로 떠나는 ‘봄맛’ 기행 (0) | 2022.02.21 |
---|---|
경남 고성ㅡ고성기행ㅡ쫓빛 바다에 감싸인 소박한 풍경...먼저 놀러온 봄이 꽃들을 깨워주네 (0) | 2022.02.18 |
경남 진주ㅡ서부시장 五日場ㅡ구수한, 개운한, 고소한…여름 초입에 ‘남도의 맛’ 군침도네 (0) | 2022.02.13 |
경남 하동ㅡ하동五日場ㅡ산을 돌아 강이 흘러 바다와 만난 곳 … (0) | 2022.02.13 |
경남 통영ㅡ서피랑 99계단에 박경리 있고 윤이상도 있다 (0) | 2022.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