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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 아시아****국가들/⊙인도(印度)**기행

인도ㅡ말라바르(Malabar)ㅡ후추의 고향. 인도역사를 바꾼 향신료’알싸하고도 산뜻한 맛

by 삼수갑산 2022. 1. 15.

카르나타카州ㅡ말라바르(Malabar)

후추의 고향ㅡ인도 역사를 바꾼 향신료’의 알싸하고도 산뜻한 맛

▲인도는 후추의 고향이다. 남서부 커피농장에 가면 매년 겨울부터 봄까지 키 큰 나무를 타고 오르는

후추 덩굴에 달린 열매를 쉽게 볼 수 있다.

 

지금이야 단돈 몇천원이면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지만, 후추는 1000년 넘게 금보다도 비싼 향신료였다. 동양에서만 나는 후추를 구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은 십자군전쟁을 일으키고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부른 식재료가 바로 후추였다.

 

후추의 원산지는 인도 남부다. 정확히는 남서부 말라바르(Malabar) 해안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산지가 넓어지며 인도의 후추 생산량은 이제 세계 4위로 떨어졌다.

 

1위 자리는 베트남에 내준 지 오래지만, 여전히 인도는 고급 후추가 만들어지는 주요 생산지다. ‘세계사를 바꾼 향신료’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맛은 어떨까. 후추의 고향인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주(州)를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 세계사를 바꾼 향신료

 

여행을 떠나기 전 간단히 후추 공부부터 해보자. 인도의 후추는 기원전 4세기경 로마에 전해졌다. 고기 누린내를 잡아주는 후추는 육식을 즐긴 중세 유럽 왕족·귀족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음식 말고도 후추는 최음제, 방부제, 약재로도 사용돼 가치가 높았다. 후추 한 줌 가격이 노예 한 명 혹은 장인 한 명의 1년치 임금과 맞먹을 정도였다.

 

후추로 집세와 소작료, 세금을 지불하는 등 화폐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후추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고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었다.이렇게 귀한 후추는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왔다.

 

아랍과 베네치아 상인들이 중간에서 후추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멸망 후 후추 유통은 더 어려워졌고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유럽 각국은 중간 단계 없이 바로 인도에서 후추를 구하기 위해 경쟁했다. 그렇게 인도 항로를 찾다 유럽의 항해술이 발전했고 ‘스파이스 루트’가 개척됐다.

 

▲후추는 덩굴식물이다.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열매가 열린다.

후추 열매는 고추처럼 초록색을 띄다가 익을수록 붉게 변한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인도를 향해 서쪽으로 배를 몰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대륙 발견’이라 배운 그 사건은 원주민들에게 재앙이었다.

 

콜럼버스는 없는 후추 대신 금을 약탈했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이후 400년간스페인의 식민지로 수탈당했다.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이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최초로 인도에 도착했다.그 후로 그 땅도 서구 열강의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이런 역사를 알고 나면 콩알보다 훨씬 작은 후추 알갱이를 보는 감정이 달라진다.

 

인간의 한없는 욕망과 이기심, 누대에 걸친 피지배자들의 한과 눈물이 그 작은 열매 안에 담겨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발걸음이 조금은 무거워지고 주변 풍경에 던지는 시선도 무심하기가 힘들다.

 

▶ 키 큰 나무를 휘감은 덩굴

 

후추는 덩굴식물이다.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며 자란다. 후추 덩굴이 타고 올라가는 나무는 주로 커피밭이나 차밭에 심은 그늘나무(shade tree)다. 인도 남부는 커피와 차 산지로도 유명하다.

 

커피와 차는 적당한 그늘이 있어야 잘 자란다. 그래서 밭 중간중간 키 큰 나무를 심어주는데, 드넓은 밭에 전봇대처럼 줄줄이 버티고 선 나무기둥이 하나같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늘나무로는 대부분 실버오크(silver oak)를 심는다. 빨리 곧게 자라 선택된 나무다. 기자가 방문한 치크마갈루 인근 바드라 커피농장(Badra Balehonnur Estate)에선 높이가 20m쯤 되는 실버오크 나무마다 짙푸른 후추 덩굴이 거의 꼭대기까지 뒤덮고 있었다.

 

나무엔 수확을 위해 폭이 좁은 대나무 사다리가 걸쳐 있었다. 키가 껑충 큰 농장 인부는 익숙한 동작으로 성큼성큼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2~3m쯤 올라간 그는 한 손으로 나무를 끌어안은 채 다른 손으로 후추 열매를 따서 허리춤에 매단 자루에 집어넣었다

 

▲후추를 수확하는 커피농장 노동자. 한

손으로 나무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 후추 열매를 따 허리춤에 매단 자루에 담는다

나무를 내려온 그가 딴 후추를 손바닥에 펼쳐 보여줬다. 지름이 3~4㎜쯤 되는 동그란 열매는 초록색과붉은색이 섞여 있었다. 한참 익어가는 중이었다. 후추 열매는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열린다. 꽃이 진 자리에 초록색 열매가 한 줌씩 길게 달리는데 고추처럼 익을수록 색이 붉게 변한다.

