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五日場
작고 아담한 장터…여름 입맛 돋우는 열무·콩국수 못 잊죠
▲4·9일장인 인제 오일장에서는 여름 김치 재료로 최고인 열무가 눈에 띄었다.
담그기도 쉽거니와 여름에 이 녀석들만큼 입맛 돋우는 것도 사실 없다.
인제 오일장, 화천과 양구가 생각났다. 산 너머 고성도 떠올랐다. 네 군데 모두 사는 이도 파는 이도 많지 않았다.인제는 네 곳 중에서 가장 작았다. 시장 구경 소요 시간 1분30초. 기삿거리가 없어 난감했다.
글쓰기 어려웠던 양구는 인제에 비하면 꽤 있었다. 화천은 상설시장과 같이 있어 그나마 양반이었다. 사실, 양구 오일장이나 화천 오일장을 취재하고 나서 인제는 괜찮을 줄 알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국도변도 고려했고, 더는 이보다 작은 시장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기왕 왔으니 시장 구경 잠시 하면서 분위기를 살폈다. 작디작은 시장이지만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다. 많지 않은 사람 중에서 사는 이는 일단 주변 식당에서 온 이들이다.
차림새를 보면 주류 회사에서 나눠 준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그 외에 양산 쓴 아주머니들이 익숙한 듯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흥정한다.
단골들이 찾고, 그런 단골들 때문에 상인들도 나오는 분위기인 듯싶다. 군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은 군대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입대 자원이 모자라 사단 개편하는 곳을 가보면 개편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예전에는 휴가 나온 군인들은 일정 지역을 벗어날 수 없어 그 동네에서만 뱅글뱅글 돌았다.간혹 위험을 무릅쓰고 타지로 나가는 예도 있었다. 지금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제도가 사라져 시간만 맞는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단출한 장터에서는 단골과 상인들의 다정한 흥정이 오갔다.
가만히 서서 시장을 바라보다 보니 쪽파 씨가 눈에 띄었다. 김장 생각이 절로 났다.지금 심어야 부지런히 자라 김장 시즌에 얼추 맞출 수 있을 듯싶다.산골의 겨울 준비는 지금부터다.
다른 장터에서 사려고 마음먹었던 상추 모종을 인제에서 드디어 만났다.상추 또한 더우면 잘 자라지 않는다. 집사람이 베란다에 심는다고 부탁했던 과제를 드디어 해결했다.
“상추 모종 얼마인가요?” “천 원에 네 개” 해놓고는 8개 잘랐다고 다 가져가란다. 심을 데가 없어한사코 거절해 6개만 받아왔다. 옆에는 열무를 가지고 나온 할매가 있다. 여름은 열무김치가 최고다.
1년 중 가장 맛있을 때다. 다른 김치는 담글 생각을 안 한다. 하지만 열무나 오이는 시장 볼 때 사서김치를 담근다. 담그기도 쉽거니와 여름에 이 녀석들만큼 입맛 돋우는 것도 사실 없다.여름에는 배추김치보다는 열무김치가 ‘짱’이다.
시장을 나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협력사에 갔다. 2000년 초겨울에 처음 갔었다. 그때와 지금, 사람은늙고 길은 좋아졌다. 서울에서 강원도 가는 길은 심리적으로 부산 가는 것만큼이나 멀었다.
서울서 200㎞만 가면 강원도인데 보통 서너 시간 걸렸다. 대관령 너머 강릉은 그나마 고속도로가 있어 편했다.한계령, 미시령, 진부령 넘는 고갯마루는 1시간 정도 예상하고 넘었다.
그때는 무슨 훈련이 그렇게 많았는지 가다가 군 트럭 행렬이나 탱크를 만나면 원래 시간보다 30~40분은 더 걸렸다. 세월아 네월아 가는 트럭 꽁무니를 쫓아가다 보면 담배 한 갑 다 피웠다.
그런 도로가 2차선이 4차선으로, 4차선이 고속도로까지 뚫렸다. 인제도 고속도로 영향을 받는 듯싶었다.길이 좋아지면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흩어진다.
20년 동안 길은 그렇게 변했다. 변한 길을 따라 인제 기린면에 갔다. 오랫동안 도라지로가공식품을 만드는 곳이다. 옛날에 할머니가 가마솥에 도라지를 고던 모습이 입간판으로 있던공장은 번듯한 판매장까지 갖췄다.
중간에 여러 사정이 있어 부도까지 맞았다고 한다. 다시 재기하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됐다.MJ푸드 (033)461-5194인제가 시장 규모는 아쉬워도, 구경거리는 꽤 많다.
인제읍에는 인제산촌민속박물관과 박인환문학관이 있다. 게다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어 매력을 더 한다.다른 지역은 어디를 가나 티켓부스가 있지만, 인제는 없다. 인제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도 무료다.
