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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국가들/⊙멕시코****기행

멕시코ㅡ멕시코시티ㅡ활기 넘치는 원색의 거리엔 여전히 피 흘리는 ‘프리다 칼로’들

by 삼수갑산 2022. 8. 31.

멕시코시티(Mexico City)

활기 넘치는 원색의 거리엔 여전히 피 흘리는 ‘프리다 칼로’들

▲멕시코시티 외곽에 위치한 과달루페 성당.

과달루페 성당은 멕시코 사람들을 비롯해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찾는 성모 발현 성지로 알려져 있다.

 

국경을 자주 넘는 여행을 하다 보면 한 장소에 대해 ‘여기서는 이런 이야기, 저기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멕시코가 위험하다고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예요. 특히 여기 멕시코시티는 인구가 2000만명에 가깝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있지만, 또 놀랍게도 세계에서 8번째로 인구가 많은 이 도시에서 사람들이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도시이기도 해요.

 

뉴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멕시코가 ‘마약의 제국, 위험한 나라’의 대명사만은 아니에요.” 멕시코시티에서 가족을 이루고 무려 15년이나 ‘무사히’ 살아온 현지 가이드의 말이다. 며칠 후 쿠바의 아바나에서는 한국말이 유창한 쿠바인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다.

 

“멕시코는 아주 위험한 나라입니다. 언론인이 가장 많이 살해당하는 나라, 아이들이 수십명씩 납치되어 돌아오지 않는 나라, 마약카르텔 범죄가 끊이지 않는 나라예요. 그에 비하면 우리 쿠바는 천국이죠.” 쿠바에 도착하기 사흘 전에는 ‘멕시코가 생각보다 살기 좋은 나라구나’라는 인상을 받았던 나는, 쿠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서글퍼졌다.

 

두 사람 다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진실을 말하고 있고,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제3자인 내가 볼 때, 멕시코도 쿠바도 더없이 아름다운 나라다.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나라인 것처럼.

 

◆맵고 짠 강렬한 음식에 정신 번쩍 / 색색 판초 입은 사람들 보면 흐뭇

 

▲멕시코의 역사와 신화를 총망라한 멕시코 인류학 박물관의 하이라이트, 아즈텍 태양석(Aztec Sunstone)

 

그러나 이 모든 복잡한 감정 이전에 내 마음속에 각인된 잊을 수 없는 멕시코는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나라’라는 점이다. 프리다 칼로는 내게 ‘멕시코의 색깔’이 지닌 기묘한 활기와 해맑은 생동감을 가르쳐주었다.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화려한 원색들을 과감하게 하나의 화면 안에 거침없이 배치하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이 모든 빛깔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도, 어떻게 전혀 촌스럽지 않고, 이렇게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느낌을 주는가?’ 하는 즐거운 의문을 품게 해주었다.

 

그것은 프리다 칼로의 재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접하고 만들어가는 ‘삶의 색채’일 것이다.

 

황량한 벌판에 돋아난 선인장으로 더없이 달콤한 술 데킬라를 빚어내고, 형형색색의 판초를 입고 기타를 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낭만과 서정을 노래하는 마리아치들, 그저 집히는 대로 이것저것 얼기설기 걸쳐 입었을 뿐인데 마치 성대한 파티의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듯한 느낌을 주는 거리의 멕시코 여인들.

 

그들의 현란하면서도 정감어린 색감, 그들의 더 이상 크게 지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환한 미소, 매운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위장병에 자주 시달린다는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매콤하고 쌉싸름한 음식들의 향기. 그 모든 멕시코스러움이 프리다 칼로의 캔버스 위에 펼쳐져 있기에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아프고 우울한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조차도 그토록 활기차고 생동감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강렬한 색감의 오색찬란한 실들을 과감하게 배치한 멕시코의 카펫.

멕시코 특유의 색감이 잘 느껴지는 이런 직물들은 멕시코시티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나라 멕시코에 마침내 도착한 기쁨도 잠시, 나는 하루 종일 지속되는 두통과 마주해야 했다. 해발 2250m 높이에 위치한 멕시코시티에 처음 도착한 날부터 거의 사흘 동안 나는 온몸이 퉁퉁 붓고 머릿속에 안개가 뿌옇게 낀 듯한 갑갑함을 느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미약한 고산증이라고 한다.

 

물론 나중에 겪게 될 ‘마추픽추의 고산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처음 멕시코시티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흔히 앓는 증상이다. 하루 종일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 들었지만, ‘멕시코의 색채’를 볼 때마다 눈이 번쩍 뜨이곤 했다. 형형색색의 망토와 카펫을 파는 노점상인들, 한국어로 ‘어서오세요’를 외치며 ‘핸드메이드’라고 주장하지만 조금은 미심쩍은 가방과 스카프를 파는 사람들,

 

그리고 형광색에 가까운 핑크빛이나 눈이 시릴 정도의 청보라색으로 벽을 칠했지만 묘하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집들, 그리고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보이는 수많은 향신료와 야채와 과일들이 펼치는 눈부신 자연의 색채들. 그 모든 것들이 마음을 빼앗았다.

