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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국가들/⊙볼리비아****기행

볼리비아ㅡ코로이코(Coroico)ㅡ볼리비아 3대 코카 생산지 코로이코

by 삼수갑산 2022. 10. 4.

코로이코(Coroico)ㅡ볼리비아 3대 코카 생산지 코로이코

 

볼리비아 3대 코카 생산지 코로이코산비탈 경사면에 있는 아찔한 호텔하늘과 설산 아름다운 풍경 보여줘

 

▲볼리비아 코로이코 마을에서 바라본 일몰. 노동효 제공

“너는 천개의 베개를 가졌대!”

하루는 친구가 생년월일을 캐묻더니 명리학을 공부하는 제 어머니에게 들었다며 전한 말이었다. 겨우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천개의 베개’가 무엇을 은유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낯선 숙소의 베개를 베고 자던 밤, 오래전 벗이 전해준 말이 떠올랐다. ‘천’은 구체적인 숫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었으리라.

지구 둘레길을 여행하는 동안 참 많은 베개를 베고 잠들었다. 베개의 종류나 색깔만큼 숙박료도 천차만별이었다. 농가의 헛간, 여인숙, 여관, 로지,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호텔 등. 유라시아를 횡단하던 무렵엔 하룻밤 600원에 불과한 캠프, 북미를 여행할 땐 몇백달러를 호가하는 호텔에서 묵기도 했다.

 

지금껏 사용한 베개의 수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남아메리카 여행 중 묵은 숙소만 해도 200개가 넘으리라. 짧게는 하루, 길게는 한달.

◆가장 위험한 좌석

인간 생활의 3요소가 ‘의식주’라면 여행의 3요소는 ‘장소, 이동수단, 숙소’일 것이다. 물론 잠자리가 빠진 ‘당일치기 여행’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건 ‘나들이’라고 해야겠지. 숙소와 방을 선택할 때 선호하는 취향이 있을 텐데 나는 ‘전망’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아무리 높은 층이라도 끙끙거리며 오르곤 했다. ‘전망 좋은 방’만 있다면!

남아메리카에서 묵은 방 중 단 하나의 방을 고르라고 한다면 볼리비아의 ‘호텔 베야비스타’의 방을 꼽을 것이다. 창문 너머로 파란 하늘과 안데스의 산이 펼쳐지던 방, 시선을 내리면 숲이 펼쳐지고 시선 닿는 끝에 설산이 반짝이던 방. 그래, 코로이코엔 ‘전망 좋은 방’이 있었지.

케추아어로 ‘황금의 계곡’을 뜻하는 코로이코는 라파스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다. 해발 4천미터 알티플라노고원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지나 아마존으로 내려서기 전, 해발 1500미터 안데스 중턱에 자리한 마을. 라파스에 사는 도시인이 주말 나들이 삼아 찾는 여행자 마을이자 볼리비아 3대 코카 생산지다.

고속도로가 놓이기 전까지 코로이코를 찾는 여행자는 드물었다. 코로이코와 라파스를 잇는 융가스 도로는 잔도(棧道)와 다를 바 없었고, 비가 내리면 진창이 되면서 추락사고가 빈번했다. 현지인도 꺼리는 길이 세계인에게 알려진 건 한권의 책 때문이었다.

 

1981년 이스라엘 청년이 아마존에서 조난당했다가 구조된 경험담을 책으로 펴냈다. <정글>. 베스트셀러가 되자 요시 긴스베르그의 행로를 따라 아마존을 탐험하는 코스가 유행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청년들을 태운 버스가 추락했고, 사람들은 융가스 도로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데스 로드’라 부르기 시작했다.

 

▲라파스에서 코로이코로 가는 노선도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물건을 사는 코로이코 마을 주민들. 노동효 제공

브라질과 볼리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닦이면서 더 이상 코로이코까지 가는 데 목숨을 걸진 않아도 된다. 라파스 버스터미널에서 표를 예매했다. 이층버스 맨 앞자리. 그 자리가 없다면 다음 버스를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다행이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좌석은 전망을 잘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현지인 친구들은 가장 위험한 좌석이라며 만류했고, 안전벨트를 반드시 매라고 당부하곤 했다. 급정거하면 창을 깨고 튕겨 나갈 수 있다며. 30분 후 버스가 출발했다.

라파스를 빠져나온 버스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엘알토에 올라선 지 1시간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진눈깨비로 변했다. 찬 기온에 언 눈발이 유리창에 달라붙었다가 흘러내렸다. 안개가 뭉게뭉게 몰려들더니 길이 하얗게 변했다. 중앙분리대 없는 2차선 도로, 맞은편 차선의 안개 덩어리 사이로 트럭이 나타났다.

 

그 뒤의 차량이 추월하기 위해 중앙선을 넘었다. 앗! 정면충돌 직전 반대편 차량의 운전사가 핸들을 돌렸다. 아악! 내가 탄 버스와 스치며 반대편 고랑에 처박혔다. 버스 운전사가 내뱉는 욕지거리가 이층까지 올라왔다. 데스 로드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코로이코의 나무 간판과 이정표. 노동효 제공

◆창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곳

진눈깨비가 다시 비로 변했고, 마분지처럼 두꺼운 구름장들 사이로 해가 났다. 산악용 자전거를 실은 미니버스가 지나갔다. 옛 ‘데스 로드’엔 더 이상 차가 다니지 않는다. 대신 산악자전거를 타고 경사로를 내려오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여행자들의 명소가 되었다.

