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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국가들/⊙남아공화국*기행

남아공ㅡ케이프타운(Cape Town)ㅡ남아공 케이프타운 여행기(1)

by 삼수갑산 2022. 8. 9.

케이프타운(Cape Town)ㅡ남아공 케이프타운 여행기(1)

아침 7시 30분에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엄청 큰 버스터미널이다. 고층빌딩이 주변에 있다. 눈앞에 보이는 고층 빌딩에는 만델라의 초상이 크게 만들어져 있다. 삼성 로고를 달고 있는 고층 빌딩도 옆에 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멋진 날인데 바람이 무척 분다. 도시가 깨끗하다.

 

숙소를 찾아간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킴보(Kimbo) 호텔이다. Roeland street 46에 있다. 지도를 보니 걸어가도 될 것 같다. 도시는 바둑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찾기가 쉽다. 가는 길에 멋진 기마상을 만났다.LOVIS BOTHA 라는 사람의 기마상이다. 트란스발 자치국의 사령관 이었단다. 

 

제 2차 보어전쟁(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에서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치국을 위해 많은 전공을 세운 보어인의 장군인데 영국의 처칠은 그를 가리켜 ‘자신이 기억하는 위대한 3명의 적장 중 한 사람’이라고 거론했던 인물이다. 동상아래에는 그를 소개하기를 농부와 군인이요 정치가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바로 숙소다.

 

숙소 1층은 식당과 주점이 있다. 2층에 숙소 리셉션이 있다. 2층과 3층이 숙소다. 우리는 방을 배정 받았다. 미리 예약을 했기에 그들이 준비해 놓았다. 키와 함께 환영의 음료수 티켓을 두 장 준다. 주점에 내려가서 음료수를 주문해 먹을 수 있는 표란다. 

 

방으로 들어가서 무장을 해제하고 짐을 풀었다. 아침이라 누룽지를 끓여 먹는다. 샤워를 하고 빨래도 한다. 여기서 케이프타운을 떠날 때가지 머물려고 맘을 먹었다.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먼저 1층 술집에 들어가 오렌지 주스를 2잔 주문해서 마셨다. 공짜로 주니 반가웠다. 

 

제법 오래되 보이는 건물이다. 건물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테이블마운틴이 병풍처럼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산이다. 처음 보는 산인데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옛날 애인을 보는 것 같이 감격적이다. 수리 숙소는 4거리 코너에 있다.

 

시내 투어를 한다. 가이드 북 번호를 따라 돌아본다. The SQUARE 라는 규모가 큰 건물을 지나간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이 Cape Craft and Design Institute 라는 건물인데 디자인 예술단체 건물이다. 

 

건물에는 귀엽고 늘씬한 젊은이들이 칼라풀하게 그려져 있다. 아내도 함께 서서 사진을 찍었다. Sins of Style이라는 문신 전문 가게도 있다. 건물이 아주 예쁘게 칠해져 있다. District Six Museum라는 문화유산 박물관이 있다. 

 

어두운 과거인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의해 자행되었던 1970 년대에 지역 6에 있는 각종 인종의 60,000 주민의 강제적인 억압과 분리, 삶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District 6 재개발 사업이다.

 

 District 6는 케이프타운 번화가에서 아주 살짝 벗어난 평지인데 인종차별정책에 의해 유색인종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에서 갑자기 그곳을 잘 정비된 백인 거주 지역으로 만들겠다며 유색인들을 강제로 내쫓고, 건물을 마구 철거해 버렸다. 자고 일어나니 불도저가 내 집과 동네를 깨부수고 있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District 6 박물관은 그때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과 관련 이야기를 모아놓은 곳이다. 당시 거리의 사진관과 거리 표지판, 실제 사용하던 물건들, 당시 상황에 대한 인터뷰들이 작은 건물에 빼곡히 정리되어있다. 알려진 바로는 흑인 빈민촌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냥 유색인종들이 사는 마을이었고 백인들은 이 양지바르고 전망 좋은 땅을 탐한 것이다. 

 

빵집도 있고 이발소도 있고, 6만 명이 살고 있는 아주 잘 갖추어진 마을이었는데 갑자기 강제 이주 당해버린 것이다. 백인 전용구역이라는 표지판도 있다. 실제로 인종차별정책이 폐지되자 수많은 백인들이 남아공을 떠났다고 한다. 백인만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있다. 지금 District 6 지역은 별도 개발 없이 빈 장소로 남겨 두었다고 한다.

