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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아시아****국가들/⊙중국****서북지방

산시성(陝西省)ㅡ실크로드.시안(西安)ㅡ신라 고승 圓測 , 玄奬을 반박하다

by 삼수갑산 2022. 3. 7.

실크로드ㅡ시안ㅡ신라 고승 원측, 현장을 반박하다

▲흥교사(興敎寺) 입구

 

현장은 자은사에서 불경번역에 매진하는 동안 원측(圓測)을 만난다. 원측은 신라 사람으로 진평왕(眞平王) 때 모량부(牟梁部) 왕족 출신의 승려다.3세에 출가하여 15세 때인 627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였는데, 현장과 함께 법상(法常), 승변(僧辯)을

스승으로 모시고 동문수학하였다.

 

스승들로부터 구유식(舊唯識;마음에 내재하는 사물의 모습은 허구라는 관점)의 토대를 확고히 한 원측은 645년,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을 만나 신유식(新唯識; 마음에 비친 객관의 모습은 고유한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을 접하고 사상적으로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원측은 현장의 불경 번역 사업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이미 현장에 버금가는 지식을 갖춘 상태였다. 원측이 신라로 돌아갔을 때 부처에 버금갈 정도로 원측을 떠받들었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원측에게 환국을 간청할 정도였다.

 

▶신라 고승 원측, 현장을 만나다

 

자은사를 돌아보고 나오니 커다란 광장에는 분수 쇼가 한창이다. 음악에 맞춰 뿜어내는 분수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바람이 났다. 자은사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현장상도 물벼락을 맞은 채 웃고만 섰다.

 

 

▶자은학파는 원측 비방에 열 올리고

 

“원측이 우리의 강설을 몰래 엿듣고 자신이 것인 양 떠들고 다닌다.”현장은 제자 규기(窺基)와 함께 자신이 추구하던 유식론의 입장에서 불경을 번역한다. 하지만 원측은 신유식과 구유식을 아우르는 입장을 취한다.

 

이때부터 현장-규기-혜소(慧沼)로 이어지는 자은학파는 원측을 비방하기 시작한다. 그 뒤 현장이 규기에게 강의하는 것을 원측이 몰래 엿듣고 미리 발표했다는 도청설을 유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날조된 것이다. 원측은 규기보다 스무 살 이상 많다.

 

원측은 자신이나 그가 속한 당파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의도도 없고, 학식도 규기보다 월등이 높았다. 측천무후가 원측을 극도로 예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에서 원측의 명성과 위상은 매우 높았다.

 

또한 태종으로부터도 서명사(西明寺)의 대덕(大德)으로 지명 받아 많은 책을 집필하는데, 원측이 서명사에 기거하며 강의․찬술한 것에서 그의 제자들을 ‘서명학파’라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컸다.

 

▲흥교사 원측탑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

“현장! 당신의 생각은 조화롭지 못하오.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법이오.”당시 중국 불교계의 논쟁은 ‘공(空)’과 ‘유(有)’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유식론을 중시하는 쪽은 ‘유’를 중시하였는데, 현장은 기존 유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유식을 전파하였다. 원측은 현장의 신유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공과 유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반해 현장의 적통임을 자부하는 자은학파는 신유식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종파적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공과 유의 조화를 모색하는 원측의 입장을 극렬하게 반박하였다.

 

또한 원측은 현장, 규기가 강조한 오성 가운데서도 깨닫지 못하는 종성(種性)이 있다는 ‘오성각별론(五性各別論)’을 비판하면서,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실유불성론(悉有佛性論)’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보다 불교의 참뜻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원측이 주석한 경론은 신라와 일본, 그리고 티베트까지 전해진다. 원측에서 비롯된 서명학파의 유식이론이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데 신라 출신의 이국 승려가 자신들보다 뛰어난 사상을 편다면 중국 불교의 위상은 어찌되겠는가? 자은학파가 원측을 비방․날조한 것은 한족의 정통성과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러한 편협함 때문에 현장이 창시한 법상종(法相宗)은 대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황실의 손길이 미치지않게 되자 소리 없이 스러지고 만 것이다. 한편, 원측은 중국 불교의 번영에 엄청난 기여를 하는데, 이는 그의 사후 ‘사리탑명병서(舍利塔銘幷序)’에적힌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서명사의 대덕으로 부름을 받고서 ‘성유식론소’10권, ‘해심밀경소’10권, ‘인왕경소’3권, ‘강반야관소연론’,‘반야심경’ ‘무량의경’등의 소를 찬술하였으며, 현장법사의 신비로운 전적을 도와 당시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되었다.현장을 도와서 불법을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무궁한 교법을 크게 일으키신 분이다.”

