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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ㅡ용사의 무덤, 테르모필레(Thermopylae)ㅡ100만 대군에 맞선 300…용기의 원천은 자유였다

by 삼수갑산 2022. 8. 30.

그리스 용사의 무덤, 테르모필레

100만 대군에 맞선 300…용기의 원천은 자유였다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가 페르시아의 대군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싸웠던 테르모필레 전투 현장에는 오늘날 레오니다스 왕의 당당한 동상이 서 있다. 그들은 비록 졌지만 자유에 대한 투쟁의 불쏘시개가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서경석

 

▶우리의 목적지는 테르모필레(Thermopylae)

기원전 480년 여름, 미증유의 위기로 그리스 문명 전체가 뿌리째 흔들렸다. 페르시아 대군이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그리스로 진군을 시작한 것이다. 페르시아의 대왕 크세르크세스(Xerxes·재위 기원전 486~465년)가 직접 대군을 이끌었다. (고대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그 수가 보병만 170만 명이라고 적었으나, 현대 학자들은 20만 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절대 권력자의 친정(親征)인 만큼 패배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 세계 전체가 공포에 떨었고, 대부분 폴리스가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무릎 꿇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폴리스 31곳만이 싸우고자 뭉쳤다. 7일 낮과 7일 밤에 걸쳐 헬레스폰투스 해협(오늘날 터키 서부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넌 페르시아 대군은 그리스의 좁은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남하했다.

 

승리를 자신한 여유로운 행군이었다. 오히려 다급한 건 스파르타였다. 그리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덕에 자연스럽게 반(反)페르시아 연합군의 수장을 맡았으나, 8월이 오면 스파르타는 전쟁을 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 행사인 카르네이아 제전이 8월에 열리는데, 그 기간에 스파르타인은 스파르타를 떠날 수 없었다.

 

그것이 스파르타의 법이었다. 마라톤 전투 때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돕지 못했던 것도 전투가 카르네이아 제전 기간에 열렸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법에 충실했지만 그렇다고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을 지켜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스파르타는 레오니다스(Leonidas·재위 기원전 490?~480년) 왕의 지휘하에 일단 소규모 부대를 먼저 파견하기로 했다. 그 숫자가 300명이었다. 왕이 직접 용사를 선발했는데 용맹과 결단력, '대를 이을 아들이 있느냐'가 기준이었다. 최고의 용사 중에서도 여한 없이 죽을 수 있는 용사만 선발한 것이다. 왕과 특공대 300명은 북쪽을 향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그리스 중부의 '뜨거운 문(Hot Gate)', 테르모필레였다.

▶내 자유를 원한다면 '와서 가져가라'

테르모필레(Thermopylae)는 깎아지른 듯한 산맥 끝머리와 바다 사이에 형성된 긴 협로였다. 협로 앞에 뜨거운 온천이 솟아나는 샘이 있기 때문에 '뜨거운 문'이라 했다. 예로부터 그리스 중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요지였고, 페르시아 대군이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있는 그리스 남부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오늘날에는 오랜 세월에 걸친 퇴적작용으로 해안선이 바다 쪽으로 1㎞ 이상 길어졌지만 기원전 480년에는 가장 좁은 지점의 폭이 15m에 불과했다. 지형적으로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페르시아, 마라톤 전투 설욕 전쟁 -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원정군
헬레스폰투스 해협 건너 진격, 그리스의 좁은 해안 따라 남하

그리스 연합군 이끈 스파르타 - 종교 제전 기간이라 출병 못해
왕과 특공대 300명만 우선 출동… 테르모필레 협로 막고 전투

이틀 연속 페르시아군 패퇴시켜 - 중무장 300명 대오 깨지지 않아
뒤로 돌아 포위한 페르시아군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

 

'300'이란 제목의 영화가 개봉한 건 2007년 봄이었다. 몇 달을 손꼽아 기다렸다. 개봉 첫날, 개봉관 중에서 가장 큰 용산 아이맥스로 갔다. 두 시간여 동안 정신없이 영화에 몰입했다. 좋았다. 극장과 DVD를 포함해 지금까지 서른 번 이상 봤다. 화려한 전투 장면 때문도, 남자 출연자들의 '절대 복근' 때문도 아니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과장과 왜곡에 홀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영화의 소재가 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와 300용사가 품었던 이상(理想)과 용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이상. 자유를 지키려 기꺼이 목숨을 거는 용기. 영화를 보는 내내 심장이 쫄깃했던 이유다.

그 감동의 현장을 찾아가는 길은 설렐 수밖에 없다.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고대 그리스 세계의 성지(聖地)였던 델포이에서 가는 길이 가장 극적이다. 웅장하고 험준한 산맥을 굽이굽이 타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높다란 산들 틈에 점점이 박힌 그림 같은 마을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산세가 뚝 끊기고 시원하게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테르모필레다. 스파르타 전사 300명이 죽음으로 자유를 지키고자 했던 그곳에는 거대한 레오니다스 왕 동상이 서 있다.