 

당시의 도로, 주거, 교통표지를 비롯해 철거 당시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박물관은 현재는 전시 보관 뿐 아니라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단다. 주택의 건설, 환경 개선 그리고 음악, 문학, 예술 분야로 확대되어 주민들이 활동을 하고 있단다.

 

 다른 인종의 존엄성과 전체성 그리고 공존을 목표로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교회 건물 같은 느낌이다. 회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박물관은 깔끔한데, 주변의 건물들도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어 예쁘다. 

 

한 블럭 지나니 가이드북의  Sacks Futeran Building 건물이 있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축구에 관련된 상설 기념관 겸 매장이다. The Fugard Theatre라는 공연예술극장 건물도 보인다.

 

 번 캐슬 오브 굿 호프(Castle of Good Hope)성채에 도착했다. 17세기에 지어진 성곽이다. 제법 큰 규모의 해자와 두터운 성벽이 단단해 보인다. 제일 먼저 당시에 사용하던 대포가 버티고 있다. 요새 입구에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서 있다.

 

1666~1679년 사이에 당시 케이프타운을 지배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총재, 아이스란드 고스케의 명령으로 옛날 요새 자리에 대규모로 케이프 요새를 증축했다. 1691년부터 수년간 요새 안뜰에 몇 개의 주요 건물들이 증축되었다.

 

그 이후 1910년대 남아공에 정권을 이양하고 영국총독이 철수할 때까지 케이프 요새는 영국 총독의 공관으로 사용되었다. 요새 내부에는 식민시대 영국군의 흔적들을 모아놓은 작은 박물관이 몇 개 있다. 감옥도 있다. 

 

잔디밭에서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작은 대포 시연이 진행되고 있다. 꽝 하는 소리가 제법 크다. 모두 귀를 막고 깜짝 놀랐다. 성곽을 둘러보고 고개를 들면 또 테이블 마운틴이 뒤에 버티고 있다.

 

길 건너편에 광장을 갖고 있는  Cape Town City Hall(시청)건물이 있다. 그 옆에는 중앙 도서관 건물도 있다. 시계가 달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 바로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의 시청사다. 누구는 국회의사당이라고도 한다. 남아공은 행정 수도, 입법 수도, 사법 수도를 각각 달리하는데 그로 인한 비용 중복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수도를 통합해야한다는 당위성은 있는데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광장에는 시청을 바라보고 있는 흰색 동상이 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 의 동상이다. ‘겸손의 틀안에 그대 자신을 가두라라는말로 알려진 19세기 남아프리카의 성자 앤드류 머레이는 1917년 남아공의 흐라프 레이넷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과 네덜란드 위트레이트 대학에서 10년간 공부한 후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남아공으로 다시 돌아와 목회를 시작했다. 기의 기도는 우스터 지역의 부흥에 불을 지폈다. 그는 기도와 겸손의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240여 편의 주옥같은 글은 기도와 겸손, 하나님께 대한 절대 헌신을 가르친다. -친구여, 이것은 비결 가운데 비결이다……이 겸손의 틀 안에 그대 자신을 가두라. 그 속에는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타락한 영혼의 정욕을 씻어 거룩한 생명으로 만드는 하늘의 물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기름이다. 그런즉 항상 이 안에 잠겨 있으라! 어디를 가나 입고 다니는 옷과 같이, 어디를 가나 묶고 가는 띠와 같이, 그것들을 버리지 말라! 오직 그 속에서만 호흡을 취하라. 겸손의 눈으로만 보고, 겸손의 귀로만 들으라. 그렇게 될 때는 그대가 교회에 나갔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나, 세상의 모욕을 받을 때를 막론하고 그 모든 것이 그대에게 교훈이 되며, 또 그것들은 합동하여 그대의 신령한 생명의 성장을 도울 것이다.[Andrew Murray, Humility, 김희보 역, 겸손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3),

 

팔리아멘트 도로로 걷다가 교회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을 앞에 두고 Iziko Social History Resource Centre라는 박물관 건물이 있다. 광장에는 배가 불룩한 중년의 동상이 서 있다. 길 코너에는  Iziko Slave Lodge라는 박물관도 있다. 이지코 박물관 슬레이브 롯지라는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박물관이다. 