 

햇살 아래 코로이코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사면에 세워진 벽돌집들.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종종 본 풍경이지만 이들은 왜 이토록 아슬한 비탈에 건물을 짓는 것일까? 덕분에 전망 좋은 방이 존재할 수 있을 테지만. 광장에 이르러 버스가 섰다.

마을 분위기에 스며들기 위해 광장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수대 앞에서 재롱부리는 꼬맹이들, 체스 두는 노인들, 아이스크림 먹는 소녀들, 신문 읽는 중년, 연주하는 악사. 광장은 그 도시의 분위기를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는 장소였다.

 

현지인이 내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광장에 음악과 활기가 없다면, 그건 광장이 아니라 묘지지!” 나는 마을의 따사로운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숙소를 찾아 일어서려는데 곁에 앉았던 유럽인 커플이 말을 걸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니?”

“응, 한국! 너희도 지금 도착했니?”

“우린 떠나려고 숙소에서 막 나온 참이야!”

“숙소를 예약 안 했는데, 추천해줄래?”

“두 군데에서 묵었는데 어제 묵은 방의 전망이 끝내줬어! 방금 체크아웃했으니 아직 비었을 거야!”

“어딘데?”

“산페드로 성당 지나 골목을 내려가면 있어!”

그들이 알려주는 대로 호텔 베야비스타로 향했다. 관리인의 뒤를 따라 커플이 추천해준 방으로 들어갔다. 전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방의 네면 중 두면이 창으로 된 공간이었다. 평소 묵던 숙소에 비해 방값이 비쌌지만, 전망을 보고 나니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얼른 숙박계를 쓰고 방으로 들어왔다. 비탈 경사면에 호텔을 세운 덕분에 방이 아니라 스카이워크 끝의 전망대 같았다. 눈앞으론 하늘, 아래로는 숲, 멀리 보이는 설산. 새가 창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빗금을 그으며 날아갔다. 벌거벗고 있어도 지나는 새밖엔 방을 들여다볼 수 없는 방이었다.

샤워하며 E. M. 포스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전망 좋은 방>의 첫머리가 떠올랐다. 피렌체로 여행을 간 루시와 사촌 언니는 ‘전망 없는 방’을 배정받고 식사 때 푸념하다가, 또 다른 여행객 조지와 그의 아버지가 묵던 방과 바꾸게 된다. 우연히 만난 여행자들이 빠져나오고 내가 그들이 묵었던 방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비슷한 상황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전망 좋은 방으로 돌아왔다. 전등을 껐다. 활짝 열린 창 너머로 별들이 반짝였다. 지구 남반구를 채우는 별들이 자리바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1시간쯤 지나자 달빛이 슬며시 방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바닥이 은가루를 뿌린 듯 환해졌다. 달빛이 뺨에 닿을 무렵에야 잠이 들었다.

 

▲호텔 베야비스타의 전망 좋은 방. 노동효 제공

◆어디에나 있는 ‘완벽한 전망’

숲에서 잠들기라도 한 듯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사방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기상을 재촉했다. 어떤 새는 짧게 깍깍거렸고, 어떤 새는 길게 휘파람을 불었고, 어떤 새는 소프라노 톤으로 노래하는 듯했다. 닫아둔 창을 젖혔다. 유리문이 열리자 새소리가 볼륨을 높이며 방을 가득 채웠다. 온갖 다양한 새들이 함께 베토벤의 <합창>을 부르는 것처럼.

 

조식하고 나와 마을을 산책했다. 전체 인구는 1만2천명 정도지만 읍내 인구는 2천명에 불과했다. 우뚝 솟은 야자수와 노랗게 칠한 산페드로 성당, 날씨는 따뜻했고 마을은 아늑했다. 무엇보다 나그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 나무로 만든 상점 간판과 이정표였다.

 

네온사인 대신 나무를 깎아 활자를 새긴 간판이 상점마다 붙어 있었다. 호스텔, 펍, 레스토랑 등. 심지어 버스터미널에도 목각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우연히 만난 현지인의 소개로 태권도장을 구경하기도 하고, 데블 스틱을 갖고 노는 히피와 어울려 낮술을 마시기도 하는 사이 하루가 지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나무로 된 간판도 어둠 속으로 잠겼다. 상점 주인들도 가족과 함께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 집으로 들어갔다.

코로이코에서 사흘을 묵었고, 또 하나의 베개가 늘었다. 다른 도시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무심코 고개를 쳐들었다. 두 눈을 채우는 풍경. <전망 좋은 방>에서 주인공 조지는 풀밭에 드러누우며 전직 기자인 아버지의 말을 전했더랬다. “내 아버지께선 완벽한 전망은 오직 하나뿐이랬어. 그건 머리 위로 보이는 하늘이지!” 그래. 꼭 ‘전망 좋은 방’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어느 곳에 있든 고개 들고 머리 위를 보면 ‘완벽한 전망’이 있다.

 

글.사진출처 / naver.com /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