 

체격이 건장한 왕은 창을 높이 들고 테르모필레를 응시하고 있다. 격렬했던 그날의 전투를 회상하는 것일까? 그날 왕과 300용사는 바로 이곳에서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당당하게 맞서 싸우다 스러져갔다. 오직 자유를 위해!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테르모필레 앞에 놓인 산들의 험준한 모습. 오랜 퇴적작용으로 오늘날은 해안선이 멀어졌으나,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는 산이 끝나는 곳에서 바로 바다가 시작되는 천험의 요충지였다. /서경석

 

레오니다스와 특공대 300명은 다른 폴리스들이 파견한 4000여 군사와 함께 페르시아 대군을 기다렸다. 드디어 테르모필레에 도착한 크세르크세스는 사절을 보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레오니다스의 대답은 간단하지만 명료했다. "Molon Labe!" '와서 (직접) 가져가라'는 뜻이다.

 

무기를 스스로 내려놓을 수 없다는, 자유를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는 담대한 선언이었다. 전투가 시작됐다. 페르시아 궁수들의 화살이 하늘을 가렸고,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수만 군대가 들이닥쳤다. 스파르타 용사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협곡 입구를 막아선 채, 방진을 이뤄 마치 한 사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은 그야말로 최강의 전쟁 기계였다.

 

페르시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불사(不死) 부대'조차도 스파르타인 300명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첫날, 둘째 날의 전투는 그렇게 페르시아군의 참패로 진행됐다. 둘째 날 저녁, 그리스인 중 배신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배신자는 페르시아 측에 험준한 산을 넘어 테르모필레의 뒤를 칠 수 있는 샛길을 알려줬다. 크세르크세스는 즉시 최정예 불사 부대 1만 명을 샛길로 투입했다. 그 소식은 얼마 후 레오니다스에게도 전해졌다.

 

소수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대군에 포위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모두의 이목이 총사령관 레오니다스에게 집중됐다.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스파르타 특공대 300명은 남아서 협로를 지키고, 나머지 그리스군은 즉각 후퇴함으로써 목숨을 건져 훗날을 도모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스파르타인다운 결단이었다. 명령은 바로 시행됐다.

▶'조국의 명을 받아 여기 누워 있노라'

셋째 날 전투는 가장 치열했다. 스파르타인들은 포위된 채 빗발치는 화살을 맞으면서도 항복하지 않았다. 창이 없으면 칼로, 칼이 부러지면 칼자루로, 칼자루마저 잃으면 주먹으로, 주먹에 힘이 빠지면 이로 물어뜯으면서 싸웠다.

 

레오니다스 왕을 비롯한 모두가 죽을 때까지. 크세르크세스는 그렇게 테르모필레를 차지했다. 기쁘기는커녕 등골 오싹한 승리였다. 대왕은 페르시아인답지 않게 레오니다스의 시신을 훼손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대군은 아테네를 향해 남쪽으로 나아갔다.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었다.

 

▲레오니다스 왕 동상 앞 작은 언덕 ‘콜로노스(Kolonos)’는 300명의 전사가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시모니데스의 추모시가 새겨진 동판이 놓여 있다. 1세기의 철학자 아폴로니오스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콜로노스를 들며 “그곳에는 준법과 고결한 자기희생의 정신이 올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바 있다. /서경석

레오니다스와 300스파르타 전사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웅적 죽음은 산 자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리스는 결국 떨쳐 일어나 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게 될 운명이었다. 레오니다스 동상 앞에 있는 작은 언덕은 스파르타 전사들이 최후의 저항을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언덕에 오르면 작은 동판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시모니데스의 시가 새겨져 있다. '길손들이여, 스파르타에 가서 전해주오. 조국의 명을 받아 우리 이곳에 누워 있노라고.' 그들은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다. 여기 어딘가에 죽은 채 버려져 누워 있었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과 정신을 새겼다. 옛 시인의 노래처럼 그들은 조국의 명을 받아, 그리스의 자유를 지키려고 싸우다 죽었다. 당시에는 그리스 세계가, 오늘에는 전 세계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이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자유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한 그들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곳 테르모필레와 함께.

 

▶나치, 300용사 다르게 해석… 혈통주의·사회통제 정당화

 

역사는 '사실(事實)'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만큼이나 주관적 관점도 중요하다. 레오니다스와 테르모필레 전투도 마찬가지다. 이 전투는 자유를 위한 숭고한 투쟁이었을까? 아니면 지나친 스파르타 전사 미화였을까?

2011년 7월, 방송 촬영차 처음 테르모필레를 찾았을 때 레오니다스 동상 주변은 검은 옷을 입고 인상이 험악한 사람들 수백 명으로 가득했다. 신나치를 지지하는 극우 정당 지지자들이었다. 살벌했다.

경찰들조차 멀찍이서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에게 레오니다스와 300스파르타 전사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핏줄의 순수성과 엄격한 사회 통제를 중시한 스파르타 사회를 나치가 자신들에게 대입시켜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국 출신으로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1911ㅡ1993)은 테르모필레 전투를 전제적인 페르시아의 침고에 맞서 싸움싸움으로써 그리스 문명을 보존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자유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세계사적 사건으로 봤다.

 

골딩은 1965년에 출간한 에세이집 제목을 테르모필레를 뜻하는 'The Hot Gates'로 이름 짓기도 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선택은 독자 스스로의 몫이다.

출처 / chosun.com / 테르모필레=송동훈 문명탐험가