 

노예무역이 활발하던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세계각지를 돌며 납치해 온 노예들을 이곳에 일단 수용해 놓고 사고파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노예들이 잡혀온 배 내부와 노예들을 싣는 방법 등을 재현해 두었다. 차곡차곡 짐짝처럼 싣고 왔다. 사람이 아니라 가축으로 취급되었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메리카대륙에서도 노예납치가 활발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엄청난 노예들이 끌려왔다고 한다. 당시 노예들이 각국에서 들고 온 생필품이나 케이프타운에서 생활하면서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되어있다.

 

그 뒤로 번 국회의사당 건물이 이어진다. 울타리를 통해 건물을 들여다보니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코너 에는 스머츠의 동상이 있다. 그는 정치가였다. 

 

테이블 마운틴으로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여러 개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등산로는 '해골의 골짜기'라 불리는 루트다. 이 루트는 가파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해골의 골짜기'를 스머츠 트랙(Smuts‘ Track)이라고도 부른다. 남아공의 전 수상이었던 얀 크리스티안 스머츠(Jan Christiaan Smuts, 1870~1950)가 이 길을 자주 애용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우리는 성 조지 성당을 거쳐서 Company’s Gardens 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에게는 인도가지의 개척지 중간에 있는 케이프타운이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모든 보급품과 음식물, 식수 등을 보급하는 역할을 위하여 컴퍼니 가든 을 만들어 필요한 보급품을 경작 및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현재의 만델라 호텔에서 이 컴퍼니 가든 까지 산책을 하고 휴식을 즐기는 곳으로도 이용되었다.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처는 물론 유명 관광명소로 이용된다. 현재의 규모는 원래 크기의 8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해시계도 있다. 연못에는 오리 새끼들이 수영 연습을 하고 있다. 정말 귀엽다. 새 머리 모양이 바닥에 만들어져 있다. 비밀의 새(secret bird)란다. 

 

새 머리에 있는 깃털 중 맨 앞의 것이 별도로 떨어져 있는데 이것이 깃털을 사용했던 옛날 펜의 모양이며 이를 이용하여 비밀을 적었다고 해서 비밀의 새란다. 종도 보인다. 노예의 종이란다. 

 

식민지 시절 동인도 회사에서 이곳 컴퍼니 가든 에는 경작 일을 하는 노예들에게 시간을 알려서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아렸던 종이란다.

 

번이 남아공에서는 전설적인 세실 존 로즈의 동상이다. 영국의 기업가로서 영국의 기후가 좋지 않아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남아공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이상은 아프리카 대륙을 영국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동상이 오른쪽으로 손을 뻗고 있는 것은 북쪽으로 아프리카를 식민지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49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짧은 인생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지 아직도 놀라운 일이란다. 아프리카 최고 대학 UCT, 유네스코에 등재된 식물원, 가든 시티 등을 소유하고 있다가 헌납했다. 가든 시티에는 가장 오래된 배나무가 있다. Saffron Pear Tree가 정식 명칭인데 300년이 넘은 나무란다. 현재는 마르고 죽어가는 이 나무를 살리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단다.

 

Garden House 라고 하는 케이프타운 최초 게스트 하우스도 있다. 최초에 Castle of Good Hope에서 방문자가 기거하였으나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기에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하여 이곳을 이용했다. 현재는 대통령이 케이프타운에 오면 사용하는 집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바로 왼쪽에 국회의사당이 있는데 대통령이 국회가지 지하 통로로 다닌다는 말이 있다. 

 

아직까지 집무실에서 나와 국회로 걸어가는 모습을 못 봤기에 나온 말이라고 한다. 남아공 국립도서관의 입구가 보인다. 컴퍼니가든, 국회의사당과 근접해 있다. 테이블 마운틴과 이지코 박물관이 한 눈에 보이는 정원의 중심에는 말과 인간의 동상이 만들어져 있다.