 

청바지를 뚫을 정도로 강력한 자외선 때문에 멕시코 사람들은 여름에도 두꺼운 판초를 걸쳐 입곤 하는데, 눈이 시리게 새파란 하늘 아래 알록달록한 판초를 입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멕시코의 색채, 그리고 눈물 나게 매콤하고 짜고 시큼한, 아무튼 ‘강렬함’ 그 자체인 멕시코 음식이 지닌 향기는 끊임없이 여행자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주는 천연 각성제가 되어주었다.

 

여행자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해주는 멕시코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은 좋았지만, 멕시코시티 거리 곳곳에서 느껴지는 빈부격차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로 보인 것은 ‘여성의 인권’ 문제였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셋, 넷이나 낳아 힘겹게 키우고 있는 멕시코 여성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일찍 결혼하고, 대체로 다산하고, 대가족의 집안 살림과 온갖 책임을 홀로 떠맡는 멕시코 여성들의 삶은 프리다 칼로가 살아 있던 시절보다 과연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프리다 칼로를 괴롭혔던 것은 디에고 리베라의 거침없는 자기중심성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디에고 리베라 개인만의 성격이 아니라 멕시코 문화의 본질적인 남성중심성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은 프리다 칼로가 세계적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뛰어넘는 주목을 받고 있지만, 살아 있을 때 프리다 칼로는 죽기 바로 1년 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예술가 프리다’로서의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녀가 받은 주목은 지금처럼 그녀의 작품세계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러나 위대한 화가임에는 분명한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라는 점이었다.

 

프리다의 남편으로서의 책임감은 내려놓은 채 거침없이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진 디에고 리베라는 급기야 프리다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르고 만다. 프리다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 인생에는 두 가지 심각한 재앙이 있었다.

 

첫 번째 재앙은 열여덟 살 때의 교통사고였고, 두 번째 재앙은 바로 디에고 리베라였다. 사실 디에고 리베라가 더욱 심각한 재앙이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 ‘두 명의 프리다’에는 바로 그런 상처로 인해 분열된 그녀의 쓰라린 자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다산에 생계 책임 여성들 고된 삶 멕시코,

남성중심주의 뿌리 깊어 ‘쾌걸 조로’는 전형적인 마초 남성
여자라는 이유로 주눅 들지 말길

 

▲프리다 칼로의 1939년 작품 ‘두 명의 프리다’. 프리다 칼로의 분열된 자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히메네스의 노래 ‘왕’의 가사에는 멕시코 남성들 사이에서 면면히 내려온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돈이 있든 없든 나는 항상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내 말이 곧 법이도다.

 

나에게는 왕좌나 왕비도 없고 나를 이해하는 이들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나는 왕이니라.” 멕시코 소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쾌걸 조로>만 봐도 멕시코 문화의 본질적인 남성중심주의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실감 나게 드러난다.

 

조로가 아름다운 여인 롤리타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하는 행동은 하나같이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무례하고 ‘반(反)페미니즘적’으로 보인다. 롤리타가 자신의 공간을 침입한 조로를 경계하며 어서 가라고 하자 조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 잔인하시네요, 아가씨! 아가씨는 보기만 해도 뜨거운 열정으로 온몸이 달아오르게 하는 분인데. 아가씨의 그 상큼한 입술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어떤 남자라도 홀로 수많은 적과 맞서 싸우려 들 겁니다.”

 

“남자다운 남자라면 기꺼이 아가씨를 지키다 죽으려 할 겁니다. 이렇게 우아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분을 위해서라면!” “한 번만 더 손을 주세요. 그러면 가도록 하죠.” 계속 거부하는 롤리타를 향해 그는 끊임없이 치근덕거린다. “그럼 사람들이 몰려와서 잡아갈 때까지 여기 그냥 앉아 있겠어요.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금방 그렇게 될걸요.” 롤리타는 기어이 ‘손을 잡히고’ 만다.

 

그는 롤리타의 손을 잡겠다는 자신의 열망을 달성하고 나서야 못 이기는 척 그녀의 공간을 떠난다. 더 황당한 것은 그녀가 그런 조로에게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가슴 두근거리는 열정을 품는다는 점이다.

 

롤리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강도지만 남자다운 남자야! 돈 디에고가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박력과 용기의 반만큼이라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렸을 때는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를 보며 진심으로 ‘얼굴을 가린 신비의 남자, 복면을 쓴 강도 시뇨르 조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성적 매력도 집단의 학습효과가 크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매력적이라고 선전하는 남성’의 우월함에 나 또한 매혹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각인된 ‘마초적 남성성’에 대한 어리석은 동경이었음을 안다. 조로가 아무리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는 국민적인 영웅이어도, 그는 여성의 방에 함부로 무단 침입한 예의 없는 남성이고, ‘씩씩한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을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야 남자다’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마초가 아니었을까. 롤리타는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박력과 용기”의 반만큼만 자신의 약혼자가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조로의 박력과 용기를 바로 ‘나 자신’이 갖기를 원한다.

 

멕시코시티를 여행하며 나는 내 안에 여전히 상처 입어 피 흘리는 프리다 칼로를 만났고, 그리고 이제 내 안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그녀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우리 현대 여성에게는 ‘쾌걸 조로’가 필요치 않다. 우리 자신이 조로처럼, 아니 조로를 뛰어넘는 용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고,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사회를 향해 용감하게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그리고 결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주눅 들지 말았으면.

출처 / kyunghyang.com /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기행]=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