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면ㅡ돼지전설 깃든 펀치볼…을지전망대엔 남북 긴장 여전
▲을지전망대에서 바라본 해안면. 드넓은 분지가 1,000m급 고봉에 둘러싸인 모습이 화채 그릇처럼 생겼다고 해서
‘펀치볼’로 불린다. 양구=최흥수기자
돌산령터널을 지나자 마치 낯선 행성에 온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회색 빛 고봉에 둘러싸인 드넓은 벌판,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과 집들이 미니어처 같다. 길이 약 3km의 터널은 ‘걸리버 여행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여행자를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안내하는 연결 통로다.
◇’돼지마을’ 양구 해안면 펀치볼의 겨울
양구 해안면은 가운데가 넓고 둥그렇게 파진 화채그릇 같다고 해서 ‘펀치볼(Punch Bowl)’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지금은 돌산령터널을 통과하는 데 2~3분이면 충분하지만, 고갯길이 비포장이던 1970년대만 해도 양구읍내에서 해안면까지 버스로 2시간이 넘게 걸렸다.
4곳의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일일이 신분을 확인해야 했고, 눈이나 비가 내리면 며칠씩 고립되기 일쑤였다. 군부대 덕택에 제설과 복구 공사가 빨라 고립의 시간이 길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높은 산자락 아래 드넓은 분지, 펀치볼 한가운데에 마을이 형성돼 있다.
▲가칠봉의 가파른 능선 아래 자리 잡은 해안면. 평지도 해발 450m 정도다.
▲을지전망대 아래 와우산 자작나무 숲. 펀치볼 둘레길에 포함돼 있지만 가이드가 동행해야 갈 수 있다.
둘레길은 겨울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해안면의 특이한 지형을 보면,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다거나 외계 행성의 비행접시가 착륙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믿고 싶지만, 학계에서는 차별 침식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풍화 저항성이 강한 고지대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저지대가 먼저 침식돼 주변의 산에 포위된 것과 같은 침식분지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해안면 분지는 남북 길이 11.95㎞, 동서 6.6㎞, 둘레 33㎞에 이른다. 해안면은 6개의 행정동으로 구분돼 있지만, 면 전체가 외부와 고립된 지형이어서 한 마을이나 마찬가지다. 1,200여명의 주민이 서로 알고 지내는 것도 이 지역만의 특징이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산중 분지가 해안(海岸)일 리 만무하다. 황금돼지해 첫 여행지로 펀치볼을 소개하는 것은 해안이라는 지명이 돼지와 관련된 때문이기도 하다. 해안면의 말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돼지(亥)가 편안(安)한 곳이다. 산과 분지의 경계 지점에는 습기가 많고 뱀도 많았다.
집안까지 출몰할 정도로 뱀이 많아 고통받던 주민들에게 한 스님이 뱀과 상극인 돼지를 기르면 퇴치할 수 있다고 일러준다. 해안면이라는 지명은 스님의 조언에 따라 돼지를 기른 후부터 편안하게 농사짓고 생활할 수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해안면 복지회관 외벽에 장식된 멧돼지 조각.
▲하천 변에도 ‘해안’이라는 제목의 돼지 조형물이 서 있다. 별도로 설명이 없어 아이가 왜 돼지 등에 올라 서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임시 막사처럼 생긴 삼각 텐트가 모두 시래기를 말리는 시설이다.
▲마을의 비닐하우스에도 시래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돼지 덕분에 편안한 마을이지만, 해안면에서 돼지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해안면 복지회관 외벽의 멧돼지 부조와 마을 하천 변에 세워 놓은 조각상이 전부다. 복스러운 돼지에 여자 아이가 올라 선 형상의 조각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의아하기만 하다.
이름대로라면 마을 곳곳에 돼지 축사가 있을 법도 하지만, 해발고도 400~500m에 달하는 해안분지의 주된 산업은 고랭지 채소 농사였다. 무를 활용한 시래기는 지금도 양구의 제일가는 특산물이다.
한겨울에도 마을 곳곳에 임시 막사를 연상시키는 삼각형의 천막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시래기를 말리는 시설이다. 대형 비닐하우스에도 대부분 시래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반면 겨울 들판엔 무청을 도려낸 무가 빼곡하게 박혀 있다.