 

가든 주변 지역에는 번인 미술관 앞에는 스머츠의 동상이 만들어져 있다. 아주 작은 구슬로 꾸며진 장갑차가 전시되어 있다. 칼라 풀 한 색상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잘 꾸며져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끈다. 거위들과 다람쥐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시민들의 쉼터 공간으로 시설을 잘 만들고 가꾸어 놓았다.

 

 번 아프리카 박물관 앞으로 해서 번 남아공 유태인 박물관으로 갔다. 사용 중인 시나고그(회당)와 유태인 박물관, 홀로코스트 센터가 있다. 들어가는 입장료는 없지만 입장이 까다롭다. 가방과 몸을 전부 검사한 후 들여보내준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학살자 얼굴이 작은 명함판 크기로 전시되어있고 당시 모습이 사진들과 표로 전시되어있다. 어린 학생들이 이곳에서 견학 공부를 하고 있다. 조용히 구경하다가 나왔다

 

번 롱 스트리트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프랑스, 독일 대사관도 나온다. 예쁜 교회당을 보며 롱 스트리트 거리로 들어섰다. Mount Nelson Hotel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롱 스트리트에는 높은 건물들이 많다. HSBC은행도 있고 쇼핑몰들도 있다. 

 

아프리카 전통적인 물건을 파는 곳도 있고, 카페들도 있고 백팩도 보인다. 다양한 상점들이 많이 있다.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거리다. 유명한 테이블마운틴을 등지고 대서양을 품은 아름다운 도시의 최고로 북적대는 거리다. 

 

여기에 머무는 4일 동안 이 거리를 많이 다닐 것 같다. 화려한 색상과 그림으로 꾸민 맘마 아프리카 식당이 보인다. 저녁에만 문을 여는데 식당에 전통 민속 공연도 볼 수 있는 곳이란다.

 

 Bo-Kaap Museum으로 간다. 박물관이라기보다 예쁘게 색칠해 놓은 작은 집들의 모임이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하는 보캅 박물관은 현재 중요 문화재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18세기에 지어진 이 박물관은 말레이 사람들의 거주 구역에 위치하고 있다.

 

19세기 말레이계 이슬람교도의 전반적인 생활과 문화를 알아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남아공 인종은 아프리칸 흑인, 백인, 컬러드(혼열인), 아시안으로 구성되는데, 컬러드는 백인이 흑인을 감시하기 위하여 데려온 인종이다. 주로 이슬람계 사람(인도 및 그 주변 나라) 또는 백인과 흑인 또는 이슬람계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컬러드라고 부른다. 

 

요즘에는 아시아인까지 모두 포함시켜 부르기도 한다. 여하튼, 컬러드가 주로 거주하고 있는 보캅(Bo Kaap) 지역의 박물관에 도착했다. 즉 컬러드들에 대한 내용이 담긴 박물관이다. 

 

남아공의 박물관은 기대와 달리 많이 소박하다. 조그만 방 4개로 구성된 박물관이다. 사실 제 기대와 다르게 볼 것이 별로 없어서 실망했다. 보캅 지역은 알록달록한 원색의 집들로 유명하다. 왜 이렇게 색을 칠하게 되었는지는 조금 더 공부를 해야겠다.

 

지난 수백 년간 아프리카에서는 원주민 수천만 명이 전 세계에 노예로 팔려갔다. 가깝게는 아라비아 반도부터, 멀게는 미국과 브라질 등 대서양 반대편까지 '수출품'으로 취급돼 팔려가야 했다. 

 

경제 분석 전문기관 Verisk Maplecroft에 따르면,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 5곳 가운데 4곳에서는 여전히 '현대판 노예 노동'이 벌어지고 있다. 노예무역으로 인한 상흔이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예 수출'로 악명 높은 아프리카 대륙에, 거꾸로 '노예 유입'으로 형성된 마을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중심가에 있는 보캅(Bo-Kaap) 마을이다. 동남아시아 출신 노예들이 주로 정착했다고 해서 '말레이 지구(Malay Quarter)'라고도 불린다. 

 

보캅 마을에 동남아시아인이 끌려온 사연이 궁금하다. 과거 아프리카 대륙은 서구 열강들의 전쟁터였다. 영국은 동아프리카를 평정했고, 프랑스는 서아프리카 연안을 점령했다. 17세기 아프리카 남부는 네덜란드 출신의 보어(Boer)인 차지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남아프리카 외에도 동남아시아 섬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인도양을 지나, 케이프타운을 거쳐 유럽에 공급하던 동남아시아의 향료는 네덜란드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식민지 건설을 위해 자행된 폭력과 종교적 박해는 원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이슬람교도가 많은 인도네시아·인도 지역에서의 저항이 거셌다. 보어인들은 종교적·정치적 저항세력들을 색출했다. 

