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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ㅡ플라타이아(Plataea)ㅡ그리스 위해 헌신한 小폴리스…강자들의 배신, 남은 건 폐허뿐

by 삼수갑산 2022. 9. 9.

플라타이아(Plataea)

그리스 위해 헌신한 小폴리스…강자들의 배신, 남은 건 폐허뿐

플라타이아의 고고학 유적지에는 약간의 무너진 토대와 돌무더기들만이 남아 있다(오른쪽 작은 사진). 드론 사진 속의 어렴풋이 남은 성곽과 도로의 흔적을 보고 나서야 한때 도시가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큰 사진). 유적지 뒤로는 풍요로운 평야가 펼쳐져 있다. 플라타이아가 멸망한 진짜 이유는 저 평야를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경석 사진작가

 

살라미스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친 그리스 연합해군에 대패한 후 페르시아 대왕 크세르크세스는 소아시아로 돌아갔다. 그리스 정복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대왕의 사촌이며 맹장인 마르도니우스(Mardonius)가 30만 명의 정예와 남았다.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려면 살라미스만으로는 부족했다. 육지에서의 승리가 절실했다.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맹주 스파르타가 동맹군을 이끌고 앞장섰다. 아테네도 8000명의 중장보병을 보탰다. 최종 승리를 위해 바다에서 다시 뭍으로 올라온 것이다. 고향을 잃고 난민으로 떠돌던 플라타이아의 중장보병 600명도 참전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규모도 4만5000명에 달했다(헤로도토스, '역사').

두 군대는 페르시아군의 병참본부였던 테베 인근,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대치했다. 불탄 플라타이아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전투는 보급이 원활치 않아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리던 그리스 연합군이 한밤을 이용해 플라타이아 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어둠과 낯선 지형 때문에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아침까지 철군해서 진을 치는 데 실패했다. 마르도니우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명했다.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군과, 테베군은 아테네군과 맞붙었다. 혈전이었다. 스파르타는 최악의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했지만 순식간에 판세를 뒤집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생 같이 훈련했으며, 냉혹하게 창을 내지르는 전사들로 구성된 스파르타의 방진은 천하무적이었다.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무너졌다. 마라톤, 살라미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예상을 뒤엎고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위풍당당했던 원정은 결국 플라타이아에서 종결됐다.

 

◈페르시아와 전쟁에 앞장선 플라타이아(Plataea)

아테네와 동맹 의리 지켜 - 인접 폴리스 테베의 위협 속에
아테네와 동맹 맺어 독립 유지, 마라톤 전투에 全軍 파병 헌신

페르시아의 2차 침공 때도 참전 - 페르시아 육군 축출에 기여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전투… 승전 뒤 동맹군의 찬사 받아

독립 보장 맹세 저버린 스파르타 - 아테네와 전쟁 벌어지자 침공
플라타이아는 2년간 버텼으나 아테네의 외면 속에 멸망당해

 

아테네에서 차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너른 평야가 나타난다. 산이 많고 척박한 그리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풍요로운 보이오티아(Boeotia)다. 다양한 작물과 채소의 재배지가 이어지고, 사방의 스프링클러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뿜어져 나온다. 시선을 멀리로 옮기면 야트막한 구릉이 이어져 있다. 평안하다.

 

그러나 언제나 이렇지는 않았다. 긴 역사 속에서 이곳 주민들은 훨씬 많은 시간을 긴장 속에서 보냈다. 그리스의 운명과 역사를 가른 중요한 전투가 몇 차례나 벌어진 분쟁의 땅이기도 했다. 이유는 보이오티아가 그리스의 남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오티아의 중심 도시는 테베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페니키아 왕의 아들 카드모스가 세웠다. 유명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Oedipus)가 왕이었던 도시이기도 하다. 한때 스파르타를 꺾고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잡은 적도 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반항한 대가로 불탔다(기원전 335년).

 

훗날 재건됐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금도 특색 없는 지방 도시에 불과하다. 오히려 플라타이아(Plataea)가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보이오티아에서 가장 궁금했던 고대 도시이기도 했던 플라타이아는 테베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로 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오늘날 이곳은 폐허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남은 게 별로 없다. 표지판을 보고 찾아간 고대 도시에는 잡초만이 무성했고, 무너진 일부의 돌벽만이 쓸쓸하게 도시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정말 도시가 있기는 했던 걸까? 드론을 띄워 공중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서야 도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플라타이아는 역사적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지명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승리, 자유, 명예의 동의어이기도 했다. 그 플라타이아는 어쩌다 폐허만을 남기고 사라졌을까?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마라톤에서 아테네와 함께 싸우다

플라타이아는 작은 폴리스다. 비록 작지만 명예롭고 존경받았다. 플라타이아가 처음 역사에 이름을 날린 건 기원전 490년 늦여름이었다. 당시 마라톤에서는 아테네가 홀로 페르시아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가 아테네의 위기를 외면하고 있을 때, 플라타이아는 유일하게 같이 싸우기 위해 마라톤에 파병했다.

 

중장보병은 1000명을 넘지 못했지만 아테네는 기꺼이 감사했다. 그들이 플라타이아의 모든 중장보병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타이아는 동맹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왔다. 플라타이아는 테베에서 코린토스, 스파르타, 혹은 아테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보이오티아 전체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망에 불탔던 테베는 언제나 플라타이아를 정복하고자 했다.

 

전략적 교차로에 있으나 작고 힘없는 폴리스의 운명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아테네에 의존했고, 아테네는 이웃한 테베의 성장을 막기 위해 플라타이아를 도왔다.

 

오늘날도 세계 도처에서 보게 되는 국제정치의 한 장면이었다. 그 동맹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누구도 아테네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전투에 플라타이아는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무모하게 신의를 지킨 데 대한 보상은 컸다. 전투에서 아테네는 승리했고, 플라타이아는 그 영광을 나눠 가졌다.

▶위대한 승리의 땅, 플라타이아

마라톤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강한 침략자 편에 붙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31개의 폴리스만이 페르시아에 맞섰다. 플라타이아는 그 소수 중 하나였다.

 

테베는 지역의 맹주였지만 시종일관 페르시아의 주구(走狗)였다. 그리스 세계의 자유와 독립이란 가치를 테베는 한 번도 우선시한 적이 없다. 그 작은 플라타이아를 페르시아의 대군이 물려와 정복하고 불태웠다. 주민들은 일찌감치 피란을 떠났지만, 오랜 터전은 폐허로 변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모두에게 외면당하다

플라타이아 승리의 유물, 전리품으로 만든 황금솥… 이스탄불에 받침만 남아

 

▲플라타이아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청동 삼두사의 기둥(아래 사진).기둥 위에 있던 뱀의 머리 일부(위)는 현재 이스탄불 국립고고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서경석 사진작가

터키 이스탄불에 플라타이아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다. 플라타이아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로부터 획득한 전리품 10분의 1로 황금으로 된 세발솥을 만들어 델포이 신탁에 봉헌했다. 세발솥은 청동으로 만든 삼두사(三頭蛇) 위에 얹혀 신탁의 제단을 장식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가장 값지다는 유물들을 끌어모아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황금 세발솥과 청동 삼두사도 이때 델포이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황제는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이 귀한 유물로 원형경기장 한가운데를 장식했다. 세발솥은 사라지고 삼두사만 남아 그날의 영광과 사라진 폴리스의 슬픈 운명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출처 / chosum.com / 송동훈 문명 탐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