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폐선로 여행
녹슨 선로에 궁노루 폴짝…지그재그 폐로 따라 과거로 가는 기차 타볼까
▲폐 선로 주변에서 쉬고 있던 노루 두 마리가 관광열차가 다가오자 깜짝 놀라 내닫고 있다. 2012년 통리~
도계역 간 새 선로 개통으로 심포리~흥전~나한정역 구간은 하이원추추파크가 관광용 스위치백트레인을
운행하고 있다. 삼척=최흥수기자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엔 지나가는 기차라도 있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은 어떻게 됐을까. 삼척 도계읍에는 폐 선로와 폐역이 유난히 많다. 해발 700m 태백 통리역에서 250m 도계역까지 선로는 급경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놓였다.
기차는 360도 가까이 휘어지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급회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완만하게 사선으로 내려갔다가 중간 역에서 다시 비슷한 경사로 후진한 다음 정주행하는, 이른바 ‘스위치백’ 방식으로 운행했다.
이 철길은 2012년 태백 동백산역에서 도계역을 바로 연결하는 새 선로를 개통하며 역사적 소임을 마쳤다. 새로 난 선로는 450m에 달하는 고도 차이를 땅속에서 크게 한 바퀴 돌아가는 ‘또아리굴’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 구간 ‘솔안터널’은 16.2km에 달한다.
새 노선 개통으로 통리역~심포리역~흥전역~나한정역 구간은 자동으로 폐지됐다. 4개 역 중 열차는 흥전과 나한정역에서 각각 후진과 전진을 거듭하며 도계와 통리 사이를 오르내렸다.
현재 옛 심포리역 부근에 들어선 하이원추추파크가 폐 선로를 활용해 관광용 레일바이크와 스위치백트레인을 운행하고 있다. 모든 역은 승용차로 닿을 수 있지만, 흥전역 가는 길은 좁고 경사가 급해 외지인이 차를 몰기에 위험하다.
▲하이원추추파크에서 본 강삭철도. 심포리~통리역 구간에서 열차를 한 량씩 끌어 올리거나 내렸다.
승객들은 걸어서 이동했다.
▲심포리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하이원추추파크가 들어섰다. 당산나무인 500년 엄나무 아래 마을이 자리잡았고,
그 아래로 협곡이 펼쳐져 있다.
▲깊은 협곡에 자리 잡은 심포리역
▲심포리역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촬영한 곳이다.
해발 500m 부근의 심포리역은 지그재그 선로가 놓이기 전부터 지역 주민과 영동선 철도 이용객의 애환이 담긴 곳이었다. 심포리역에서 통리역 방향 언덕에는 고산지역을 운행하는 트램 선로처럼 급경사의 선로가 남아 있다. 객차 한 량 한 량을 쇠줄로 연결해 끌어올리고 내리는 강삭철도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찔한 경사여서 심포리에서 통리로 올라가든, 반대 방향에서 내려오든 승객은 열차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덕분에 짐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지게꾼들의 벌이가 쏠쏠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과 땅이 진 장마철에는 새끼줄 장수도 신이 났다.
등산화는커녕 변변한 신발조차 흔하지 않던 시절 이야기다. 강삭철도는 1963년 스위치백 철도가 개통하면서 소임을 마쳤지만 선로는 그대로 남았다.2012년 새 노선 개통과 함께 심포리 마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추추파크의 네이처빌, 큐브빌, 트레인빌 등 숙박시설과 오토캠핑장이 들어선 자리가 심포리 마을이다.
뒤편 언덕에는 5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엄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수호하듯 내려다보고 있다.마을 앞은 오십천의 최상류 ‘통리협곡’이다.맹수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퀸 것처럼 우람한 산세에 깊게 골이 패었다.
그 골짜기에서 피어 오르는안개가 마을을 휘감는 날이 많아 심포리의 고립감은 더욱 극대화된다.마을 앞 심포리역은 현재 소지섭과 손예지 주연의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촬영지임을 알리는 사진과 소품으로 장식돼 있다.
▲심포리~나한정역 구간 폐 선로을 운행하는 스위치백트레인 관광열차.
▲스위치백트레인에서 본 산마을.
▲흥전역에서 승무원이 내려 상하행 선로를 바꾸고 있다.
심포리역에서 스위치백트레인을 타면 흥전역을 거쳐 나한정역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하루 3회, 시속 40km 이하로 천천히 움직여 왕복 80분 정도가 걸린다. 증기기관차(실제는 디젤엔진)가 끄는 3량의 객차는 각각 색다른 분위기로 승객을 과거로 이끈다. 그러나 날이 추워도 스위치백 체험을 제대로 하려면 맨 뒤 칸 야외 입석이 명당이다.
흥전역에서 열차가 잠시 멈추면 승무원이 내려 선로를 변경한다. 이때부터는 맨 뒤 칸이 선두다. 시야에서 멀어지며 아련하게 좁아지던 선로가 이번엔 폭을 넓히며 뒤로 휙휙 지나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이 교차한다. 그렇게 나한정역을 통과한 열차는 잠시 마을의 오래된 풍경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선로를 바꿔 도계행 승강장에 멈춘다.
약 20분간의 자유 시간, 파스텔 톤으로 화사하게 장식한 ‘1940 커피가게’가 손님을 반긴다. 1940은 나한정역이 생긴 해다. 나한정역 화장실로 들어서는 입구는 작은 전시관으로 변했다. 집을 주제로 한 전시장 한쪽 벽에 주산학원,돼지갈비집, 얼음집, 한복집 등 ‘추억의 집’들이 작품으로 걸려 있다. 모두 도계의 한 시절을 거쳤을 삶의 흔적들이다
▲흥전역 주변 외딴집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나한정역 주변 낡고 오래된 풍경들. 스위치백트레인은 이곳에서 다시 한번 방향을 바꾼다.
▲나한정역의 ‘1940 커피가게’. 1940은 역을 개설한 해다.
▲무궁화호 열차가 하고사리역을 통과하고 있다.
▲하고사리역 옆에는 키 작은 소나무 대신 키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갔던 길을 거슬러 심포리로 돌아오는 길, 저 멀리 휘어지는 선로 옆에서 노루 두 마리가 다가오는 열차를 주시하고 있다. 충분히 가까워졌는데 미동도 하지 않는다. 조형물이구나 생각하며 카메라를 내리는 순간 가볍게 폴짝 뛰어
선로를 넘은 후 산으로 내달았다.
엉덩이 두 쪽에 하얀 색깔이 선명하다. 순간 가곡 ‘비목’에 등장하는 궁노루가 떠올랐다.‘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폐역의 쓸쓸함을 좇아가는 이 길도 결국 그들의 영토였던 것을.
도계에는 이 구간 말고도 고사리역, 하고사리역 등 2개의 폐역이 더 있다. 도계에서 동해로 내려가는 방향이다.자그마한 목조주택인 하고사리역은 주민들의 요청으로 철거를 면하고 등록문화재에 이름을 올렸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키 작은 소나무 대신, 버드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려 운치를 더한다.
출처 / hankookilbo.com / 삼척=글ㆍ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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