 

그중 일부가 노예로 케이프타운에 끌려왔다. 노예들은 당시 농장 노동자·금속세공사·구두 수선공 등 허드렛일을 담당해야 했다. 하층민들은 산비탈 아래 촘촘히 집을 지어 촌락을 이뤘다. 이것이 현재 보캅 마을의 시초다

 

종교적 박해 끝에 노예로 끌려온 '반골'들이 신념을 꺾을 리는 만무했다. 동남 아시아인들은 보캅 마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특히 인도 고아(Goa) 출신 이슬람 지도자 셰이크 유수프(Sheikh Yusuf)의 역할이 컸다. 1694년 유수프는 전쟁 포로가 돼 케이프타운까지 끌려오게 된다. 

 

보어인들은 이슬람 교리에 해박한 데다, 주변의 신임까지 두터운 유수프를 보캅 마을에서 떨어진 농장으로 이주시킨다. 하지만 유수프는 곧 동료 노예들과 함께 농장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후 탄압 속에서도 보캅 마을까지 영향력을 확대한다. 그리고 1795, 영국인들이 보어인들을 케이프타운에서 몰아내면서 유수프의 후예들은 노예 해방과 함께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된다.

 

이후 인종 간 결혼을 통해 동남아시아 출신 이슬람교도들은 흑인까지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는 등 보캅 마을은 독자적인 이슬람 문화를 형성했다. 남아공 인구 가운데 이슬람교도는 1.5%에 불과하다. 보캅 마을은 남아공 내에서도 독특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를 가진 곳이다. 

 

집집마다 알록달록 색을 칠한 보캅 마을은 케이프타운의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다. 보캅 마을은 20세기 초반까지도 하층민 거주 구역으로 남아있었다. 동남아시아인·인도인·흑인 이슬람교도들과 산업화 이후 생계를 찾아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한 도시 빈민들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20세기 초반 케이프타운 인구가 급증하면서 도심 개발 필요성이 제기됐다. 케이프타운 중심가에 맞닿은 보캅 마을도 개발 대상에 포함됐다. 이때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지지하던 백인 정권은 보캅 마을 해체를 시도한다.

 

1934년 정권은 빈민거주구역 법(Slum Act)을 제정해 부동산을 강제로 수용한다. 이어 1966년 보캅 마을을 포함한 6구역(District Six)이 백인 전용 거주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원주민들의 강제 이주가 가속화됐다. 

 

주민들은 부당한 강제 이주 조치에 저항해야 했다. 이 혹독한 싸움은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6구역에서만 주민 15만 명이 강제 이주한 까닭에 현재 보캅 마을에서 동남아시아 혈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취재 도중 다행히 아시아인의 이목구비를 가진 어린이들을 발견했다. 초등학생인 압둘 콰윰(Abdul Quayyoom··12) "아주 옛날에 조상들이 말레이시아에서 왔다고 부모님께 들었다"고 취재진에게 밝혔다. 무슬림인 콰윰은 동네 흑인 친구 집에 가기로 했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로 어울려 사는 이곳에서 인종을 구분하는 건 사실 무의미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무너진 뒤 이슬람교도 주민들 일부가 보캅 마을로 돌아왔다. 다시 찾은 자유와 평화를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슬람 전통 주거 양식인 하얀 벽면에 빨강·파랑·노랑 등 색을 칠했다. 

 

공동체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이웃한 집끼리는 서로 다른 색을 쓰기로 한 것이다. 20여 년 만에 알록달록한 주택 벽면은 보캅의 상징이 됐다. 이곳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든 원동력은 오랜 박해를 견디며 터득한 화합과 공존의 가치였다.(kbs에서)

 

오전에 끝이 났다. 배가 고프다. 눈에 익은 간판, KFC에서 점심을 먹었다. 워터프런트를 찾아가기로 하다. 걸어서 간다. 길은 잘 만들어져 있다. 넓은 도로위로는 좁은 육교가 길게 만들어져 걷기에 편리했다. 약간 뜨거운 것이 거슬린다. 그러나 푸른 하늘과 쾌적한 분위기가 기운이 나게 한다.

