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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아시아****국가들/⊙중국****서북지방

간쑤성(甘肅省)ㅡ실크로드.란저우(蘭州)ㅡ文化大革命 와중에서 살아난 후진타오 전 주석 琵琶湖 만들다

by 삼수갑산 2022. 3. 9.

실크로드ㅡ란저우(蘭州)

문화대혁명 와중에서 살아난 후진타오 전 주석 비파호(琵琶湖) 만들다

병령사(炳靈寺) 석굴 가는 길

난주에서 실크로드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병령사(炳靈寺) 석굴을 빼놓을 수 없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교역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도 전파되었는데 불교가 제일 번성하였다. 그래서 불심이 강한 스님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욕심에 천축(天竺:인도)으로 향하였다.

병령사 석굴은 이런 구법승(求法僧)들이 난주에서 황하를 건너 서역으로 향할 때, 심신을 안정시키고 불심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병령사 석굴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황하로 인한 토사유출을 막기 위해 댐을 만들었는데, 그 댐으로 인해 생긴 커다란 호수를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올라가니 유가협(劉家峽)댐이 보인다. 이 댐은 조하(洮河)와 황하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147m, 제방 길이가 840m에 이른다. 장강에 삼협댐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중국 최대의 댐이었다.

 

중국의 4대 벼루중 하나인 조하벼루는 이곳 조하의 바닥에 있는 돌로 만든 것이다.병령사 석굴은 유가협댐에서 약 50㎞ 거리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사람들은 난주를 거쳐 병령사 석굴에서 숙박한 뒤 서쪽의 사막으로 향하였다. 일반 배시간은 멀었기에 5인용 보트를 탔다. 학생 3명이 같이 탔는데, 난주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경에서 두 명의 친구가 왔단다.

 

먼 곳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몇 달치 용돈을 절약하고 밤기차에 기대어 왔다는 북경의 친구들. 멀리서 온 벗들과 함께 병령사 석굴로 향하는 난주의 친구.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할 만큼 참으로 아름다운 우정이다.

 

▲백령사모습

 

바다 같은 琵琶湖

보트는 창공으로 포말을 흩뿌리며 질주한다. 물새들이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르고 기기묘묘한 절벽은 모델인 양 온갖 자태를 뽐낸다. 비파호(琵琶湖)라고 불리는 인공호수는 말이 호수지 바다처럼 넓다. 그도 그럴 것이 최대 폭이 65㎞ 에 이르고, 평균수심은 100m에 이르니 바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트운전자는 유가협댐을 후진타오 전 주석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유가협댐은 1958년에 중국과 구 소련의 공동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1960년에 둘 사이가 나빠져 러시아인들이 철수하면서 잠시 중단된다. 당시 국내 최대의 수력발전소 건설사업이 중단되는 것은 커다란 손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0년간 엄청난 인원과 노력을 동원해 완성했는데, 이때 후진타오 전 주석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던 것이다. 후진타오는 명문대학인 청화대학교에서 수력발전을 전공했고, 이를 토대로 댐건설에 열중하며 문화대혁명의 회오리를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같은 비파호

 

댐 건설로 생긴 비파호는 많은 마을을 수몰시켰다. 유가협댐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떠나야 했던 아픈 역사가 잠겨있다. 댐으로 인해 호롱불 대신 전깃불이 들어오면 누군가는 행복하겠지만, 누군가는 고향을 버려야 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아픔을 끌어안아야 한다. 천지개벽이란 이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날에는 이런 천지개벽이 여기저기서 빠르게 일어난다. 인간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통해 편리함을 누리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사회를 더 황폐화시킬 뿐이다. 푸른 호수를 바라보니 천 수백 년 전 구법승의 모습이 보인다. 조랑말과 봇짐을 지고 평화롭게 걸어가는 모습. 법현도 현장도 혜초도 보인다.

 

마을 백성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스님들의 말씀에 감복하며 합장하는 모습.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람들이 어울린 한 폭의 낙원화(樂園畵)다.지나가는 보트의 물살에 낙원의 모습은 사라지고 내가 탄 배는 한 시간을 달려 병령사 입구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는다. 광대한 호수는 어느덧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괴석을 품은 채 발길을 재촉한다. 입구로 들어서자 절벽에

병령사임을 알리는 누각이 보인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隊商)들은 이곳에서 황하를 건넜다고 한다.

