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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전라 북도****기행

전북 진안ㅡ한국의 절집 순례ㅡ마이산 금당사(馬耳山 金堂寺)

by 삼수갑산 2021. 10. 17.

마이산(馬耳山)ㅡ조계종(曹溪宗) 사찰 금당사(金堂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 814년(현덕왕 6) 중국 승려 혜감()이 창건하였다.통일신라시대의 절로 사찰의 위치는 마이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위치한다.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의 11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와 함께 세웠다고 한다. 당시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 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다른 하나의 창건설은 814년(헌덕왕 6) 중국승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한때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쳤는데, 한때 고려의 고승 혜근(惠勤, 1320∼1376)도 이곳에 머물며 수도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다른 하나의 창건설은 814년(헌덕왕 6) 중국승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한때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쳤는데, 한때 고려의 고승 혜근(惠勤, 1320∼1376)도 이곳에 머물며 수도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쇠락하였으나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였다. 그 뒤 1978년에는 명부전, 1987년에는 산신각, 1990년에는 극락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지장전·삼성각·대방(大房) 등이 있다.

 

대웅전은 약 300여 년 전에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나한전에 봉안된 6척의 목불좌상(木佛坐像)은 동구나무로 만든 것으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고, 너비 5m, 길이 9m의 괘불(掛佛)은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대웅전 앞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탑 1기가 있는데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마이탑사(馬耳塔寺)와 단군을 받드는 이산묘(이山廟)가 있다.

 

▲현재 경내 왼쪽의 미륵입상 앞에 연못 이 있어 절 이름 그대로 금당(金塘)을 이루고 있다.

1682년(숙종 8) 괘불을 조성하였는데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는 공백으로 남는다.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이는 보덕 스님의 행장을통 해 절의 창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보덕 스님은 고구려 후기의 스님으로서고구 려에서 열반종을 널리 알인 개조(開祖)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재위 642~668) 이 중국에서 도교를 들여와 받들뿐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왕에게 도교만 믿고 불교를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해질 것임을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이 끝내 그의 말 을 듣지 않자스님은 650년(보장왕 9) 제자 11명과 함께백제의 완산주(完山州)로 내려와

고대산(孤大山)에경복사를 지어 『열반경』을 강의하였고,함께 온 11명의 제자 역시 절을 짓고 포교하였다고 한다.

 

▲금당사의 창건주인 무상 스님 역시 그 11명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데, 나머지 제자 중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지금의 임실에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數)는 경상북도 문경 사불산에 대승사(大乘寺)를,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 모악산 에

대원사(大原寺)를,수정(水淨)은 정읍 칠보에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제 자인 계육(契肉)과 함께 진안 성수산에 중대사(中臺寺)를,개원(開原)은 충청북도 단 양 금수산에

개원사(開原寺)를,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창건된 당시의 절은 지금의 위치에서악 1.5㎞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 다.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 사(穴巖寺)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

 

▲절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1675년( 숙종 1)의 일이다.한편 또다른 창건설로는 814년(현덕왕 6또는 876년

(헌강왕 2)에 중국인 혜감(慧鑑)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말도전하는데, 문헌의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 어렵다. 절은 창건후

고려시대 말에 이르기까지완주에 자리한 경복사(景福寺)를 중심으로한 열반종(涅槃宗) 사찰로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한때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도이 절에 머물며 수도해 도를 얻었다고 전한다.조선에서는 억불정책으로 사세가 많이 위축된 데다가 임진왜란ㆍ병자호란 등을 껶으면 서 쇠락되었으나,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어 중창을 이루게 되었다.

 

▲절 이름도 고금당에 있을 때의 옛이름인 금동사에서유래된 금당사(金堂堂寺)로 바뀌었는데,혹은 ‘金塘寺’로

쓰기도 하였다.

 

▲현재 경내 왼쪽의 미륵입상 앞에 연못 이 있어절 이름 그대로 금당(金塘)을 이루고 있다.1682년(숙종 8)

괘불을 조성하였는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는 공백으로 남는다.1914 년에는 칠성탱화를 봉안하였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1976년 금당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퇴락되어각 전각에 대한 중건 불사를 하였다.

요사의 신축을 시작으로 1978년 명부전, 1987년 산신각,그리고 1990년에 극락 보전을 새로 지었다.

또한 1985년 미륵입상을 조 성하였고,1991년 산신탱화와 용왕탱화를 봉안하였다.

 

출처 / blog.daum / 아람 풍경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