◇마음에만 담는 북녘 땅, 을지전망대
해안면은 38선 이북지역으로 한국전쟁 때 되찾은 땅이다. 원래 주민들은 대부분 북으로 피란하고, 전쟁이 끝난 후 이주한 주민이 정착해 살고 있다는 것도 해안면의 특징이다.
오유리 일부 주택은 군대 막사를 개조한 흔적이 남아 있고, 1970년대 말에 지은 만대리의 주택은 지금 봐도 외관이 제법 깔끔하다. 북측 매봉에서 관측되는 지점이어서 선전마을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가구가 거주했는데, 겉모양은 한 채인 구조로 지은 것도 살림살이가 넉넉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1970년대 말 일종의 선전마을로 조성된 만대리. 태극기와 새마을기를 게양했던 대형 깃대가 서 있다.
▲해안면 중심지에서 본 을지전망대와 와우산 자작나무 숲.
해안면 북측 가칠봉에서 이어진 봉우리는 전쟁 당시 김일성고지, 모택동고지, 스탈린고지로 불렸다. 작전상 꼭 수복해야 할 고지에 공산 정권의 상징적 인물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후리의 양구전쟁기념관은 양구에서 벌어진 9개의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기록하고 있다. 단장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은 이름만으로도 참혹하고 숙연하다.
전쟁기념관 옆 양구통일관 건물 앞에는 ‘인사하는 사람(그리팅맨ㆍGreeting Man)’ 조각이 서 있다. 세계의 분쟁과 소외 지역에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유영호 작가의 작품으로,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이어 두 번째로 세운 설치미술이다.
이곳에서 약 7km 떨어진 곳에 을지전망대가 있다. 1988년 해발 1,049m 비무장지대 철책선 위에 세워 남북한의 대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다. 가칠봉 인근 남측과 북측 감시초소(GP) 사이는 불과 780m 떨어져 있어, 육안으로도 상대방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다.
남북간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철원 일부 전방에선 시범적으로 양측 초소를 철거하기도 했지만, 이곳엔 여전히 긴장감이 팽팽하다. 한때는 남북간 심리전도 치열했다.
1992년 우리측 가칠봉 초소(GOP)에서는 미스코리아대회 수영복 심사가 열렸고, 여름철 북측 매봉(1290m)과 운(1358m) 사이 선녀폭포에서는 북한 여군들이 목욕하는 모습이 관측되기도 했다
▲화해와 평화의 상징 ‘그리팅맨’이 양구통일관 앞 광장에 세워져 있다.
▲양구전쟁기념관 앞 조형물. 한국전쟁 당시 양구에서 벌어진 9곳의 치열한 전투를 상징한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고스란히 노출되기 때문에 전망대 북측 지역은 지금도 엄격하게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는 수밖에 없다. 깊은 골짜기 너머 북한 땅은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벽을 치고 있는데도 풍광은 웅장하고 광활하다.
박달봉(1136m)과 간무봉(1161m) 사이로는 금강산의 봉우리도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서로가 대치하는 금단의 땅을 자유로이 노니는 산짐승과 새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형이 전혀 다른데도 아프리카 대초원을 떠올리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팽팽한 긴장이 빚는 정중동 때문이다.
대남 대북 확성기 소음이 사라진 잿빛 능선과 계곡엔 절대 고요로 가득 차 있다. 기해년 황금돼지해, 이곳에도 화해와
평화의 물결이 새봄처럼 번지기를 기대해본다.
을지전망대에서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허락된 곳은 남측 해안면 방향이다. 펀치볼 지형도 이곳에서 가장 잘 보인다. 정면 도솔산에서부터 전망대 오른쪽 가칠봉까지 이어지는 능선 아래로 그릇처럼 파인 해안면 풍경이 넓고도 푸근하다. 왼편 끝자락에는 거칠게 솟은 설악의 봉우리도 아련하게 보인다.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펀치볼 모습. 들판의 검고 파란색은 인삼 밭의 햇빛 가림 시설이다.
▲고봉으로 둘러싸인 펀치볼에서 유일하게 트인 동남쪽 산자락으로 설악산 능선이 보인다.
▲산 중턱까지 농토로 개간한 모습. 요즘 해안면에는 과수와 인삼 재배 농가가 급격히 늘고 있다.
펀치볼 안내 책자에는 안개가 엷게 내려앉은 황금 들판 사진이 실려 있지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해안면 들판엔 인삼 밭을 덮은 검푸른 햇빛가리개가 많아 눈에 거슬린다.