병령사 산허리의 봉우리는冰靈寺上山如削
측백 숲 사이 용이 서린 듯한데 柏樹龍蟠點翠微
황하 포말 걸친 다리는 오죽 절경이겠는가況有冰橋最奇絶
은빛 무지개 곧게 뻗은 하늘 오르는 사다리로세 銀虹一道似天梯

명나라 때의 어느 시인은 겨울의 병령사 모습을 이처럼 읊었다. 당시에는 석굴입구에도 물이 많이 흘렀던 것이다.

겨울의 병령사를 상상하며 비탈진 계곡을 오르니, 한여름 무더위도 조금은 사라지는 듯하다.

▶부서지고 덧칠하고, 실크로드 길목의 十萬佛

‘병령’이란 말은 ‘향파병령(香巴炳靈)’의 줄임말로 티베트어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십만불(十萬佛)’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천불동(千佛洞)이나 만불동(萬佛洞)처럼 불상이 많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 석굴은 길을 따라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43개의 석굴과 152개의 감실(龕室)이 있다. 그중 184개의 석굴과 감실이 기슭을 오르는 초입에 몰려있다

 

▲병령사 현암대불

 

석굴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169호굴의 ‘서진건흥원년(西秦建弘元年)’이란 명문(銘文)으로 미뤄보아, 적어도 420년부터 시작된 것은 확실하다. 이후 불상과 벽화는 북위, 북주, 수, 당시대에 활발히 조성되었는데 대부분이 수당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토번(吐藩)이 이 지역을 차지한 763년 이후부터 병령사 석굴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 뒤 원나라 때에는 이곳에 라마교가 득세했는데, 그때 상당수의 벽화를 덧그리면서 라마적인 성격의 소상(塑像)들도 많이 조성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잦은 민족분규로 불상과 벽화가 많이 파손되었다.

169호굴은 병령사 석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데다 불상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특히, 결가부좌한 불상이나 입상(立像) 등은 간다라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이 서진(西秦)시대 이전부터 인도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려준다.

 

452년, 북위(北魏)의 제5대 황제인 문성제(文成帝)가 불교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 융성하게 되었는데, 제7대 황제인 효문제(孝文帝)가 더욱 장려하면서 이곳 석굴도 크게 번성한 것이다.

병령사 석굴은 이 석굴을 대표하는 171호굴의 현암대불(縣岩大佛)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함께 있던 와불상(臥佛像)은 댐건설로 인해 반대편으로 옮겨져 있다. 이 거대한 현암 좌불상(座佛像)은 당나라 때 조성되었는데 높이가 27m다. 상반신은 천연의 돌기둥을 이용해 만들어졌고, 하반신은 찰흙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 석굴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조각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점착력도 좋아서 많은 불상이 만들어졌다. 다양한 석굴들을 감상한 뒤 옮겨 놓은 와불상을 보기 위해 반대편에 이르니, 현암좌불을 중심으로 병령사의석굴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보아도 웅장함이 돋보이는데 옛날 실크로드 대상들과 구법승이 오가던 전성기에는 얼마나 화려하고 웅대했을까.

오색찬란한 벽화와 단청의 전각들, 그리고 황금빛 불상들이 뿜어내는 광채가 어우러져 병령사 계곡은 그야말로 극락세계였으리라.

▶25년 전 중국의 自問, ‘하상(河殤)’

유가협댐을 벗어나 다시 난주 시내로 돌아온다. 난주 시내는 여전히 뿌옇고 황하는 어제처럼 거칠게 흐른다. 난주를 출발하기에 앞서 한 번 더 황하 주위를 돌아본다.

그대는 아는가
하늘 아래 황하가 몇 십 구비를 돌아 흘러가는지.
돌고 도는 구비마다
몇 십 척의 배가 있는지.
수 십 척 배 위에는
또 얼마의 삿대가 드리워 있는지.
돌고 도는 구비마다
또 몇 십 명의 사공이 노를 젓고 있는지를….