 

▲후추 덩굴은 커피밭 그늘나무를 타고 꼭대기까지 오른다.

커피농장 일꾼들은 대나무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후추 열매를 수확한다.

 

덜 익은 녹색 후추를 따서 그대로 말리면 겉이 쭈글쭈글한 흑후추(black pepper)가 되고, 완숙한 붉은 열매를 따 사흘간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뒤 알맹이만 말리면 매끈한 백후추(white pepper)가 된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쓰는 흑후추는 특유의 진한 향과 맛을 살려 육류 요리에 주로 사용된다. 백후추는매운맛이 덜하고 부드러워 생선 요리와 잘 어울린다. 건조 방식을 달리하면 수확 당시 열매 색깔을 그대로 유지한 녹후추와 적후추도 만들 수 있다.

 

▶후추 같은 사람

 

눈높이에 달린 후추 열매를 손으로 따 옷자락에 쓱 문지른 뒤 입에 넣었다. 이로 깨물자 알맹이가 터지며 입안에 알싸한 향미가 폭발했다. 한국에서 늘상 접하는 캔에 든 후춧가루는 먼지 같은 생김새에 한꺼번에 많이 집어넣으면 텁텁한 느낌뿐이지만, 진짜 후추 열매는 달랐다.

 

매운 과일 같다고 할까. 혀를 얼얼하게 하는 매운맛 사이에 톡 쏘는 신맛도 있고 상큼하게 터지는 과즙도 있었다.게다가 농장마다 후추 맛이 미묘하게 달랐다. 껍질의 두께나 과육의 양도 차이가 났고, 맵고 떫은 정도도 제각각이었다.

 

맵기가 덜하고 과즙이 많은 후추는 여러 알갱이를 한꺼번에 씹을 수 있을 정도로 단맛이 느껴졌다.왜 인도 후추가 최고라고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커피밭의 그늘나무를 뒤덮은 후추 덩굴

 

▲차밭에도 키 큰 나무들마다 후추 덩굴이 감싸고 있다.

 

전 세계에 수십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미쉐린가이드 별을 서른개 넘게 수집한 스타 셰프 조엘 로부숑(2018년 사망)은 자신의 식당 메뉴에 인도산 말라바르 후추를 사용한다고적어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선 요리연구가 홍신애씨가 운영하는 서울 논현동 레스토랑 ‘솔트’에서 인도와 베트남, 아프리카산 후추를 골고루 사용한다. 솔트의 인기 메뉴는 후추로 간을 한 제철과일샐러드다. 올리브오일을 덜 쓰면서 후추로 과일의 단맛을 끌어올렸다.

 

▲굵게 간 후추를 듬뿍 뿌린 솔트 레스토랑의 과일샐러드

 

▲갓 수확한 후추 열매

 

인도에서는 덜 익은 초록색 후추 열매로 피클을 만들어 반찬처럼 곁들여 먹기도 한다. 우리가 산초로 장아찌를 만들어 먹는 것과 비슷하다. 한 커피농장주의 집에 초대받아 점심식사를 하면서 후추 피클을 맛볼 수 있었다.

 

설탕과 다른 향신료 약간을 더해 식초에 담가 맛을 낸 것이었다. 줄기째 나온 후추에서 열매 몇알을 떼어 씹었다. 맵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원한 맛이 있었다. 식탁에 차려진 여러 가지 커리와도 잘 어울렸다.

 

▲인도 가정집에서 반찬으로 흔히 내는 후추 피클

평소 인도음식을 즐기는 편이지만 인도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음식이 고역이었다.종류가 매번 바뀌긴 해도

커리에 로티·난 등 인도식 빵을 찍어먹는 단조로운 식사를 세끼 내내 반복하니 물렸던 것이다.

 

▲후추를 듬뿍 뿌린 계란프라이

 

신선한 후추가 구세주였다. 매일 아침 계란프라이에 후추를 듬뿍 쳐서 먹었다. 음식맛을 끌어올리는 양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요리를 다른 차원으로 이끄는 무엇에 가까웠다. 주객전도. 조연이지만 주연을 압도하는 존재감. 후추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실버오크 나무를 뒤덮은 후추와 커피농장 노동자

 

▲커피농장의 후추

 

▲초록색 열매가 풍성하게 맺힌 후추 덩굴

출처 / kyunghyang.com / 카르나타카(인도) =글·사진 김형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