땅이 너른데 비해 해안면 주민들의 삶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온 냉기 때문에 못자리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 모를 키워 심은 벼도 냉해로 망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의 걱정거리인 온난화 현상이 해안마을엔 선물이었다. 요즘엔 벼농사는 아무 문제없고, 사과와 인삼재배 농가도 크게 늘었다. 태양광발전단지로 착각할 정도로 산자락 인삼 밭마다 햇빛가리개가 빠짐없이 덮여 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인삼 재배로 농가 소득은 늘어나겠지만 해안면의 풍요로운 경관은 잃게 생겼다. 이왕에 DMZ 평화관광에 공을 들이고 있으니, 정부 차원에서 경관농업 지원책도 고려해 봄직하다.
◇금강산까지 32km, 또 하나의 평화관광지 ‘두타연’
방산면 두타연은 펀치볼과 함께 양구군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DMZ 평화관광지다. 두타연은 휴전선 언저리에서 발원한 수입천 지류에 만들어진 커다란 물웅덩이다.
폭포는 높지 않지만, 돌개구멍을 내며 바위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웅장하고, 폭포가 떨어진 자리에는 둘레 50m가량의 검푸른 소가 형성됐다.
한겨울에도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량하다. 두타연은 17세기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타사(頭陀寺)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오래 전 금강산 장안사의 한 스님이 꿈에 ‘남쪽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폭포 옆 동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뒤 창건했다는 절이다.
▲두타연의 겨울 풍경. 전체가 지뢰 지역이어서 원시림으로 강제로 보존돼 겨울 숲도 밀림처럼 무성하다.
▲두타연 조각공원. 두타연의 기원이 된 두타사도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래구멍을 형성하며 떨어지는 두타연.
▲이목정안내소에서 두타연 가는 길에 철조망으로 만든 꽃 작품을 세워 놓았다.
▲두타연 조각공원의 작품.
2003년 민간에 개방한 두타연 계곡은 민통선 안쪽에 자리해 60년 넘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탐방로 양편 철조망에는 ‘지뢰’ 팻말의 붉은 색깔이 선명하다. 지뢰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자연의 시간이 쌓여가는 천연림으로 남게 될 특별한 운명이다.
철조망 안쪽 계곡에는 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에도 나뭇가지들이 얽히고설켜 빼곡하게 밀림이 형성돼 있다. 탐방로 주변에선 콩알만한 짐승의 배설물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병득 양구 문화관광해설사는 하루에도 수차례 노루와 고라니, 산양을 목격한다고 자랑한다.
▲두타연은 탐방로와 산책로를 제외하면 전부 지뢰 지역이다.
▲하야교삼거리의 금강산 이정표. 31번 국도인데, 고속도로 문양으로 표기해 놓았다.
▲두타연에서 하야교삼거리로 가는 산책로.
생태탐방로는 두타연을 중심으로 조각공원, 양구전투위령비, 출렁다리 등을 연결한다. 최근에는 관광안내소에서 약 4km 상류의 하야교 삼거리까지 걷는 여행객이 늘고 있다. 평탄한 비포장 길이고, 눈 덮인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소리만 가득해 겨울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양구 동면에서 끝나는 31번 국도도 비포장으로 연결된 하야교 삼거리에는 ‘금강산 32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길이 제대로 뚫리면 차로 30분 남짓 걸리는, 남한 땅에서 내금강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양구 DMZ 평화관광지 여행 팁
●중앙고속도로 춘천IC에서 해안면 양구통일관까지는 약 75km, 1시간30분가량 걸린다. 을지전망대에 가려면 양구통일관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한 후 개별 차량으로 이동해야 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입장할 수 있으나, 눈이 오는 날은 안전을 고려해 군에서 출입을 통제한다. 신분증 필수, 입장료는 3,000원이다. 함께 관람하는 제4땅굴은 봄까지 폐쇄된 상태다.
●두타연은 방산면 이목정안내소와 동면 비득안내소 2곳으로 갈 수 있지만, 겨울에는 이목정안내소만 운영한다. 이목정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한 후 차로 비포장 도로로 약 3.7km 올라가면 두타연 주차장이다.
안내소에서 자전거를 대여하면 하야교 삼거리까지 이동이 한결 수월하다. 입장료는 3,000원, 자전거 대여료는 4,000원이다.
출처 / hankookilbo.com / 양구=글ㆍ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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