 

워터프런트의 정식 명칭은 빅토리아 & 알프레드 워터프런트케이프타운의 명소 중에 명소다. 19세기 유럽풍의 건축물과 고급스러운 노천카페가 줄지어 있어 세련된 풍광이다. 거기에 팜트리가 인상적으로 이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유럽에서 인도로 가기위한 중간 기착지로서 만들어진 항만이었으나 19세기 후반 남아공에서 발견된 금과 다이아몬드를 쫓아 전 세계에서 배가 몰려들자 규모를 확장하게 된 것이 오늘날 워터프런트의 시초라고 한다. 흔히 남아공을 아프리카 속 유럽이라고 칭하는 데는 이곳이 한 몫 한다. 

 

실제로 알록달록한 건물 사이를 거닐다보면 이곳이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거기에 새파란 하늘과 빛나는 햇살은 더욱 이곳을 아름답게 한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과 400여개가 넘는 쇼핑 상가에는 사람들이 많다. 다이아몬드 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가지 작은 박물관들도 있다.

 

거리의 악사들의 흥겨운 공연도 만날 수 있다. 8명의 빡빡 깎은 아저씨들이 연주와 노래를 한다. 좀 뜨거워 보인다. 멕시코 풍의 남미 악기 연주자들도 만난다. 클락 타워는 빅토리아 시대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고딕 풍 건축물이다. 눈에 띄게 빨간 외관인데 이곳의 대표 건축물이다. 

 

과거에는 항구 관리 책임자가 사용하던 사무실이었는데, 현재는 항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뒤로는 테이블마운틴 앞으로는 바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로맨틱한 도시다. 마리나 스윙 브릿지를 건너면 Victoria Whart라는 대형 마켓이 보인다.

 

Alfred Mall Gallery 앞에는 동물 모양이 잔뜩 만들어져 있다. 코끼리, 꼬뿔소, 타조 등이 버티고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항구이지만 현재 상용하고 있는 여러 선박들이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배를 수리하고 만드는 곳도, 어선이 정박하는 곳도 함께 공존한다. 더욱 생동감이 있는 부두다.

 

노란색 프레임에 올라서면 테이블 마운틴이 옆서처럼 나온다. 즐겁게 사진에 넣는다. 자세히 보면 바다에서는 물개들이 헤엄을 친다. 노벨광장에는 남아공 노벨상 수상자들의 동상이 있다. 만델라, 투투 주교, 데 클렉(FW de Klerk), 알버트 루틀리(Albert Luthuli).

 

The Cape Wheel이라는 커다한 회전 구조물은 역사가 오래된 물건이라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다. 만국기가 있는데 우리나라 태극기가 없어 아쉬웠다. 시계탑 뒤에는 로빈섬을 가는 배를 타는 곳(The Nelson Mandela Gateway To Robben Island)이 있다. 

 

사람들이 많다. 케이프타운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있다. 로빈 섬이다. 테이블 만 뒤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자그마한 섬 로빈 아일랜드가 그곳, 노벨 평화상을 받은 흑인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에 항거하다 27년간 복역생활 중 18년을 보낸 곳이다. 배가 고파서 매장으로 들어가 피자1판을 시켜서 먹다.

 

다시 걸어와서 롱스트리트를 걸어서 끝자락에 있는 캣 엔 무스 호텔을 찾았다. 케이프 반도 1 Bazbus 투어 투어비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물개 섬과 팽귄 서식지, 채프먼 스피크 드라이브, 자전거 타기, 희망봉 들을 돌아보는 코스다. 투어사는 850란드, 캣엔무스 호텔은 750란드다

 

컴퍼니 가든 뒷길에서 과일 파는 좌판대를 만났다. 망고 2개와 자두 4개를 샀다. 다리가 아프다. 숙소에서 라면을 끓여 저녁을 해결했다. K선생님 부부를 이곳에서 만나려 했는데 조기 귀국을 한단다. 아내가 나미비아에서 여행 중 병이나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간단다.

 

글.사진 출처 / blog. 서울 관당 이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