▶세계 불교계가 주목하는 해심밀경소

원측은 중국 불교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승려이기도 하지만, 그의 저서인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함께 신라 고승의 3대 저작물로 세계 불교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원측-해심밀경소

 

현장과 원측, 규기의 사리탑이 있는 흥교사(興敎寺)를 찾았다. 흥교사에 이르니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서안의 주산인 종남산(終南山)기슭에 있는 흥교사는 669년에 창건된 고찰로 당대에는 번천(樊川)의 8대 사찰 중 으뜸이었다. 1862년 청나라 때 섬서성 지역 회족들의 봉기로 탑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타버린 것을 1939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현장은 태종에 이어 고종 대에 이르러서도 불경 번역 사업에 헌신하다가 664년에 입적한다. 고종은 “국보를 잃었다”라고 하며 애통해 하고 장안 동시(東市)의 비단 장사들은 3,000필의 비단을 바쳐 상여를 장엄하게 꾸미고자 하였지만, 현장의 유언에 따라 검소한 대자리 거적으로 상여를 만들었다.

 

현장의 사리는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이곳 흥교사에 사리탑을 세워 모신 것은 669년이다.흥교사 내 자은탑원(慈恩塔院)으로 들어선다. 입구는 중국의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둥근 원 모양의 문양으로 담쟁이 넝쿨이 고색창연함을 더해 준다.

 

오래된 측백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세 탑이 병립해 있다. 가운데 5층 전탑(塼塔)으로 세워진 것이 현장의 사리탑이고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이 3층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세 탑의 북쪽에는 세 칸의 사찰이 있는데 안에는 현장이 짐을 지고 있는 모습의 부급도(負笈圖), 현장행정도(玄藏行程圖)와 현장의 전기와 그를 기리는 물품 등이 있다.

 

특히, 현장의 부급도는 마치 살아 있는 현장의 모습을 보는 듯한데, 먼 길을 오고가는 동안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불경이 가득 담긴 행장을 지고 오는 문화교류자로서의 현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은 송나라 때 전해진 그림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흥교사 자원탑원

 

신라에선 승직을 못 받고 중국에선 ‘해동(海東)의 고덕(高德)’으로 칭송

원측의 사리탑을 돌아본다. 그는 신라 6부의 하나인 모량부의 박씨 왕족 출신이다. 모량부는 중고시대까지 황후를 배출한 집안이다. 하지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치면서 모량부는 황후를 배출하지 못하고 쇠락한다.

 

신문왕 대에 이르러 구세력을 척결하는 대규모 숙청이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효소왕은 모량부 익선아간(益宣阿干)의 뇌물사건을 빌미로 모량부를 탄압한다.

 

그리하여 모량부 출신은 벼슬은 물론 승직(僧職)도 제수 받지 못하게 된다. 중국에서 ‘해동(海東)의 고덕(高德)’으로 칭송받은 원측이건만, 자국인 신라에서는 연좌제로 인하여 승려조차 될 수 없었다.

 

15세 소년 원측의 유학은 왕비족을 배출한 가문의 존엄을 되살려야 한다는 비장함보다는, 모량부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불도에 더 깊이 정진하려 했던 구법유학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던 장안에서 원측은 깨달았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인간세상과 광대한 정신세계에서 승려인 자신이 가야할 길을 말이다. 이때부터 원측은 오로지 학문연마에만 몰두하였고, 그 결과 당대의 고승들 가운데서도 맨 윗자리인 상좌(上座)에 오른다.

 

▲흥교사 편액

흥교사 입구에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종루가 있다. 그 안에는 한국의 어느 사찰에서 기증한 종이 있다고 하는데, 한국의 종소리를 듣고 싶어 요청했지만 시간이 이른 까닭에 안 된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대웅보전 위의 ‘흥교사’ 편액의 서체가 특이하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중국 근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인 강유위(康有爲)가 쓴 것이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꼬장꼬장하고 강직한 것이 강유위의 품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만 같다. 명필을 대하면 절로 흥겨움에 들뜬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치 추사가 선운사에서 초의선사의 글씨를 다시 보고 감탄했던 것처럼. 흥교사를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원측 스님과의 만남이 머나먼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나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출처 / premium Chosun.com / [허우범의 실크로드 대장정]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