지역에 있는 박물관을 가보면 실속이 없는 때도 있는데 인제는 달랐다. 특히 요번에 기획한 ‘동해로가는 길’은 내용이 탄탄했다. 인제를 거쳐 가던 소금 상인들의 이야기와 길에 대한 인문학적 소개가 참신했다.
게다가 자료집도 나눠주고 있었다. 내가 낸 세금이 이런 곳에 쓰인다면 전혀 아깝지가 않다.인제를 오가는 길에 들르면 아주 좋을 듯싶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박인환문학관 (033)462-2086
▲인제에서 시장 구경은 제대로 못했지만 괜찮은 콩국숫집 하나를 건졌다.
기린면 협력사에 들렸다가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 들렀다. 20년 동안 인제를 수십 번 왔지만, 자작나무 숲은 처음이었다. 뙤약볕 아래 원대리 자작나무 숲까지 가려다 중간에 포기했다. 왕복 3시간. 생수라도 들고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같이 간 이는 여러 번 왔던 곳이다.
그때마다 취재 일정이라 지자체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왔었다고 한다. 차를 탄 것은 기억 못하고 입구에서 얼마 가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 탓에 생수를 들고 오지 못했다. 차로는 잠깐이지만 걸어서는 1시간30분이다.
원대리에 간 목적은 하나 더 있었다. 원대리 주차장 주변에는 몇 군데 식당과 카페가 있다. 이런저런 정보가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는 곳들이다. 그 집들은 건너뛰고 언덕을 넘었다. 언덕 너머 바로 좌측에 마을에서 하는 식당이 있다. 인제에서 나는 것으로 음식을 만든다. 다른 곳처럼 거창하게 로컬푸드라 칭하지 않는다.
마을에서 생산한 콩으로 청국장, 두부, 콩국수 등을 내고 있다. 끝까지는 못 갔더라도 왕복 1시간20분을 걷다가 왔기에 날이 날인 만큼 콩국수를 주문했다. 감자전도 놓치지 않고 주문했다. 콩국수를 주문하자 준비가 덜 됐다고 한다. 설마 콩국수를 못 먹나 잠시 긴장감이 흘렀다. “콩은 불렸는데 아직 갈지 못했어요.” 안도의 숨을 쉬고는 잠시 기다렸다. 콩 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콩국수가 나왔다.
맛보고는 둘 다 “대박”을 외쳤다. 지금까지 먹었던 콩국수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맛이었다. 콩국수라는 게 콩과 물이 있으면 만들 수 있는 단순한 음식이다. 단순한 음식이지만 두 가지 재료에서 다양한 맛의 변주가 일어난다.
진득하기만 하고 맛이 없는 곳이 대부분인데 여기는 적당한 진득함 속에 고소함을 품고 있었다. 물과 콩이 좋은 동네에서 최상의 맛이 안 나오면 간첩이다. 필자도 여러 지역에서 콩국수를 먹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양구였다.
거기와 비교해도 우위를 쉽게 점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양구 장터도 볼 것이 별로 없었지만, 콩국수는 맛있었다. 인제도 시장 구경 대신 콩국숫집 하나를 건졌다. 그러면 된 거다. 햇살마을 향토식당 (033)462-2323
▲사골 국물을 내서 끓인 우족탕은 진국이었다.
인제읍에서 원통을 거쳐 양구 접경까지 가면 천도리가 나온다. 천도리는 하늘에서 복숭아 떨어졌다는 전설에 기인한 지명이다. 복숭아처럼 하늘 대신 인천에서 툭 하고 떨어진 사람이 군부대 앞에서 우족탕을 끓이고 있다.
사정을 들어보니 인천 도축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딸이 있는 인제에 와서 식당을 차렸다고 한다. 사골 국물을 내서 끓인 우족탕은 진국이었다. 우족탕은 족에 붙어 있는 콜라겐을 뜯어먹는 맛이다.
사실 콜라겐이라는 게 아무 맛도 없다. 소금이나 간장 소스 맛을 더해야 먹을 수 있다. 가끔 글을 쓰다가 ‘담백’을 쳐야 하는데 실수로 ‘단백’을 친다. 둘이 글자만큼이나 비슷한 맛이다.
‘담백하다’는 간혹 ‘아무 맛도 안 나요’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콜라겐을 많이 먹으면피부에 도움이 될까요? 정답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콜라겐은 단백질의 일종. 먹으면 우유, 콩나물, 달걀 먹은 거하고 별 차이가 없다. 먹으면 아미노산으로 분해된다. 콜라겐을 찾아 먹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바르는 것 또한 같다.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일이다. 음식은 그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다. 여기 우족탕은 그 조건을 맞춘다. 사람이 별로 없어 물어보니 코로나19 때문에 군인들이 못 나와서 그렇다고 한다. 코로나19만 아니면 바빠도 한창 바빴을 것이라 한다. 사장님 말씀이 공감 가는 맛이었다. 둥지식당 (033)462-0119
출처 = 경향신문 / 김진영 식품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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