 

▲하상의 내용

 

25년 전, 중국의 중앙TV는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엄숙한 주제의 6부작 ‘하상(河殤)’방영하였다. “중국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비판과 함께 중앙정치국의 제재를 받을 정도로 “중국인의 정신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하상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어둡지만 분명하였다. 수천 년 동안 이어온 황하문명은 여러 번 외세의 충격을 받았지만, 결코 멸망한 적이 없다.

 

이처럼 강대한 문명의 동화역량을 잘 알고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새로운 문명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보충해야만 한다. 그리고 외친다.“용의 후예들아! 황하가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우리 선조에게 다 주어버렸다. 우리 선조가 창조한 문명을 황하가 다시 낳을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황하는 1만 리를 가르고 마침내 바다로 흘러든다. 20세기 말, 그리고 21세기 개혁의 거센 바람이 눈앞에 불어 닥치고 있으니, 우리는 장차 어떠한 용기와 담력과 식견 그리고 반성의식을 준비해야 하는가?”서구를 능가하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유구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중국인의 비장한 각오. 이것이 ‘하상’의 목적이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오늘,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비장한 각오가 성과를 거둔 것이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가장 중국적인 것으로 서구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려 한다.공자적 유교주의에 입각한 중화중심주의가 그것이다. 전 세계에 공자학원을 설립하고 지원하는 것이 그 단초다.

 

나아가 현 중국 땅에서 명멸했던 여러 국가를 자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것도, 전 세계를 중화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두고픈 소망의 우선적 조치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 관계를 통해서만 문명을 주도하고 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중국인의 근원이자 정신과도 같은 황하. 그래서 어느 나라의 강보다도 흙빛 짙은 황하. 황하가 너무도 탁하기 때문에, 100년을 기다려도 맑아질 수 없다는 뜻의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말이 생겨났다. 이로부터 중국인들은 가능성이 없는 일을 기다릴 때 백년하청이란 말을 쓴다.

 

25년 전 중국인들이 스스로의반성에서 시작한 노력이 황하처럼 혼탁해져 초심을 잃어버리고 산으로 오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역사왜곡은 백년하청을 넘어 천년하청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유가협댐

그러나 중요한 것은 21세기는 중세 봉건시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통치자가 시대를 잘못 판단하고 정책을 구사하면 국가의 존망이 빠르게 결정되는 시대이다. 다국적 민주주의의 힘이 대세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분명 문명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새롭게 창조한 문명이 인류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으려면 오랑캐를 제압하여 복속시키겠다는 봉건적 잔재를 뇌리에서 씻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황하[河]에 빠져 일찌감치 몰락[殤]하는 끔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황하의 물길이 거세진다.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생각도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중국이 목적달성을 위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동안,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치욕의 역사를 향해 치달리고 있지는 않는가?

 

25년 전 중국인들이 물었던 질문을 우리는 어느 때가 되어서야 물을 것인가? 세계의 흐름은 황하의 물길처럼 하루가 다르게 거세지는데, 우리는 작고 비좁은 땅에서 아귀다툼만 하고 있을 것인가.‘다이내믹 코리아’는 좋은 말이 아니다. 이해타산에 멱살잡이나 하는 난장판을 가리는 홍보문구일 뿐이다. 국가 백년대계는커녕 10년도 생각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낑낑대며 걸어가는 우리들도 정녕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니 황하의 거친 물길 옆에서 간담이 서늘해지고 온몸이 자지러짐을 느끼는 것이다. 황하문명을 창조한 중국도 스스로를 걱정하며 쉬지 않고 정진하는데, 우리는 한강의 기적에 만족하는 양 자만의 늪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황하의 물길이 무섭게 뒤섞이며 튀어 오른다. 금방이라도 삼킬 듯한 기세다. 그 황하 위에서 나지막이 조리는 노래가 황톳물이 되어 내 가슴에 들이친다.

굽이치는 황하
오천 년을 넘고 중원을 건너
용의 포말 흩뿌리며 오르려는데,
봉황은 벽오동 위에서
달콤한 꿈에 졸고 있는가.
창공은 이미 높고 햇살은 따가운데
언제 잠에서 깰 것인가.
삼천 깃털 하나로 펼쳐
아, 언제야 날아오를 것인가.

 

출처 / premium Chosun.com / [허우범의 실크로드 대장정]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